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 1994,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역사비평』 24
▲처인성 전투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은 13세기 대몽 항쟁을 “‘국난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이다. “1장 : 문제의 제기”에서 필자는 13세기 대몽항쟁에 부여된 ‘민족적’성격의 평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고려-몽골’의 민족적 대립만으로 13세기 고려를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13세기 이전부터 대립하던 고려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침략자 몽고, 이 셋 사이의 관계로서 설명해야”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으로 보았다.
“2장 : 대몽항쟁의 실상”에서는 12세기와 13세기의 고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필자에 따르면 12세기에는 여러 민란이 발생하였고, 이는 당시 지배층의 수탈 및 사회모순과 관련이 있었다. 비록 이것이 최충헌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일반민은 ‘초적’으로 저항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침입하였고, 이는 초적과 지배층이 단결하여 몽골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층은 “계급적 이해의 일부를 양보 또는 포기”하지 않았다. 필자에 따르면 강화천도 역시 “몽골군과의 장기전을 치루기 위해 단행한 것”,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지배층의 지속된 수탈과 “배신행위(강화천도)”들은 “종래의 계급 갈등이 다시 폭발”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당시 민(民)이 지배층의 수탈과 몽골의 침략에 모두에 저항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설명한다. 계급 갈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몽골과 항전을 지속해야하는 상황에서 계급 갈등이 심화되자 강화도 내에서 강화론이 대두하였고, 결국 강화가 이루어졌다고 서술하여 “2장”을 끝맺고 있다.
“3장 : 강화의 성립과 ‘삼별초’”에서는 고려와 몽골간의 강화 성립 및 삼별초 항쟁에 대한 내용들이 서술되고 있다. 필자는 대몽항쟁기에 “각지에서 일반민의 저항이 잇따름으로써 항전론은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최씨정권의 입지를 축소시켰다고 설명한다. 결국 고려-몽골 간에 강화가 이루어졌고, 최씨정권은 붕괴하였다. 그렇다고 무신정권 자체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정권의 기반이 그 이전에 비해 미약하였으나 무신정권 그 자체는 존속되어 “몽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왕 및 문신관료”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원종이 몽골을 등에 업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왕정이 회복되고 강화파 문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고 필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필자에 따르면 이는 외세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몽골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화파가 집권한 이후 강화도에서 삼별초가 봉기하였다. 이후 살별초는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고려 정부와 몽골군을 상대로 항전하였다. 하지만 곧 고려 정부와 몽골군은 연합군을 편성해 삼별초를 공격하였고,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하다가 전멸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삼별초 항쟁이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무신정권의 나머지 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강인한 민족정신 등으로 설명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4장 : 원 간섭기의 ‘개혁정치’”에서는 원 간섭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치들의 목적 및 성격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필자에 따르면 강화 이후인 원 간섭기에는 사회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기존의 사회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의 공물 징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망’의 방법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였다. 고려 정부 역시 당대 각 부문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한 국왕의 교서를 발표하여 ‘개혁’을 모색하였다.
필자에 따르면,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교서의 발표가 ‘반원개혁’의 일환으로 평가하였다고 한다. “‘개혁’이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고, 그 모순은 원의 간섭에 의해 야기된 것이므로, ‘개혁’은 당연히 반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원 간섭기 사회모순이 12세기의 그것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의 개혁이 “사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내용과 의지”를 담고 있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당시 원에 의존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던 고려 정부가 반원개혁을 할 수는 없었으며, 반원개혁은 원이 쇠퇴하던 시기(공민왕대)에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고려후기의 역사를 몽골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항쟁이라는 시각으로 설명해서는 실상을 제대로 그려낼 수가 없다. 거기에는 계급 갈등의 모습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12세기 이래 사회 모순의 연장과 그 해결의 모색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서술하면서 이 글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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