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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양下-3. 이웃나라와 사귀는 방법(寡人好勇) 양혜왕장구下 (3) : 과인은 용맹함을 좋아합니다(寡人好勇) 齊宣王問曰: “交鄰國, 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 爲能以小事大, 故大王事獯鬻, 句踐事吳. 제 선왕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교류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탕(湯)이 갈나라[葛]를 존중하고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존중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만이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왕(太王: 고공단보)이 훈육(獯鬻)을 섬기고 구천이 오(吳)를 섬긴 것입니다. 仁人之心, 寬洪惻怛, 而無較計大小强弱之私, 故小國雖或不恭, 而吾所以字之之心自不能已. 智者明義理, 識時勢, 故大國雖.. 2020. 2. 12.
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2020.01.17. 1. 들어가며: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의 쟁점 고려와 몽골은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맺었다. 1259년(고종 46)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양국의 관계는 13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고려-몽골 관계는 몽골 복속기 이전에 고려가 다른 중국 왕조들과 이어갔던 외교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고려 국왕이 몽골 황실과 통혼하여 부마의 작위를 받는가 하면, 몽골 황제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의 폐위와 즉위가 결정되기도 했다.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에게 친조(親朝)해서 외교 현안을 해소하기도 하고, 몽골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업은 ‘부원배’(附元輩)가 고려 안팎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왕의 권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2020. 2. 8.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 권태억, 2014,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 서울대 출판부 2020.01.29. Ⅰ. 제국주의 침략기 문명화 사명론과 일본 1. ‘문명화 사명’과 국제법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ㆍ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할 때 내세운 합리화의 논리가 바로 ‘문명화’였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문명화’의 구호를 내세웠다. ‘文明’은 본래 일본이 Civilization이라는 어휘를 번역해서 만들어낸 어휘다. 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isㆍcivilitas는 본래 ‘시민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뜻했다. ‘문명’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18세기 이후다. Civilization도 18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신.. 2020. 1. 31.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정동훈,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역사와 현실』 113 2020.01.12. 문제의 소재: 조공시스템은 과연 실재했나? 저자는 오늘날 연구자들이 거론하는 ‘조공시스템’(tributary system)을 당대인들이 처음부터 기획하거나 상정한 적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오히려 후대 연구자들이 몇 가지 제도나 관례를 조합해서 사후적으로 구성해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John K. Fairbank가 1940년대에 조공시스템론을 제창한 이래로 그 개념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틀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과 그 주변국의 관계는 상하 위계 속에서 외교와 무역이 결합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한다. 주변국은 거대한 부를 .. 2020. 1. 19.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2020.01.18. 1. 머리말 공민왕 대는 원 간섭기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新興士大夫’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신흥사대부 등장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원 간섭기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와 공민왕 대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여전히 사대부의 개념조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과 새로운 사회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사대부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부당하고, 그보다는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대부가 정치세력화한 시기를 과도하게 소급하는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사대부는 ‘중소지주로서 동일.. 2020. 1. 19.
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여말선초 국왕의 정치권위 변화와 그 역사적 맥락 -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차이점을 중심으로 - 2019.12.23. 1. 머리말 2. 고려ㆍ조선 왕조의 개창과 즉위 교서 (1) 개국의 형식과 절차에 보이는 유사성 (2) 왕건과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드러난 차이점 3. 국왕의 정치권위와 정치적 지향, 그리고 정치의 현실 (1) 패도와 혈연: 고려시대 정치문화의 이상과 현실 (2) 천명과 도덕: 도덕적 군주와 새로운 정치질서의 추구 4.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은 누가 세운 나라일까? 그동안의 연구들은 ‘신흥사대부’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조선을 건국했다고 설명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공민왕 대 이후로 중앙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 2019. 12. 29.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2019.12.09 1.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 고려 말 성리학 수용은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수용과정에 관해 많은 논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랜 연구에 비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에 있지만, 여말선초 성리학을 보는 연구자들의 기존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 시각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②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의 정.. 2019. 12. 9.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 2019.12.04 1. 프롤로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20세기의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0년대 이래로 조선 유학에 천착했던 그는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유학사를 구성해냈다. 그런 면에서 다카하시 도오루가 ‘근대적 전통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연구는 철저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카하시가 보기에 조선 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주자학에만 골몰”했고, 그들의 학문도 “지극히 간이하고 또 단조롭다.” 이런 논점으로는 조선 유학사의 역사적 의.. 2019. 12. 7.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2019.12.05 최종석은 한 연구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논증하려 했다. ①몽골 복속기에 이어지던 고려-원 관계가 1356년에도 기본적으로 지속했다. ②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는 몽골 복속기에 ‘본래적’ㆍ‘당위적’ 양상으로 변화했고, 그런 특징은 1356년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나는 두 번째 견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첫 번째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1356년을 기점으로 확실히 약해지는데, ①의 주장은 이런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원은 1356년 이전까지 고려의 국정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남의 ‘한적’(漢賊)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던 원은 1354년(공민왕 3).. 2019. 12. 6.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2019.12.05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元)과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가와 ‘부원세력’을 일시에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아울러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의 지역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의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가 지닌 패를 회수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의 계획 아래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반원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전격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각주:1] ‘반원운동’을 고려의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종합적으.. 2019.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