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1. 머리말
1259년부터 1356년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원의 간섭을 받았으나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지배’가 아닌 ‘간섭’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는 저자는 고려-몽골(원) 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세조구제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려와 몽골(원) 관계의 원칙인 세조구제는 책봉-조공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간섭은 책봉-조공관계의 한 시기적 양상이었다.
이런 관점은 몽골사 연구자와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몽골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몽골 관계사는 몽골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었다. 몽골사 연구자들은 고려-몽골 관계를 한중관계의 일부로 파악할 경우 책봉체제, 조공관계, 사대관계로만 이해될 뿐 몽골 제국의 특수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고려-몽골관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저자는 이러한 몽골사 연구자들의 관점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목적에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몽골(원)을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고려-몽골(원) 관계에 접근하면 몽골(원)의 중국적 요소를 설명하기 어렵다. 더구나 원(카안 울루스)이 중국의 전통적 정책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변국과 책봉-조공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책봉-조공의 요소와 책봉-조공 이외의 요소를 검토하고 양국의 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 파악하였다.
2. 책봉-조공관계의 요소
1) 책봉과 조공
저자는 이 절에서 원 간섭기에 책봉-조공의 요소를 검토하였다. 그에 따르면, 책봉-조공관계의 핵심요서는 역시 책봉과 조공이다. 특히 책봉은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원종 대부터 공민왕 대까지의 고려 국왕은 모두 몽골(원)의 책봉을 받았다. 가장 먼저 몽골(원)의 책봉을 받은 국왕은 원종이었다. 태자였던 원종이 쿠빌라이를 만나러 간 상황에서 부왕 고종이 사망하자, 몽골이 원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했던 것인데, 이는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 책봉-조공관계가 수립되었음을 시사한다. 원종이 귀국한 뒤에 몽골(원)은 조서를 보내 中統으로 연호를 고쳤음[改元]을 알렸는데, 개원 자체가 중국의 전통이었고, 중통이라는 연호도 중국식이었다. 1262년(원종 3)부터는 頒曆을 시행했고, ‘虎符國王之印’이라는 인장을 고려 국왕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이것은 거란(요)ㆍ금과 책봉-조공을 맺었을 때와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고려인은 원과의 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 인식했을 것이다.
충렬왕도 몽골(원)의 책봉을 받았다. 이때 고려 국왕 외에도 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중서성사ㆍ부마의 책봉호를 받았는데, 이는 충렬왕이 요구한 결과였다. 정동행성이 폐지된 후에 몽골(원)로부터 부마국왕의 인상을 받았고,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된 후에는 부마ㆍ고려국왕ㆍ정동행성좌승상을 겸임했다. 퇴위 후에는 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ㆍ개부의동삼사ㆍ태위ㆍ부마ㆍ상주국ㆍ일수왕이라는 책봉호를 받았고, 복위한 뒤에는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ㆍ태위ㆍ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중서성우승상ㆍ상주국ㆍ부마ㆍ고려국왕이라는 책봉호를 받았다.
충렬왕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원 간섭기’의 고려국왕은 모두 부마와 정동행성승상을 겸임했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양위를 받고 즉위하여 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중서성좌승상ㆍ부마ㆍ상주국ㆍ고려국왕이 되었고, 복위 후에는 개부의동삼사ㆍ태자태사ㆍ상주국ㆍ부마도위ㆍ심심양왕ㆍ정동행성우승상ㆍ고려국왕이라는 책봉호를 받았다. 충숙왕이 충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뒤에는 금자광록대부ㆍ정동행성중서성좌승상ㆍ상주국ㆍ고려국왕이 되었고 1316년 몽골(원)과 왕실혼인 후에는 개부의동삼사ㆍ부마ㆍ고려국왕으로 다시 책봉됐는데, 정동행성좌승상ㆍ상주국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충숙왕의 즉위를 받은 충혜왕도 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중서성좌승상ㆍ상주국ㆍ고려국왕에 책봉됐다.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마가 되지는 않았으나 몽골(원) 공주와 혼인 후에 부마가 더해졌을 것이다. 충목왕도 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중서성좌승상ㆍ상주국ㆍ고려왕의 책봉호를 받았으나, 어릴 때 즉위하여 혼인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부마가 되지는 못했다. 충정왕의 책봉호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고, 공민왕도 “국왕으로 삼았다”고만 되어있지만, 전례대로 개부의동삼사ㆍ정동행성좌승상ㆍ부마ㆍ상주국ㆍ고려국왕에 책봉됐을 것이다.
원 간섭기 고려국왕의 책봉호를 보면 모두 고려국왕ㆍ부마ㆍ정동행성승상을 겸하여 책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책봉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충렬왕 이후에 별도의 기록은 없다. 몽골(원)은 계속 중국 연호를 썼고, 그때마다 고려에 개원을 알렸다. 이 시기 몽골(원)은 그 이전ㆍ이후와 달리 고려국왕에 대한 책봉의 권한을 일방적이고 실질적으로 행사했는데, 1298년 원의 결정으로 충선왕이 퇴위하고 충렬왕이 복위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책봉의 권한은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행사되었다. 고려의 전통적인 왕위계승원칙을 부정하지는 못하여 왕위계승자격이 없는 사람을 책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책봉의 반대급부로 몽골(원)에 대한 고려의 조공도 이루어졌다. 원종이 몽골로부터 책봉을 받고 귀국한 뒤부터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매ㆍ인상ㆍ포ㆍ공녀ㆍ환관 등을 공납으로 보냈다. 고려가 원에 보낸 공물의 양이 매우 많았다고 하는데, 공납의 양이 다른 시기보다 더 많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2) 고려인들의 대원인식
저자는 고려인들이 몽골제국 전체를 인식했는지, 아니면 몽골제국을 ‘대원’으로 표현되는 중국왕조로 인식했는지를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고려사』 1271년(원종 12)년 12월 기사에는 몽골사신이 국호를 대원이라고 하였음을 알려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전에는 ‘몽골’로 표기했다면, 그 이후에는 ‘원’으로 표기하였는데, 고려인은 대원이 몽골을 대신하는 국호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몽골을 중국 왕조로 인식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승단은 ‘以小事大’의 논리를 내세우며 몽골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원을 정통 중국왕조의 계보에 포함시켰을 뿐 아니라 원을 上國으로 표현했다. 안축은 원을 聖朝로 표현했고, 이제현은 四海가 원의 번국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려인이 인식한 몽골의 영역이 몽골제국 전체의 영역인지, 원의 영역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곡은 원이 당나라 이후 분열된 천하, 즉 중국을 통일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이승휴 이후 고려의 성리학자가 원을 중국을 통일한 왕조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이 있어 왕노릇하는 것은 오직 삼한뿐이다”라고 한 무종의 帝書에 대해서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호동은 무종이 몽골제국 대칸의 자격으로 이 제서를 보낸 것이며, 제서에 언급된 ‘천하’가 몽골제국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고려 ‘속국’의 지위는 대몽골울루스 전체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므로 고려-몽골(원)의 관계는 사대관계가 아닌 몽골적인 속국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제서는 천자-제후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천하’는 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적 천하를 의미한다. 실제로 고려는 몽골을 중국왕조로 인식하여 양국을 사대관계로 파악하여 자국을 東藩ㆍ藩屛 등으로 표현했고, 몽골(원)도 고려를 東藩으로, 고려국왕을 ‘一國之王’ㆍ‘一國臣民之主’로 표현하여 독립적인 국가임을 인정했다.
더구나 원 간섭기에 고려의 관청 이름과 왕실 용어가 격하되었는데, 이것은 고려의 관제가 참월하다는 원의 불만 때문이었다. 관제의 참월함을 문제 삼은 것 자체가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원의 요구에 따른 관제 개편을 제후의 도리로 합리화했던 것이다. 또한 고려와 원을 왕래했던 사람들의 기록에는 비중국적 요소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책봉-조공관계의 요소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책봉-조공관계 이외의 요소
1) 고려 국왕의 위상 : 친조, 왕실혼인, 정동행성
저자는 책봉-조공 이외의 요소 중에서 친조ㆍ왕실혼인ㆍ정동행성 문제를 검토하여 그것이 책봉-조공관계를 부정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님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원 간섭기의 친조(고려 국왕이 직접 원에 다녀오는 일)에 주목하여 고려-몽골(원)의 관계를 책봉-조공관계가 아닌 책봉-조근체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친조가 제후가 할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논리 역시 가능하므로 친조만으로 책봉-조공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친조는 고려 초기에 거란이 침략했을 당시 거란에 의해서, 또 고려-몽골의 전쟁 중에 몽골에 의해서 요구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고려와 몽골간의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었다. 강화 성립 이후에도 몽골은 고려국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1264), 이때 전례에 없는 친조가 실행됐다. 그 배경에는 원종이 무신정권과 대결하며 몽골의 후원에 의지했던 점, 원종이 태자 당시 입조하여 쿠빌라이를 만났던 경험이 작용했다.
원종은 1269년에도 친조를 했다. 임연에 의해 폐위되고 몽골(원)의 도움으로 복위한 뒤 그간의 사정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때 원종은 몽골(원)에 왕실혼인과 군대를 요청했다. 그는 몽골군을 앞세워 무신정권을 붕괴시키고 왕정을 복구했다. 이때부터 친조는 고려 왕실과 몽골(원)의 직접적 외교통로가 되었고, 몽골이 고려 국왕을 견제하고 고려 국왕이 정치현안을 직접 해결하는 대원외교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친조를 ‘몽골의 요구로 국왕이 수시로 출두하는 것’으로 본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관점은 친조의 일면만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국왕은 몽골(원)과의 왕실혼인을 통해 부마를 겸하였는데, 이것은 고려국왕의 위상과 몽골제국 내 고려의 위상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기존에는 주로 혼인배경과 과정, 혼인의 정치적 의미가 탐구되었다면, 최근에는 왕실혼인을 통해 고려의 위상을 밝히려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고려를 몽골의 부마에 수여된 투하령으로 이해했고, 김호동은 고려가 고려국왕이 통치하는 ‘속국’이자 부마의 ‘속령’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고려국왕의 존재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몽골(원)의 왕실혼인은 1274년 고려의 세자(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음 성사됐다. 이후 원 간섭기의 고려국왕은 모두 몽골(원)의 부마가 되었다. 단, 충목왕과 충정왕은 예외의 사례인데,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혼기가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부마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몽골(원)의 왕실혼인은 충렬왕 외에는 논란이 없었다. 충렬왕의 결혼으로 고려 왕실이 몽골 황실의 통혼권에 편입되어 대대로 혼인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몽골이 혼인을 수용한 시점이 중요하다. 1270년 원종의 왕실혼인 요청에 유보적 입장을 보였던 쿠빌라이는 이듬해 혼인을 허락했다. 이것은 고려의 정세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1년 사이에 고려에서는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개경 환도가 단행됐으며, 고려ㆍ몽골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했다. 즉, 고려에서 반몽골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어 고려 왕실이 혼인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고려국왕과 부마의 지위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충렬왕이 즉위한 직후 몽골 사신은 그를 부마로 대우했지만, 다루가치는 고려국왕으로 대우했다. 1275년(충렬왕 1) 고려에서 몽골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를 두고 몽골 측은 고려국왕을 ‘부마왕’에 앞서 ‘外國之主’로 판단했다. 이후 부마국왕인을 받았지만, 고려국왕의 지위가 우선시되었으므로 국왕과 부마의 지위가 일체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에 설치되었던 정동행성은 원의 지방행정기관으로 설치된 11개의 행성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동행성은 다른 행성과 달리 지방행정기관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정동행성은 본래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었지만, 일본 침략과 무관하게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그러다가 원의 10개 행성체제가 완성될 무렵부터 군사기관의 성격에서 벗어났다. 이때부터 정동행성은 형식적 기구이자 고려-원 사이의 연락 기구였던 것이다. 한편, 정동행성 ‘증치’문제를 두고 고병익은 행성고위관 파견을 의미하며 증치기간도 짧았다고 보았다. 장동익은 증치가 1299년부터 1312년까지 15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나, 고려가 정동행성 증치에 대해 세조구제를 내세워 반대하자 원은 행성관을 소환했다. 정동행성 증치는 세조구제에 어긋나는 것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2) ‘육사’의 문제
저자는 ‘육사’를 근거로 고려-몽골(원)의 관계가 책봉-조공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六事’는 納質ㆍ助軍ㆍ輸糧ㆍ設驛ㆍ供戶數籍ㆍ置達魯花赤을 뜻한다. 이것은 고려-몽골(원)의 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이 고려와 베트남에 요구한 ‘육사’ 항목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반드시 여섯 가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김호동의 지적처럼 육사의 항목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몽골(원)은 1262년 2월에 처음 ‘육사’를 요구했다. 이것은 몽골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중국 전통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때 몽골의 요구에는 치다루가치가 제외되었고, 납질은 이미 실행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치다루가치가 제외된 것은 이미 고려의 요청으로 몽골(원)이 다루가치를 소환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즉답을 회피했다. 몽골이 육사 이행을 재촉하자 고려는 치역은 이미 실행했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세 가지 항목의 시행은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몽골(원)은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몽골이 육사를 재요구한 것은 1268년 2월의 일이다. 이때 요구한 내용은 出軍助戰, 轉糧, 點數民戶, 請達魯花赤이었다. 몽골(원)은 바로 전 해에 베트남에도 육사를 요구했는데, 고려에 요구한 것과 구체적인 항목은 달랐다. 하지만 책봉-조공 형식을 취하던 고려와 베트남에 몽골 전통의 통치방식을 적용하려 했던 점은 동일했다. 고려는 몽골의 육사 요구에 ‘조군’과 ‘수량’은 즉시 이행하고 ‘치다루가치’와 ‘공호수적’은 개경 환도 이후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육사를 일괄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안의 경중을 따져 협상했던 것이다.
몽골의 육사 요구는 무신정권을 압박해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게 만들었다. 원종은 몽골의 후원으로 왕정을 회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육사를 이행했다. 납질을 목적으로 세자를 몽골에 보냈고, 원종의 요청으로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고려에 상주하며 내정에 개입했다. 다루가치는 몽골의 요구를 고려에 전달하고 대행하는 역할을 했다. 조군과 수량은 몽골이 요구할 때 부응하는 형태로 이행되었다. 몽골이 남송과 일본을 침략할 때 고려가 인력과 물자를 부담한 것이 그 예이다. 설역은 이미 이행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호수적은 이행 여부가 확인되지 않지만, 고려에서 貢賦를 다시 정한 뒤 몽골에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278년에 명시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고려가 미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몽골이 자국의 호구 실태를 파악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육사는 1278년에 충렬왕이 친조하면서 다시 조정되었다. 충렬왕은 ①몽골군을 철수시킬 것, ②다루가치를 몽골로 소환할 것, ③호구조사는 고려가 자체적으로 하게 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특히 ②와 ③은치다루가치와 공호수적을 폐지한 것으로 육사 이행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실제로 몽골(원)은 합의 직후 다루가치를 소환했고, 고려는 몽골(원)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고려의 호구조사는 독자적으로 재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치다루가치와 공호수적을 제외한 육사의 나머지 조항만 이행되었다. 이렇듯 고려의 요구가 이행된 결과로 몽골이 책봉-조공 대신 다른 방식으로 고려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4. 맺음말
책봉-조공의 요소와 책봉-조공 이외의 요소를 검토한 저자는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 책봉-조공의 요소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책봉-조공 이외의 요소가 양국 관계의 본질이 될 수 없음을 밝혔다. 아울러 결론에서 저자는 책봉-조공 개념을 다시 정의함으로써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책봉-조공관계였음을 해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과 존 페어뱅크의 조공체제 이론은 책봉과 조공 개념을 통해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규명했지만, 조공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중국 중심적 관점이 전제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중국 중심의 화이관이 책봉-조공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인식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저자가 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중국 중심의 화이관은 책봉국이 한족 왕조일 때만 성립되는데 그런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둘째, 피책봉국이 꼭 한족 왕조 중심의 화이관을 수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족 중심의 화이관이 극복되어야만 책봉-조공을 책봉국과 다수의 조공국 사이에 합의된 국제관계로 설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책봉-조공관계의 전형을 설정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제를 제기했다. 전해종은 조선과 명ㆍ청의 관계를 ‘전형적 조공관계’로 규정하여 책봉-조공관계의 전형을 설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전형’과 비교하여 중국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관계가 책봉-조공관계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책봉-조공관계가 시기와 상황에 따라, 책봉국과 조공국의 세력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그는 고구려와 북위, 신라와 당, 고려와 거란ㆍ금, 조선과 명ㆍ청은 모두 책봉-조공관계였지만 실제는 모두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고려-몽골(원)의 관계도 다른 시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책봉국과 피책봉국이 상하관계를 인정하고 책봉과 조공을 교환하는 관계’를 책봉-조공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고려와 몽골(원)의 관계가 이 범주에 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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