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 「고려 ‧ 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소위 ‘세조구제’의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36, 1996)
1. 논문의 목적
이익주의 논문은 고려 원종과 충렬왕 때의 고려-몽골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소위 ‘세조구제’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고려-몽골의 형식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는 “元代史의 전개에 있어서 世祖代는 원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는 시기로, 고려와의 관계를 비롯한 외교정책 역시 이 때 일정한 원칙을 가지면서 정립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조구제’가 성립되는 과정 및 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고려 ‧ 원관계의 구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원종대 고려 ‧ 원관계의 전개
저자의 말에 따라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하였던 시점을 살펴보면, 고려는 ‘대몽항전’을 주장하는 무신정권과 ‘강화’를 주장하는 강화파 및 국왕(고려 고종) 사이의 대립이 존재하였고, 몽고는 아릭부게의 本地派와 쿠빌라이의 漢地派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태자를 보내 쿠빌라이 측에 입조하였다. 이는 본지파와 대립하던 쿠빌라이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쿠빌라이의 대우는 각별하였다. 따라서 몽골과 고려의 강화 협상에서 고려는 상당히 유리한 성과를 거두었다. 저자에 따르면, 고려가 얻어낸 성과는 “①의관 등 풍속은 본국의 것을 따르도록 할 것 ②사신은 몽고 조정에서만 보낼 것 ③개경환도를 재촉하지 말 것 ④(몽골) 군대를 철수시킬 것 ⑤다루가치를 소환할 것 ⑥전쟁 중 몽고에 항복한 고려인을 돌려보낼 것”이었다. 특히 저자는 “不改土風”이라는 ①의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①이 고려의 풍속 뿐 아니라 고려의 국가 및 국가 체제, 즉 독자적 정치체제를 존속시키는 것을 몽골에서 인정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몽골 관계는 사대관계, 즉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원종이 귀국한 직후부터 몽고에 공물을 보내기 시작하였고, 몽고에서 中統으로 建元한 뒤 고려로 하여금 이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고, 원종에게 책봉에 따른 印信을 보내주었으며, 원종 3년부터는 해마다 曆을 하사”했다는 저자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6사’(納質, 供戶數籍, 設驛, 助軍, 輸糧, 置達魯花赤)에 대한 논의가 진행 되었는데, 몽골의 6사 요구에 대해 고려는 납질만을 이행하고, 나머지는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저자는 이에 대한 몽골의 반응을 “몽고는 6사의 문제를 가지고 고려를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하며 몽골이 고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고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고려 내부에서 무신정권과 원종의 대립이 더욱 심해지자 원종은 몽골의 힘을 빌려 무신정권을 제압 ‧ 붕괴시켰고 몽골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몽골은 고려에 다시 6사의 시행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여기서 저자가 강조한 점은 ‘不改土風’이 지켜졌다는 것인데, 고려가 6사를 이행하였어도 고려의 국가 및 국가체제는 지켜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쿠빌라이
3. 충렬왕초 ‘세조구제’의 성립
원종 때 충렬왕은 원 황실과 혼례를 맺어 부마가 되었다. 이는 원의 지원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려와 고려가 일본 ‧ 송과 연결되어 항쟁을 할 것을 염려한 원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충렬왕의 친조외교와 함께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야기하였는데, 이후 원종대에 6사를 매개로 한 고려-몽골의 관계가 변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실제로 고려에 대한 6사의 대부분은 면제되었고, ‘조군’과 ‘수량’은 강화되었으나, 그 성격은 6사의 하나가 아니라 ‘부마국의 책임’의 일환으로 변질되었다.
결과적으로 6사가 사라짐에 따라 원의 대고려 간섭은 줄어들었고, 결국 저자의 말처럼 “원종 초에 합의된 ‘不改土風’의 원칙에 따라 독자적인 왕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원과 사대관계의 형식을 구현”하게 된 것이다. 이는 원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할 근본적인 대책으로 6사가 아닌 조공-책봉 관계에 주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이후 고려에는 다시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성격과는 다른 것으로 원의 지방행정기관으로서 설치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동행성의 승상은 항상 고려국왕이 겸하고 있었고, 고려의 독자적 정치체제는 부정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것들이 “고려 ‧ 원 관계에서 ‘세조구제’는 고종 말 전쟁이 끝나고 원종이 입조하여 쿠빌라이를 만났을 때 합의된 ‘불개토풍’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세조구제’는 고려-원의 조공-책봉관계의 기본적인 틀이라고 보았다.
4. ‘세조구제’의 내용과 성격
세조구제의 구체적 내용은 논문에 명기 되어 있는 것처럼 “고려의 독자적 풍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원의 법제에 따른 호구조사를 실시하지 않으며, 고려에 원의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세조구제’에 입각한 고려-원 관계는 왕조체제의 유지와 왕권의 대외종석에 따른 외세의 간섭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세조구제에 입각한 원과 고려의 관계는 바로 조공-책봉의 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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