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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자집/중국 사서

[통감절요] 주기 위열왕

by 衍坡 2019. 3. 24.

『통감절요』 「주기」 : 위열왕(威烈王)

 

2019.03.24



威烈王在位二十四年.
위열왕(威烈王)은 재위가 24년이다.




▲이 중에서 조, 한, 위 세 나라가 진(晉)에 속한다.





戊寅二十三年. 初命晉大夫魏斯趙籍韓虔爲諸侯.
무인년 재위 23년: 처음으로 진(晉)의 대부 위사ㆍ조적ㆍ한건에게 명을 내려 제후로 삼았다.


溫公曰: 天子之職莫大於禮, 禮莫大於分, 分莫大於名. 何謂禮? 紀綱是也. 何謂分? 君臣是也. 何謂名? 公侯卿大夫是也. 夫以四海之廣, 兆民之衆, 受制於一人, 雖有絶倫之力, 高世之智, 莫不奔走而服役者, 豈非以禮爲之紀綱哉! 是故天子統三公, 三公率諸侯, 諸侯制卿大夫, 卿大夫治士庶人, 貴以臨賤, 賤以承貴. 上之使下猶心腹之運手足, 根本之制支葉, 下之事上猶手足之衛心腹, 支葉之庇本根, 然後能上下相保而國家治安. 故曰天子之職莫大於禮也.


온공(溫公: 사마광)은 말한다. 천자의 직책은 예(禮)보다 큰 것이 없고, 예는 분의(分義)보다 큰 것이 없으며, 분의는 명호(名號)보다 큰 것이 없다. 무엇을 예라고 하는가? 기강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의라고 하는가? 군주와 신하가 그것이다. 무엇을 명호라고 하는가? 공(公)ㆍ후(侯)ㆍ경(卿)ㆍ대부(大夫)가 그것이다. 무릇 넓은 세상[四海]과 많은 백성[兆民]을 거느리고 천자 한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아서 비록 절륜한 능력과 고세한 지혜를 갖췄더라도 급히 달려가서 복종하고 애쓰는 것은 예를 기강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천자는 삼공(三公)을 거느리고 삼공은 제후를 이끌며, 제후는 경(卿)과 대부(大夫)를 제어하고 경과 대부는 사(士)와 서인(庶人)을 다스리니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굽어보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받드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음과 배가 손과 발을 움직이고 뿌리가 가지와 잎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손과 발이 마음과 배를 지키고 가지와 잎이 뿌리를 덮는 것과 같다. 그런 뒤에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보호하여 나라와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안정된다. 그래서 ‘천자의 직책은 예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文王序易, 以乾坤爲首. 孔子繫之曰: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言君臣之位猶天地之不可易也. 春秋抑諸侯, 尊周室, 王人雖微, 序於諸侯之上, 以是見聖人於君臣之際, 未嘗不惓惓也. 非有桀紂之暴, 湯武之仁, 人歸之, 天命之, 君臣之分, 當守節伏死而已矣. 故曰禮莫大於分也.


문왕(文王)이 『역』을 서술할 때 건(乾)과 곤(坤)을 첫머리로 삼았다. 공자가 덧붙여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과 곤이 정해졌다. 낮은 것과 높은 것으로 늘어놓으니 귀함과 천함이 전해졌다.’ 군주와 신하의 지위는 하늘과 땅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춘추』는 제후를 억누르고 주(周) 왕실을 높여서 왕족이 비록 미약하더라도 제후 위에 순서를 정했으니, 이것으로 성인이 군주와 신하 사이에 대하여 조심하고 공경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걸ㆍ주의 포악함과 탕왕ㆍ무왕의 인(仁)을 갖춰서 사람들이 따르고 하늘이 명한 것이 아니라면 군주와 신하의 분의는 절개를 지키다가 엎어져 죽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는 분의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夫禮, 辨貴賤, 序親踈, 裁羣物, 制庶事, 非名不著, 非器不形; 名以命之, 器以別之, 然後上下粲然有倫, 此禮之大經也. 名器旣亡, 則禮安得獨在哉! 昔仲叔于奚有功於衛, 辭邑而請繁纓, 孔子以爲不如多與之邑. 惟名與器, 不可以假人, 君之所司也; 政亡則國家從之. 衛君待孔子而爲政, 孔子欲先正名, 以爲名不正則民無所措手足. 夫繁纓, 小物也, 而孔子惜之; 正名, 細務也, 而孔子先之: 誠以名器旣亂則上下無以相有故也. 故曰分莫大於名也.


예(禮)는 귀함과 천함을 분별하고 친함과 소원함을 순서 지으며 여러 사물을 구분하고 여러 일을 다스리는 것이니 명호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고 기물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명호로 명령하고 기물로 구별한 뒤에야 위아래가 찬연(粲然)하게 윤리를 갖추게 되니 이것은 예의 큰 기준이다. 명호와 기물이 사라졌다면 예가 어떻게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위나라에서 공을 세웠는데 봉읍(封邑)을 사양하고 번영(繁纓)을 바랐다. 그러나 공자는 봉읍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다. 명호와 기물은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것으로 군주가 맡는 것이다. 정치가 망하면 나라와 집안도 따라서 망한다. 위나라 군주가 공자를 모시고 정치를 하자 공자는 먼저 명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명호가 바르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번영은 사소한 물건인데도 공자는 애석하게 여기고 명호를 바로잡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인데도 우선으로 여겼다. 진실로 명호와 기물이 어지러워지면 위아래가 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의에는 명호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번영(繁纓): 고대에 천자와 제후의 수레를 끄는 말을 꾸밀 때 쓰는 장식품이다. 번(繁)은 말의 가슴에, 영(纓)은 말의 목에 거는 장식품이다.


嗚呼! 幽厲失德, 周道日衰, 綱紀散壞, 下陵上替, 諸侯專征, 大夫擅政, 禮之大體什喪七八矣, 文武之祀猶緜緜相屬者, 盖以周之子孫尙能守其名分故也. 何以言之? 昔晉文公有大功於王室, 請隧於襄王, 襄王不許曰: 「王章也. 未有代德而有二王, 亦叔父之所惡也. 不然, 叔父有地而隧, 又何請焉!」 文公於是乎懼而不敢違. 是故以周之地則不大於曹滕, 以周之民則不衆於邾莒, 然歷數百年, 宗主天下.


아! 유왕과 여왕이 덕을 잃고 주나라의 도가 날로 쇠퇴하자 기강이 흩어지고 무너졌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능멸하고 윗사람은 약해졌으며 제후는 정벌을 제멋대로 일삼고 대부는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예(禮)의 대체(大體)는 열 가지 중에서 일고여덟 가지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문왕과 무왕의 제사가 여전히 면면히 서로 이어진 것은 아마도 주나라의 자손이 아직 그 명호와 분의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옛날에 진 문공이 왕실에 큰 공을 세우고 양왕(襄王)에게 수(隧)를 바랐으나 양왕은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왕의 예법입니다. 덕을 대신할 자가 있지 않은데도 두 왕이 존재하는 것은 숙부께서도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숙부께서 봉지(封地)를 가지고 계시면서 수를 어째서 바라십니까?” 이에 문공이 두려워서 감히 어기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주나라의 땅은 조(曹)나라와 등(滕)나라보다 크지 않고 주나라의 백성은 주(邾)나라와 거(莒)나라보다 많지 않았으나 수백 년이 지나도록 천하에 종주가 되었던 것이다.


雖以晉楚齊秦之彊不敢加兵者, 何哉? 徒以名分尙存故也. 至於季氏之於魯, 田常之於齊, 白公之於楚, 智伯之於晉, 其勢皆足以逐君而自爲, 然而卒不敢者, 豈其力不足而心不忍哉! 乃畏奸名犯分而天下共誅之也. 今晉大夫暴蔑其君, 剖分晉國, 天子旣不能討, 又寵秩之, 使列於諸侯, 是區區之名分復不能守而幷棄之也. 先王之禮於斯盡矣. 或者以爲當是之時, 周室微弱, 三晉彊盛, 雖欲勿許, 其可得乎! 是大不然. 夫三晉雖彊, 苟不顧天下之誅而犯義侵禮, 則不請於天子而自立矣. 不請於天子而自立, 則爲悖逆之臣, 天下苟有桓文之君, 必奉禮義而征之. 今請於天子而天子許之, 是受天子之命而爲諸侯也, 誰得而討之! 故三晉之列於諸侯, 非三晉之壞禮, 乃天子自壞之也.


진(晉)ㆍ초(楚)ㆍ제(齊)ㆍ진(秦)의 강함으로도 감히 침공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단지 명호와 분의가 아직 존재했기 때문이다. 계씨(季氏)가 노나라에서, 전상(田常)이 제나라에서, 백공(白公)이 초나라에서, 지백(智伯)이 진나라에서 세력은 모두 군주를 쫓아내고 스스로 통치할 수 있었지만 끝내 하지 못한 것이 힘이 부족하고 마음이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겠는가? 명호를 어지럽히고 분의를 어겨서 천하 사람들이 죽일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때 진나라 대부들이 그 군주를 해치고 업신여기면서 진나라를 나누었는데도 천자는 토벌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을 총애하여 관작을 주어 제후의 반열에 들게 했다. 이것은 작디작은 명호와 분의조차 다시는 지키지 못하고 한꺼번에 내다버린 것이다. 선왕의 예가 이때 모두 없어져버렸다. 어떤 사람은 ‘이때 주나라 왕실은 미약하고 삼진(三晉: 위ㆍ조ㆍ한)은 강성했으니 비록 허락하지 않고 싶어도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는 매우 그렇지 않다. 삼진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천하가 죽이려고 할 것을 돌아보지 않고 의(義)와 예(禮)를 어겼다면 천자에게 (제후의 관작을)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섰을 것이다. 천자에게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섰다면 패역한 신하이니 천하에 제 환공과 진 문공 같은 군주가 있었다면 반드시 예와 의를 받들어 그들을 정벌했을 것이다. 이때 천자에게 요청하고 천자가 허락했으니 이는 천자의 명을 받고 제후가 된 것이다. 누가 그들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삼진이 제후의 반열에 든 것은 삼진이 예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천자가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初, 趙簡子使尹鐸爲晉陽, 請曰: 「以爲繭絲乎? 抑爲保障乎?」 簡子曰: 「保障哉!」尹鐸損其戶數. 簡子謂無恤曰: 「晉國有難, 而無以尹鐸爲少, 無以晉陽爲遠, 必以爲歸.」 及智宣子卒, 智襄子爲政, 請地於韓康子, 康子致萬家之邑. 智伯悅, 又求地於魏桓子, 桓子復與之萬家之邑. 智伯又求蔡皐狼之地於趙襄子, 襄子弗與. 智伯怒, 帥韓魏之甲以攻趙氏. 襄子將出曰: 「吾何走乎?」 從者曰: 「長子近, 且城厚完.」 襄子曰: 「民罷力以完之, 又斃死以守之, 其誰與我!」 從者曰: 「邯鄲之倉庫實.」 襄子曰: 「浚民之膏澤以實之, 又因而殺之, 其誰與我! 其晉陽乎, 先主之所屬也, 尹鐸之所寬也, 民必和矣.」 乃走晉陽. 三家以國人圍而灌之, 城不浸者三版; 沈竈産䵷, 民無叛意. 趙襄子使張孟談潛出見二子曰: 「臣聞脣亡則齒寒. 今智伯帥韓魏而攻趙, 趙亡則韓魏爲之次矣.」 二子乃陰與張孟談約, 爲之期日而遣之. 襄子夜使人殺守隄之吏, 而決水灌智伯軍. 智伯軍救水而亂, 韓魏翼而擊之, 襄子將卒犯其前, 大敗智伯之衆, 遂殺智伯, 盡滅智氏之族.


이보다 앞서서 조(趙) 간자(簡子)가 윤탁(尹鐸)에게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했다. 윤탁이 물었다. “(조세로 거둘) 비단실[繭絲] 만드는 걸 위주로 할까요? 아니면 요새[保障]를 만드는 걸 위주로 할까요?” 간자가 대답했다. “요새 만드는 것을 위주로 하라.” 그래서 윤탁은 호구 수를 줄였다. 간자가 무휼(無恤: 간자의 아들)에게 말했다. “진나라에 어려움이 생기거든 윤탁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고 진양을 멀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귀의할 곳으로 삼아야 한다.”
지선자(智宣子)가 죽자 지양자가 정치를 맡았다. 그가 한(韓) 강자(康子)에게 땅을 요청하자 강자는 만 가구가 사는 마을을 주었다. 지백이 기뻐하며 또 위(魏) 환자(桓子)에게 땅을 요구하니 환자가 다시 만 가구가 사는 마을 주었다. 지백이 또 조(趙) 양자(襄子)에게 채나라 영토였던 고랑(皐狼)의 땅을 요구했으나 양자가 주지 않았다. 지백이 분노하여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조씨를 공격했다. 양자가 성을 떠나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종자(從者)가 말했다. “장자(長子: 지명)가 가까운 데다 성벽도 두텁고 튼튼합니다.” 양자가 말했다. “백성이 힘을 수고롭게 해서 성을 튼튼하게 해놓고 다시 목숨을 바쳐서 지키게 한다면 누가 나를 따르겠느냐?” 종자가 말했다. “한단(邯鄲: 지명)의 창고가 충실합니다.” 양자가 말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창고를 채워놓고 다시 연달아 죽임을 당하게 한다면 누가 나를 따르겠느냐? 아마도 진양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곳은 선왕이 맡기신 곳이고 윤탁이 관대하게 다스린 곳이니 백성이 반드시 화목할 것이다.” 그리고는 진양으로 달아났다.
세 집안이 온 나라 사람들을 데려다가 (진양을) 포위하고 물을 끌어다대니 성이 물에 잠기지 않은 곳은 3판(三版: 6척)뿐이었고 부엌이 물에 잠겨 개구리가 태어날 정도였지만 백성들은 배반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 조 양자는 장맹담(張孟談)에게 몰래 성을 나가 두 사람(위 환자와 한 강자)을 만나게 했다. 장맹담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합니다.[脣亡齒寒] 지금 지백이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지만 조나라가 망하면 한나라와 위나라는 다음 차례가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곧 몰래 장맹담과 약속을 맺고 그에게 날짜를 기약해서 돌려보냈다. 양자가 밤에 사람을 시켜서 제방을 지키는 병사를 죽이고 물을 터서 지백의 군대에 끌어다댔다. 지백의 군대가 물에서 헤어나느라 혼란해지자 한나라와 위나라는 양 옆에서 공격하고 양자의 장졸(將卒)은 앞쪽으로 쳐들어가 지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지백을 죽였으며 지씨 일족을 모두 멸했다.


溫公曰: 智伯之亡也, 才勝德也. 夫才與德異, 而世俗莫之能辨, 通謂之賢, 此其所以失人也. 夫聰察彊毅之謂才, 正直中和之謂德. 才者, 德之資也, 德者, 才之帥也. 是故才德兼全謂之聖人, 才德兼亡謂之愚人; 德勝才謂之君子, 才勝德謂之小人. 凡取人之術, 苟不得聖人君子而與之, 與其得小人, 不若得愚人. 何則? 君子挾才以爲善, 小人挾才以爲惡. 挾才以爲善者, 善無不至矣; 挾才以爲惡者, 惡亦無不至矣. 愚者雖欲爲不善, 智不能周, 力不能勝, 譬之乳狗搏人, 人得而制之. 小人智足以遂其姦, 勇足以決其暴, 是虎而翼者也, 其爲害豈不多哉! 自古昔以來, 國之亂臣, 家之敗子, 才有餘而德不足, 以至於顚覆者多矣, 豈特智伯哉!


온공은 말한다. 지백이 망한 것은 재주가 덕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재주와 덕은 다른데 세속에서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통틀어서 뛰어나다고 하니, 이것은 사람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다. 총명하고 강인한 것을 재주[才]라고 하고 정직하고 두루 조화로운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재주는 덕의 바탕이고 덕은 재주의 인솔자다. 그래서 재주와 덕이 모두 온전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재주와 덕이 모두 없는 사람을 우인(愚人)이라 하며, 덕이 재주보다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재주가 덕을 넘어선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한다. 무릇 사람을 취하는 방법은 성인과 군자를 얻어서 함께할 수 없다면 소인을 얻는 것보다 우인을 얻는 것이 낫다. 어째서인가? 군자는 재주를 가지고 선을 행하지만 소인은 재주를 가지고 악을 행한다. 재주를 가지고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재주를 가지고 악을 실천하는 사람은 악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선하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해도 지혜가 두루 미치지 못하고 능력이 이겨낼 수 없으니, 비유하자면 젖먹이 강아지가 사람을 물어도 사람이 제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소인은 지혜가 간악한 짓을 이룰 수 있고 용기는 포악한 짓을 결행할 수 있으니 이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인데 해로움이 많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나라의 난신(亂臣)과 집안의 패자(敗子) 중에서 재주는 넉넉하고 덕은 부족하여 망하게 된 사람이 많다. 유독 지백뿐이겠는가?




▲예양이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다





趙襄子漆智伯之頭, 以爲飮器. 智伯之臣豫讓欲爲之報仇, 乃詐爲刑人, 挾匕首, 入襄子宮中塗厠. 襄子如厠心動, 索之, 獲豫讓. 左右欲殺之, 襄子曰: 「義士也, 吾謹避之耳.」 乃舍之. 豫讓又漆身爲癩, 呑炭爲啞. 行乞於市, 其妻不識也. 其友識之, 爲之泣曰: 「以子之才, 臣事趙孟, 必得近幸, 子乃爲所欲爲, 顧不易耶? 何乃自苦如此?」 豫讓曰: 「不可. 旣已委質爲臣, 而又求殺之, 是二心也. 凡吾所爲者, 極難耳. 然所以爲此者, 將以愧天下後世之爲人臣懷二心者也.」 襄子出, 豫讓伏於橋下. 襄子至橋, 馬驚; 索之, 得豫讓, 遂殺之.


조 양자가 지백의 머리에 옻칠을 하고 술그릇으로 만들었다. 지백의 신하인 예양(豫讓)은 그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죄수[刑人]로 위장하고 비수를 품은 채 양자의 궁궐 안으로 들어가 측간에서 벽을 바르고 있었다. 양자가 측간에 갔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그곳을 수색하게 했더니 예양을 붙잡았다. 곁에 있던 자[左右]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양자가 말했다. “그는 의로운 선비다. 내가 그를 조심하고 피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예양이 다시 몸에 옻칠을 해서 나병에 걸린 사람처럼 꾸미고 숯을 삼켜 벙어리처럼 위장하고는 시장에서 돌아다니며 구걸하는데 그의 아내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의 재주로 신하가 되어 조맹을 섬기면 틀림없이 가까이에서 총애를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때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도리어 쉽지 않겠는가? 어째서 스스로를 이처럼 고생시키는가?” 예양이 말했다. “그럴 수 없네. 예물을 바쳐 신하가 되고서 또다시 죽이려고 든다면 이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일세. 내가 하는 일은 지극이 어려운 일일세. 그러나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천하 후세에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일세.” 양자가 외출할 때 예양이 다리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양자가 다리에 이르러 말이 놀라자 그곳을 수색하게 했더니 예양을 잡았다. 마침내 그를 죽였다.




○魏斯者, 桓子之孫也, 是爲文侯. 文侯以卜子夏田子方爲師, 每過段干木之廬必式. 四方賢士多歸之. 文侯與羣臣飮酒樂, 而天雨, 命駕將適野. 左右曰: 「今日飮酒樂, 天又雨, 君將安之?」 文侯曰: 「吾與虞人期獵, 雖樂, 豈可無一會期哉?」 乃往, 身自罷之. 文侯使樂羊伐中山, 克之; 以封其子擊. 文侯問於羣臣曰: 「我何如主?」 皆曰: 「仁君.」 任座曰: 「君得中山, 不以封君之弟而以封君之子, 何謂仁君!」 文侯怒, 任座趨出. 次問翟璜, 對曰: 「仁君也.」 文侯曰: 「何以知之?」 對曰: 「君仁則臣直. 嚮者任座之言直, 是以知之.」 文侯悅, 使翟璜召任座而反之, 親下堂迎之, 以爲上客.


위사(魏斯)는 환자(桓子)의 손자이니 이 사람이 문후(文侯)다. 문후는 복자하(卜子夏)와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삼았고, 단간목(段干木)의 초막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예를 갖추었다. 사방의 뛰어난 선비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문후가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들판에 가려고 했다.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했다. “오늘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하늘에서는 또 비가 내리는데 주군께서는 어디를 가려고 하십니까?” 문후가 말했다. “내가 우인(虞人: 동산을 지키는 관리)과 사냥을 하기로 약속했소. 비록 즐겁긴 하지만 한 번 만나기로 한 약속을 없는 무시해서야 되겠소?” 그리고는 가서 자신이 직접 약속을 파했다.
문후가 악양(樂羊)에게 중산(中山)을 정벌하게 해서 승리하고 그곳에 아들 격(擊)을 봉했다. 문후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군주인가?” 모든 신하들이 “어진 군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임좌(任座)는 이렇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중산을 얻고도 주군의 동생을 봉하지 않고 주군의 아들을 봉했는데 어떻게 어진 군주라고 하겠습니까?” 문후가 분노하자 임좌가 종종걸음으로 뛰어 나갔다. 다음으로 적황(翟璜)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어진 군주이십니다.” 문후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적황이 대답했다. “군주가 어질면 신하가 정직합니다. 조금 전에 임좌의 말이 정직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문후가 기뻐하며 적황에게 시켜서 임좌를 불러 되돌아오게 하고 직접 중당(中堂)을 내려가 그를 맞이하고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子擊出, 遭田子方於道, 下車伏謁. 子方不爲禮. 子擊怒, 謂子方曰: 「富貴者驕人乎? 貧賤者驕人乎?」 子方曰: 「亦貧賤者驕人耳, 富貴者安敢驕人! 國君而驕人則失其國, 大夫而驕人則失其家. 失其國者未聞有以國待之者也, 失其家者未聞有以家待之者也. 夫士貧賤者, 言不用, 行不合則納履而去耳, 安往而不得貧賤哉!」 子擊乃謝之.


아들 격이 외출했다가 길에서 전자방을 마주쳤기에 수레에서 내려 땅에 엎드리며 뵈었다. 전자방은 예를 갖추지 않았다. 아들 격이 화가 나서 전자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귀한 사람이 남들에게 교만하게 굽니까? 빈천한 사람이 남들에게 교만하게 굽니까?” 전자방이 말했다. “물론 빈천한 사람이 남들에게 교만하지요.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남들에게 교만하게 굴겠습니까? 나라의 군주가 남들에게 교만하게 굴면 그의 나라를 잃게 되고 대부가 남들에게 교만하게 굴면 그의 집안을 잃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을 나라의 군주로 대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집안을 잃은 사람을 집안의 대부로 대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士)는 빈천한 존재입니다.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행실이 맞지 않으면 신을 신고 떠나가 버릴 뿐이니 어디를 간들 빈천하지 않겠습니까?” 아들 격이 그제야 사죄했다.




○文侯謂李克曰: 「先生嘗有言曰: 『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 』今所置非成則璜, 二子何如?」 對曰: 「居視其所親, 富視其所與, 達視其所擧, 窮視其所不爲, 貧視其所不取, 五者足以定之矣!」 文侯曰: 「先生就舍, 吾之相定矣.」 李克出, 翟璜曰: 「君召卜相, 果誰爲之?」 克曰: 「魏成.」 璜忿然曰: 「西河守吳起, 臣所進也. 君內以鄴爲憂, 臣進西門豹. 君欲伐中山, 臣進樂羊. 中山已拔, 無使守之, 臣進先生. 君之子無傅, 臣進屈侯鮒. 以耳目之所睹記, 臣何負於魏成!」 克曰: 「魏成食祿千鍾, 什九在外, 什一在內; 是以東得卜子夏田子方段干木. 此三人者, 君皆師之: 子所進五人, 君皆臣之. 子惡得與魏成比也!」 璜再拜曰: 「璜, 鄙人也, 失對. 願卒爲弟子!」


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말했다. “선생은 ‘집이 가난하면 현명한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혼란하면 현명한 재상을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소. 지금 재상으로 세울 사람이 위성(魏成) 아니면 적황(翟璜)이오. 두 사람은 어떻소?” 이극이 대답했다. “평소에는 그가 친애하는 것을 살펴보고, 부유할 때는 그가 주는 것을 보고, 영달할 때는 그가 천거하는 것을 보고, 곤궁할 때는 그가 하지 않는 것을 살펴보고, 가난할 때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다섯 가지로 정할 수 있습니다.” 문후가 말했다. “선생은 관사(官舍)로 가시오. 나의 재상이 정해졌소.”
이극이 나오자 적황이 물었다. “주군께서 불러서 재상을 점치셨다는데, 과연 누가 재상이 되겠습니까?” 이극이 말했다. “위성입니다.” 적황이 발끈해서 말했다. “서하수(西河守) 오기(吳起)는 제가 천거한 인물입니다. 군주께서 속으로 업(鄴) 때문에 걱정하실 때 제가 서문표(西門豹)를 천거했습니다. 군주께서 중산을 정벌하려고 하시기에 제가 악양을 천거했습니다. 중산이 함락되었을 때 그곳을 지키게 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선생을 천거했습니다. 주군의 아들에게 사부가 없어서 제가 굴후부(屈侯鮒)를 천거했습니다. 귀와 눈이 보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자면 제가 어떻게 위성에 뒤진다는 말입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위성은 녹봉 천 종을 받아먹는데, 열의 아홉은 바깥에 베풀고 열의 하나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복자하ㆍ전자방ㆍ단간목을 얻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주군이 모두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천거한 다섯 사람은 주군이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어떻게 위성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적황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제가 비천한 사람입니다. 대답할 말을 잃었습니다. 끝내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吳起者, 衛人, 仕於魯. 齊人伐魯, 魯人欲以爲將, 起取齊女爲妻, 魯人疑之, 起殺妻以求將, 大破齊師. 或譖之魯侯曰: 「起始事曾參, 母死不奔喪, 曾參絶之; 今又殺妻以求爲君將. 起, 殘忍薄行人也! 且以魯國區區而有勝敵之名, 則諸侯圖魯矣.」 起恐得罪, 聞魏文侯賢, 乃往歸之. 文侯問諸李克, 克曰: 「起貪而好色; 然用兵, 司馬穰苴弗能過也.」 於是文侯以爲將, 擊秦, 拔五城. 起之爲將, 與士卒最下者同衣食, 臥不設席, 行不騎乘, 親裹贏糧, 與士卒分勞苦. 卒有病疽者, 起爲吮之. 卒母聞而哭之. 人曰: 「子, 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文侯問諸李克, 克曰: 「起貪而好色; 然用兵, 司馬穰苴弗能過也.」 於是文侯以爲將, 擊秦, 拔五城. 起之爲將, 與士卒最下者同衣食, 臥不設席, 行不騎乘, 親裹贏糧, 與士卒分勞苦. 卒有病疽者, 起爲吮之. 卒母聞而哭之. 人曰: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노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 사람들은 그를 장수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오기가 제나라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으므로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심했다. 오기가 아내를 죽여서 장수로 삼아달라고 요구하여 제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어떤 사람이 노후(魯侯)에게 그를 헐뜯으며 말했다. “오기는 처음에 증삼(曾參)을 모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달려가서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증삼이 그와 연을 끊었습니다. 지금은 또 아내를 죽여서 주군의 장수가 되기를 요구했으니 오기는 잔인하고 행동이 야박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노나라는 작디작은데 적을 이겼다는 평판을 얻게 되면 제후들이 노나라를 도모할 것입니다.” 오기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다가 위나라 문후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그에게 가서 귀의하였다.
문후가 오기에 대해서 이극에게 물었다. 이극이 답했다. “오기는 탐욕스럽고 호색(好色)하지만 용병술은 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그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에 문후가 그를 장수로 삼고 진(秦)을 공격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오기의 장수다움은 사졸 중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옷을 입고 밥을 먹었고, 누울 때는 돗자리를 깔지 않았다. 행군할 때는 말과 수레를 타지 않았고, 직접 양식을 싸서 메고 다니며 사졸과 수고와 고생을 나누었다. 병사 중에 등창을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기가 그를 위해서 직접 종기를 빨아냈다. 병사의 어머니가 그것을 듣고 통곡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아들이 병졸임에도 장군이 직접 그 등창을 빨아냈는데 어째서 통곡하십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지난해에 오공(吳公)께서 애아버지의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는데, 애아버지가 전투에 나가 싸우다가 달아나지 않고 끝내 적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공께서 이제 또 아들의 종기를 빨아냈으니, 저는 그가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겁니다.”




▲오기가 부하의 종기를 빨아내다



己卯二十四年. 王崩. 子安王驕立.


기묘년 재위 24년, 왕이 붕어했다. 아들 안왕 교(驕)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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