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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

조선후기 화성 경관의 시각화 양상과 화성전도

by 衍坡 2022. 5. 16.

조선후기 화성 경관의 시각화 양상과 화성전도

(박정애, 2021, 「조선후기 華城 경관의 시각화 양상과 華城全圖」, 『한국고지도연구』 13-2)


20220413


1. 머리말

• 수원화성도: 성역 준비부터 마무리까지의 과정을 반영 → 1789년(정조 13)~1801년(순조 1) 집중 제작
‣ 성역이 완료된 화성 일대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시각 매체
‣ 화성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의미가 투영된 회화 사료
• 지방 읍성도
‣ 18~19세기: 지방 읍성의 모습을 그린 회화식 지도와 實景圖 제작
‣ 19세기: 성읍도 제작 활성화 → 화성전도 제작이 촉진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

1872년에 제작된 지방지도 - 홍주목과 공주목

• 논문의 목표
‣ 화성전도의 정형이 확립되어가는 과정 검토
‣ 화성전도의 역사적 의미와 19세기 지방 성읍도 전개 양상과의 관계 규명

2. 정조의 화성 프로젝트와 수원화성도

• 화성 건설의 추이
‣ 현륭원 조성 : 1789년(정조 13)
‣ 수원 읍치 이전 : 1794년 1월 화성 공사에 착수
-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 留守府 승격
  - 명칭 변경: 수원 → 화성
  - 1794년(정조 18)~ 1796년(정조 20): 부대시설 확충(萬石渠ㆍ祝萬堤ㆍ市廛 등)

(1) 성역 과정에서 제작된 수원화성도

• 城址圖形: 수원 성터의 형세, 마을과 거리, 산야 등(1793.12) – 화성의 전경을 재현했을 것으로
• 『城址考』: 성제 연구의 기조 자료집인 『성제도설』의 초고본으로 추정
‣ 구성: 상권(中國城制), 중권(城制圖說 및 城制諸論), 하권(東國城制와 東國城制諸論)
‣ 중권의 「성제도」


• 『城圖全篇』
‣ 전국의 읍성 정보 수합 (강원ㆍ경기 제외) → ‘성제도’를 수합하여 편찬
‣ 『성도전편』 편찬의 의의: 군현 단위에서 직접 ‘城圖’ 제작 기회 제공 → 19세기 지방 성읍도 제작의 밑거름
※ 『성도전편』의 제작 과정은 좀 더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
▫ 저자가 인용한 정조의 발언은 ‘築城謄錄’을 올리게 한 것
▫ 「題城圖全篇」에는 지도 제작을 도화서 화원에게 지시한 것으로 되어있음
“乃命畫史 作四都八路營閫邑堡之城圖 仍附之以事實”
▫ 중앙 관서에서 일관된 원칙을 내렸는지, 지방 군현의 서리가 자체적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제도 제작이 이루어졌는지는 여전히 불분명
• 「華城府城操圖」: 성곽 사이의 시설물 표기, 각 구역의 편성군 인원수 → 군사용 목적
•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도설판화
‣ 「西將臺城操圖」: 일반적인 성읍도 양식과 상통
‣ 장용영의 야간 훈련 장면을 담은 행사 기록화이므로 그림의 성격은 다름


(2) 성역 이후 제작된 수원화성도

• 『화성성역의궤』의 도설판화
‣ 「화성전도」: 구도ㆍ내용ㆍ표현법이 「화성전도」 병풍(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관련

‣ 「행궁전도」: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에 모두 포함

• 稧屛과 稧軸
‣ 內入圖屛의 제작

- 원행을묘정리의궤 이전의 격식과 차이 → 화성과 왕실의 특수한 관계를 시사
- 화성 성역 관련 총 43점의 그림 제작(병풍 13좌, 족자 30건) → 대부분 화성전도
- 『화성성역의궤』 도설판화 제작 참여 화원이 계병ㆍ계축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
• 稧屛ㆍ稧軸 실체 추정
‣ 『뎡니의궤』(총 48책): 정조가 혜경궁을 위해 언문으로 번역한 의궤와 관련, 성역 관련 내용 포함

이때 계병 분아하니 성역 마친 후 화성 전국의 산천, 성곽과 궁실, 누대를 일일이 초본(綃本)에 모사하되 춘하추 세 때 경치로 대병 세 좌에 각각 그려 을남(乙覽)의 진어(進御)하옵고 그 남은 재료로 각 도감 분아하는 전례(前例)를 써 총리대신과 감동 당상이 다 한 좌씩 나누며 감동 제원(諸員)도 또한 지본(紙本)에 그려 족자 하나씩 분급하니 얻은 자, 각각 집의 전하는 보배를 삼고 경도(京都) 재상(宰相)의 구경 못한 자, 그 그림을 빌려 서로 한 번 보기를 쾌히 여기더라. 이후에 또 화성십육경을 춘추팔경으로 나누어 화사 김홍도의 그림을 초병(綃屛) 두 좌를 행궁에 올리오니...

① 계병ㆍ계축의 내용과 채색
- 진상용 계병: 綃本 - 華城 전경 - 春ㆍ夏ㆍ秋 - 3좌
- 분급용 계병(總理大臣ㆍ監董堂上): 계절색 언급 無 → 한 계절의 화성 전경
- 분급용 계축(監董諸員): 紙本
② 제작 시기 추정: 1797년 여름 ~ 1800년 5월
- 정조 20년 8월: 양재역 → 영화역 - “역을 옮긴 지 겨우 1년 만에 민가가 즐비하여 (…)”
- 정조 24년 5월: 『화성성역의궤』 刊印
③ 제작 인원: 畫史 김홍도 → 도화서 화원 참여
④ 반향: 「화성전도」 병풍ㆍ족자에 관심 고조
- 「화성전도」는 소수만의 비밀스러운 그림 ×
- 19세기 지방 성읍도 제작ㆍ유통 증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

3. 현전하는 「화성전도」 병풍과 19세기 지방 성읍도

(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전도」 병풍의 특징

• ‘수원화성도’는 성역 준비-완공 기간을 거치며 점차 정형화 - 「화성전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전도」: 「화성전도」의 전형을 파악하는 실마리

구분 6폭 12폭
공통점 實景圖(화성 전경): 지지대 고개(1폭) - 화성(중앙)
행궁 기준의 방위 설정(상: 하 = 서 : 동) - cf. 도성도
화성 부분은 의궤의 「화성전도」와 친연성
차이점 재질 비단 종이
화법 半眞彩 靑綠山水 淡彩山水
내용 지형지물 명칭 기입 無
남쪽 지역(화산行) 일부 제외
지형지물 명칭 기입
원행 행렬과 군사훈련 장면 수록

• 묘사된 화성의 전경
‣ 6폭의 「화성전도」
- 기입된 시설의 위치와 형태는 「화성전도」의 것과 일치
- 화령전 부재 → 1801년(순조 1) 9월 이전 제작 추정
- 사람에 대한 묘사 부재
‣ 12폭의 「화성전도」
- 화령전ㆍ지지대 비각 등장 → 1807년(순조 7) 12월 이후 제작 추정
- 1824년(순조 24)에 세운 팔달문 옹성 누각 부재 → 하한 추정 가능
- 주요 건물의 명칭 기입
- 화성 유수의 행렬 장면과 군사훈련 장면 묘사
※ 화성 유수의 행렬인가?
‣ 상업 시설물의 묘사 부재

“북문 안으로 들어가니 (…) 鍾樓 十字街에 市井이 문을 열었으니 앉은 장사, 선 장사의 모습이 서울 종루와 같더라”(李羲平, 「華城日記)

(2) 19세기 지방 성읍도의 전개와 「화성전도」 병풍

• 성읍도 제작의 추이
‣ 17세기 이전: 「善山地圖」(김종직), 「西京圖」 등 → 예외적인 사례
‣ 18세기: 관찬 지리지 및 지도집 제작 활성화
‣ 19세기: 군현 지도 제작 활성화 – 관아에 군현 지도 구비, 전국 지리지에 군현 지도 삽입
- 군현 지도 제작ㆍ활용의 활성화 ≒ 화성 건설 및 『화성성역의궤』 간행 기간
• 성읍도 제작의 단면: 平壤箕城圖
‣ 현존 平壤箕城圖
- 대부분 1805년(순조 5) 이후의 경관 반영
- 산수 경관 + 풍속ㆍ행사 →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제작과 유통에 관여했음을 시사
‣ 김윤식의 「平壤全圖」: 1868년(고종 5) 8폭의 병풍으로 제작 후 1백 연의 시를 기재
- 집안에 소장된 평양전도: 1835~186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 부분적 판각 기법 사용 → 작품 제작 시간 단축 → 평양기성도 수요 증가 추세 시사
- 김윤식 제화시의 형식(7언 고시)과 창작의도를 담은 詩의 길이 = 정조대 「城市全圖詩」
→ 정조대 「화성전도」와 지방 성읍도의 상관관계를 시사

3. 맺음말

• 「화성전도」는 화성 성역 과정에서 제작된 시각 자료 중 하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화성전도」 두 점은 규모와 내용, 완성도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 「화성전도」 병풍의 화면은 정조의 정치적 비전을 응축한 것으로 유용한 통치자료이자 국정 홍보수단이었다.
• 「화성전도」의 제작과 유포는 19세기에 지방 성읍도 유행을 촉발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문인 관료와 민간으로까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논의점

1. 진상용으로 추정되는 「화성전도」 병풍에서 정조의 ‘상업 부양 정책’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서술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지적처럼 「화성전도」가 정조의 정치적 구상과 성과를 응축한 작품이라면, 상업 부양 정책은 정조의 정책에서 제일의 정책 과제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2. 12폭의 화성전도 병풍에서 군사훈련과 행차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6폭짜리에 해당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저자는 정작 이 대목을 면밀하게 살펴보지는 않는 것 같다. 해당 행차는 정말로 화성 유수의 행차인가? 이 병풍이 진상용이었다면 굳이 왜 화성 유수의 행차를 그려넣어야 했을까?

3. 『화성성역의궤』을 154부나 인출해서 반사했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특히 반사한 시점이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왕위에 있던 때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화성성역의궤』의 반사를 꼭 정치적 목적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화성성역의궤』를 굳이 왜 그렇게 여러 곳에 반사했을까? 특히 특별한 국가행사가 아닌, 성역 과정을 담은 의궤를 배포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4. 저자의 논문은 국가가 지방 군현의 정보를 습득하고 정리하는 방식에서 그림(지도)의 비중이 점차 증대하는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다만 정말로 『화성성역의궤』 혹은 「화성전도」의 제작과 유포가 이후 지방 읍성도 제작을 활성화하는 계기였는지는 좀 더 신중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 가설을 논증하기 위해서 김윤식의 「평양전도」를 거론하고 있지만, 과연 그 주장이 충분히 논증되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일부 사대부가 「평양전도」를 관람하고 시를 짓는 것과 국가 차원에서 전국 군현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은 같은 층위에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안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화성전도」와 읍지 등에 딸린 지방 군현의 지도가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지도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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