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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자집/중국 사서

[晉書]진수(陳壽) 열전

by 衍坡 2018. 5. 23.

『진서』: 「진수 열전」



삼국지의 일부

▲둔황에서 발견된 『삼국지』  필사본 중 일부(진수가 쓴 원본이라는 의미가 아님)



陳壽字承祚, 巴西安漢人也. 少好學, 師事同郡譙周, 仕蜀爲觀閣令史. 宦人黃皓專弄威權, 大臣皆曲意附之, 壽獨不爲之屈, 由是屢被譴黜. 

진수(陳壽)의 자는 승조(承祚)이며 파서(巴西) 안한(安漢)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같은 군(郡) 사람인 초주(譙周)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촉나라에 출사하여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黃皓)가 권세를 독차지해 제멋대로 휘두르니 대신들은 모두 뜻을 굽혀 그를 따랐으나 진수만은 유독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번 쫓겨났다.


*貶議(폄의):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평가


 

遭父喪, 有疾, 使婢丸藥, 客往見之, 鄕黨以爲貶議. 及蜀平, 坐是沈滯者累年. 司空張華愛其才, 以壽雖不遠嫌, 原情不至貶廢, 舉爲孝廉, 除佐著作郎, 出補陽平令. 撰蜀相諸葛亮集, 奏之. 除著作郎, 領本郡中正.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 병을 앓아 여종에게 환약을 만들게 했는데 손님들이 와서 그것을 보고 마을에서 진수를 좋지 않게 이야기했다. 촉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벼슬이 오르지 못했다.

사공(司空) 장화(張華)가 그의 재주를 아꼈다. 진수가 비록 혐의쩍은 일을 멀리하지는 않았으나 사정을 알아보니 폄훼하여 쫓아낼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므로 그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다. 좌저작랑(佐著作郎)에 제수되었다가 양평령(陽平令)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나갔다.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을 편찬하여 바쳤다.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었다가 본군(本郡)의 중정(中正)에 임명됐다. 


*출보(出補): 지방 관아의 벼슬에 임명되어 나감



撰魏吳蜀三國志, 凡六十五篇. 時人稱其善敍事, 有良史之才. 夏侯湛時著魏書, 見壽所作, 便壞己書而罷. 張華深善之, 謂壽曰: “當以晉書相付耳.” 其爲時所重如此.

『위오촉삼국지』(魏吳蜀三國志)를 편찬하니 모두 65편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진수가 사실을 잘 기록하므로 훌륭한 사가(史家)의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칭찬했다. 하후담(夏侯湛)이 이때 『위서』(魏書)를 저술했는데 진수가 지은 것을 보더니 곧 자신의 책을 없애고 (역사서 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장화는 몹시 좋아하여 진수에게 말했다. 

“마땅히 진서도 맡겨야겠습니다.” 

그가 당시에 존중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或云丁儀、丁廙有盛名於魏, 壽謂其子曰: “可覓千斛米見與, 當爲尊公作佳傳.” 丁不與之, 竟不爲立傳. 壽父爲馬謖參軍, 謖爲諸葛亮所誅, 壽父亦坐被髡, 諸葛瞻又輕壽. 壽爲亮立傳, 謂亮將略非長, 無應敵之才, 言瞻惟工書, 名過其實. 議者以此少之. 

어떤 사람이 정의(丁儀)와 정이(丁廙)가 위나라에서 명성이 드높았다고 하니 진수가 그 아들에게 말했다. 

“천 석의 쌀을 구해서 보내준다면 응당 당신 아버님을 위해 아름다운 전기(傳記)를 지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씨가 보내주지 않자 끝내 (『삼국지』에) 전기를 써넣지 않았다.

진수의 아버지는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다. 마속은 제갈량에게 죽임을 당했고, 진수의 아버지 역시 죄를 입어 머리를 깎였다. 제갈첨(제갈량의 아들) 역시 진수를 경시했다. 그래서 진수는 제갈량을 위해 전기를 지어서 ‘제갈량은 장수로서의 책략이 장점은 아니었고 적을 대처하는 재주도 없었다’고 했고 ‘제갈첨은 오직 글씨만 잘 쓰니 명성이 그 실상을 넘어선다’고 했다.



張華將舉壽爲中書郎, 荀勖忌華而疾壽, 遂諷吏部遷壽爲長廣太守. 辭母老不就. 杜預將之鎮, 復薦之於帝, 宜補黃散. 由是授御史治書. 

장화가 장차 진수를 천거하여 중서랑(中書郎)으로 삼으려고 했다. 순욱(荀勖)은 장화를 시기하고 진수를 질시했으므로 마침내 이부(吏部)에 풍자하여 진수를 장광태수(長廣太守)로 바꿔서 임명하게 했다. 진수는 어머니가 늙었다며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두예(杜預)가 장차 진(鎭)으로 가면서 황제에게 그를 다시 추천해 마땅히 황산(黃散: 황문시랑)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어사치서(御史治書)에 제수되었다. 



以母憂去職. 母遺言令葬洛陽, 壽遵其志. 又坐不以母歸葬, 竟被貶議. 初, 譙周嘗謂壽曰: 「卿必以才學成名, 當被損折, 亦非不幸也. 宜深慎之.」 壽至此, 再致廢辱, 皆如周言. 後數歲, 起爲太子中庶子, 未拜.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떠났다. 모친은 자신을 낙양에 장사지내도록 유언했다. 진수가 그 뜻을 따랐는데, 어머니를 귀장(歸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죄를 입어 마침내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애초에 초주가 일찍이 진수에게 말했다. 

“경은 반드시 재주와 학문으로 명성을 이룰 것이니 좌절되더라도 불행이 아닙니다. 마땅히 깊이 삼가야 합니다.” 

진수가 이때가 되어 다시 쫓겨나는 모욕을 당했으니 모두 초주의 말과 같았다. 몇 년 후에 다시 태자중서사로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歸葬(귀장): 다른 고장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으로 가져와서 장사 지냄



元康七年, 病卒, 時年六十五. 梁州大中正、尚書郎范頵等上表曰: “昔漢武帝詔曰: ‘司馬相如病甚, 可遣悉取其書.’ 使者得其遺書, 言封禪事, 天子異焉. 臣等案: 故治書侍御史陳壽作三國志, 辭多勸誡, 明乎得失, 有益風化, 雖文艷不若相如, 而質直過之, 願垂採錄.” 於是詔下河南尹、洛陽令, 就家寫其書. 壽又撰古國志五十篇、益都耆舊傳十篇, 餘文章傳於世. 

원강 7년(297) 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나이 65세였다. 양주대중정과 상서랑 범군 등이 표를 올렸다.

“옛날에 한 무제가 조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마상여의 병이 심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책을 모두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각주:1] 사자(使者)가 그의 유서를 얻어왔는데 봉선(封禪)[각주:2]에 관한 일을 언급되어 있었으므로 천자가 그 글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신들이 상고해니 옛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진수가 『삼국지』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경계하는 것이 많아서 득실에 밝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유익합니다. 비록 문체는 사마상여만 못하지만 소박함과 정직함은 그보다 뛰어납니다. 바라옵건대 채록하옵소서.”

이에 하남윤(河南尹)과 낙양령(洛陽令)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집에 가서 책을 베끼게 하였다. 진수는 또 『고국지』 50편과 『익도기구전』 10편을 지었는데, 그가 남긴 문장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진수의 죽음




  1. 『사기』에 따르면 한 무제가 사신을 보냈을 때 사마상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당 기록은 이렇다. <황제는 소충(所忠)을 보냈지만 사마상여는 이미 죽고 집에는 책이 없었다. 그의 아내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마상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책이란 없었습니다. 때때로 글을 저술하면 사람들이 가져가버려 집에는 남은 책이 없습니다. 단지 장경이 아직 죽기 전에 한 권의 책을 저술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자가 와서 책을 찾거든 이것을 올리시오.’ 이밖에 다른 책은 없습니다.” 그가 남긴 서찰은 봉선(封禪)에 관한 글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것을 소충에게 전해주었다. 소충이 그 서찰을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그것을 진중하게 여겼다. 그가 남긴 봉선에 관한 글은 다음과 같았다.> [본문으로]
  2. 임금이 흙으로 단을 쌓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던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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