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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61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강문식, 2008,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한국문화』 43 1. 서론 16세기 이후 朱子書 選本과 그에 대한 주석서가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이는 이황의 『주자서절요』 편찬 이후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에서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주자서의 편찬은 250여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저자는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주자성리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해가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송시열의 『朱子大典箚疑』와 『節酌通編』이다. 이 저술들은 17세기 주자학을 비판하는 학문 경향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송시열이 주자학 연구에 전념한 결과물이자, 주자학 연구의 주도권이 영남학파에서 기호학파로 이전되는 변화의 첫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 2018. 4. 22.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이익주, 1994,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역사비평』 24 ▲처인성 전투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은 13세기 대몽 항쟁을 “‘국난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이다. “1장 : 문제의 제기”에서 필자는 13세기 대몽항쟁에 부여된 ‘민족적’성격의 평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고려-몽골’의 민족적 대립만으로 13세기 고려를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13세기 이전부터 대립하던 고려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침략자 몽고, 이 셋 사이의 관계로서 설명해야”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으로 보았다. “2장 : 대몽항쟁의 실상”에서는 12세기와 13세기의 고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에 대하.. 2018. 4. 21.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이익주,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1. 머리말 1259년부터 1356년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원의 간섭을 받았으나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지배’가 아닌 ‘간섭’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는 고려-몽골(원) 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세조구제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려와 몽골(원) 관계의 원칙인 세조구제는 책봉-조공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간섭은 책봉-조공관계의 한 시기적 양상이었다. 이런 관점은 몽골사 연구자와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2000년대.. 2018. 4. 20.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189집, 2006 Ⅰ. 들어가며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15세기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15세기, 특히 세종 시대의 문화가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라는 이러한 관점의 서술이 비단 국사 교과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연구들은 .. 2018. 4. 19.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후마스스무,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한양대학교 초청강연 원고)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 땅을 밟은 홍대용은 1766년 2월 우연히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만나 교제했다. 엄성과 반정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절강성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필담을 주고받으며 교분을 나누었다. 자신들의 관계를 ‘천애지기’(天涯之己)라고 부를 정도였다. 홍대용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엄성과 반정균은 조선 사절단이 머물던 숙소로 홍대용을 찾아왔다. 홍대용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엄성과 반정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온 것은 그저 천하의 뛰어난 지식인을 만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국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 2018. 4. 19.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강정숙, 2005,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역사비평』 74 ▲'위안부' 소녀상 지금은 ‘위안부’라는 명칭이 익숙하지만, 기존에는 종군위안부나 정신대, 성노예라는 명칭과 혼용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위안부’를 공창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이처럼 ‘위안부’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안부’가 제도적인 것이었느냐, 또는 강제성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명칭도 달라졌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강정숙의 논의를 요약함으로써 각 명칭의 의미와 그 인식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1. 종군위안부, ‘위안부’, 정신대? 일단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먼저 사용된 이름이다. 1970년대 이후 .. 2018. 4. 19.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이익주,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소위 ‘세조구제’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36, 1996) 1. 논문의 목적 이익주의 논문은 고려 원종과 충렬왕 때의 고려-몽골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소위 ‘세조구제’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고려-몽골의 형식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는 “元代史의 전개에 있어서 世祖代는 원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는 시기로, 고려와의 관계를 비롯한 외교정책 역시 이 때 일정한 원칙을 가지면서 정립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조구제’가 성립되는 과정 및 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고려 ‧ 원관계의 구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원종대 고려 ‧ 원관계의 전개 저자의 말에 따라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 2018. 4. 19.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이 글은 『조선시대사 2』(푸른역사, 2015)에 실린 김건태의 글 일부를 정리한 것임 조선 전기의 양반에게 노비와 토지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특히 16세기 초반에 수조권을 통한 토지지배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서 노비와 토지는 양반이 부를 증식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양반은 수조권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대신 노비를 동원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게 함으로써 부를 늘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양반은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는 데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양반들은 조세 부담으로 몰락하는 양인농민을 노비로 포섭하거나 자신들의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킨 뒤 그 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노비가 많으면 전답을 증식시키기도 훨씬 수월했다. 무주공황지(無主空荒地), 즉.. 2018. 4. 18.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안외순, 2000, 「대원군의 사회적 기반과 지지세력」, 『동방학』6 1. 머리말 저자는 대원군 연구가 주로 정치ㆍ군사적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권력 운용과 정책 집행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정권의 지지기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의 ‘사회계급적 지지기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원군 정권이 지방의 상인과 부농, 하급 이서층을 지지기반으로 했다는 梶村秀樹와 대원군이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藤間生大의 평가가 있는데, 이는 실증된 적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유림양반-농민-대원군 정권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대원군 정권의 지지기반과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2. 대원군과 양반유림의 관계 저자는 2장에서 대원군과 양반.. 2018. 4. 17.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김백철, 2007,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한국사연구 138 김백철의 문제의식은 17세기의 황극론과 양역변통이 어떻게 18세기에 황극탕평론과 균역법으로 정립될 수 있었는가에서 출발한다. 명목적으로 요순의 정치로 표현되는 이상정치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탕평정치ㆍ균역법처럼 국가의 근간을 개혁하는 일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김백철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성관의 변화를 당시 정국 운영의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영조대부터 ‘민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시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1) 백성인식의 사회적 배경 김백철의 논의는 백성관 변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긴급한 과제는 양역문제를 해결하고 .. 2018.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