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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by 衍坡 2019. 12. 7.

다카하시 도오루를 향한 비판, 다시 보기

-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


2019.12.04

다카하시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 프롤로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20세기의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0년대 이래로 조선 유학에 천착했던 그는 근대적인 학문방법론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유학사를 구성해냈다. 그런 면에서 다카하시 도오루가 ‘근대적 전통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다카하시의 연구는 철저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심각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카하시가 보기에 조선 유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주자학에만 골몰”했고, 그들의 학문도 “지극히 간이하고 또 단조롭다.” 이런 논점으로는 조선 유학사의 역사적 의미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더구나 조선의 유학이 주자의 학술을 그대로 모방한 데 불과하다면 조선 유학을 탐구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모순적인 결과를 낳는다.

 

다카하시의 학문에 내포한 문제점을 생각하면, 해방 이후 한국인 연구자들이 그의 연구를 비판해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판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다카하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직접 비판하는 것이다. 한 연구는 다카하시 도오루를 비롯한 일제의 ‘관학자’들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한국의 유교를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비판한다.(최영성, 2005) 다른 한편에서는 다카하시의 연구를 학술적 차원에서 비판했다. 어떤 연구는 조선 유학을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틀로 파악한 다카하시의 견해를 비판했다.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구도는 조선시대 유학사의 전개를 충실히 보여주기에 부적절한데도 다카하시의 영향을 받아 아무런 의심 없이 ‘주리’와 ‘주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이형성 2005)

 

다카하시의 식민주의적 편견이나 주리론ㆍ주기론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카하시를 비판하는 연구들은 그가 한국 유학사 연구에 미친 영향을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다카하시가 조선 유학의 흐름을 ‘철학사’의 틀로 재구성해 낸 것은 매우 중요한 성취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한국인 연구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수용되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앞서 언급한 두 연구만 하더라도 20세기 한국인의 자국 유학사 연구가 다카하시의 식민주의적 논점을 오랫동안 답습했다는 전제를 당연시한다. 예를 들어서 “해방 이후 1세대 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인 관변학자들의 연구를 일정한 반성과 대안 없이 답습한 경향이 있었다”는 서술은 다카하시의 유학사가 한국인의 조선 유학사 인식을 결정지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수용자의 맥락과 능동성을 소거하면서 다카하시의 영향력만 일방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가 20세기 한국 유학사 연구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다카하시와 현상윤(玄相允)의 견해를 비교해보려고 한다. 장지연과 다카하시의 견해를 비교하는 논문은 이미 여러 차례 발표되었지만, 다카하시와 현상윤을 비교하는 연구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가 1948년에 저술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저작은 다카하시가 해방 이후 한국 유학사 연구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는 데 활용하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는 다카하시의 저술을 참조했고, 또 다카하시도 현상윤의 저술에 서평을 남긴 만큼 두 텍스트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2. 방법론과 구성 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다카하시의 연구가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려면 두 사람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공통적인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상윤이 다카하시의 논문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의 발달」을 인용한 사실을 고려하면, 다카하시의 연구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연구를 비교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공통점은 도통의식에서 벗어나 학문의 특징에 따라 유학사를 서술했다는 것이다. 우선 다카하시는 조선의 정파가 학파 구분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전제에서 사단칠정론에 관한 학설 차이를 정파=학파가 분화한 핵심 원인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조선 유학의 2대 학파는 주리파와 주기파”다. 이황이 “이를 한층 근본적으로 여기는” 주리파(主理派)였다면, 이이는 “이는 하나고 기는 분수이기 때문에 수양의 요체는 기의 징치에 있다고 여겨 리보다 기를 중시”하는 주기파(主氣派)였다.[각주:1] 다카하시는 퇴계를 이은 영남학파가 정치적으로 남인이 되어 주리론을 당론으로 채택했다고 보았다. 반면 율곡을 존숭하는 기호학파는 노론으로 이어져 주기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물론 다카하시의 설명에서도 ‘사승관계’(師承關係)가 고려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영남학파가 퇴계의 제자로 그의 학맥을 계승했다는 식의 서술은 그가 조선 유학사를 설명하면서 사승관계를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승관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그것이 성인의 도가 전승되는 계보, 즉 도통(道統)과 연결된 것은 아니다. 다카하시는 사승관계를 단순히 정파 혹은 학파의 계보로만 활용한다.(김태년, 2010) 물론 그가 학파ㆍ정파를 분류하는 기준은 ‘성인의 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학문의 논리다. 그런 점에서 다카하시의 연구는 전통적인 도통의식에서 벗어났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도통의식에서 벗어났다는 면에서는 현상윤도 다카하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각주:2] 그는 유학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다양한 갈래가 있다고 본다. 같은 유학이라고 해도 정치를 강조하는 학설도 있고, 경제를 강조하는 학설도 있으며, 윤리도덕이나 문학을 강조하는 학설도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상윤의 입장에서 보면, 유학의 여러 갈래 중에서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유학의 성격도 달라진다. 그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유학도 어느 시기에는 그 현실적 방면을 힘써 발휘한 때도 있고, 또 어느 시기에는 그 문학적 방면을 발휘한 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치, 또 어떤 사람은 문학, 또 어떤 사람은 리학 또는 예학을 연구하여 발휘하였다.” 이런 설명은 도통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식인이 연구한 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유학사의 흐름을 묶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는 근대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유학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도통의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장지연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분명해진다. 일단 다카하시와 장지연을 비교하면, 두 사람이 ‘유자’의 범주와 유학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최재목, 2009) 다카하시는 ‘유자’(儒者)와 ‘유학자’(儒學者)를 서로 다른 범주로 정의한 바 있다. 유자가 도를 얻어서 ‘실천’하는 존재라면, 유학자는 훈고학자와 성리학자 같이 이론 탐구에 천착할 뿐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실천하지 않는 존재다. 다카하시는 유자와 구분되는 ‘유학자’가 한나라 때 처음 생겨났다고 보았고, 유학 연구는 그뒤로도 꾸준히 이어지다가 송대에 이르러 학술 경향이 성리학으로 치우쳤다고 판단했다. 이런 설명에는 유학을 근대 학문의 한 분과와 유사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장지연의 생각은 다카하시와 달랐다. 그는 주자학의 도통론을 바탕으로 다카하시의 견해를 비판했다. 장지연이 보기에 유자든 유학자든 성인의 도를 따르는 도학자라는 점에서 양자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따라서 장지연으로서는 유자와 유학자가 다르다는 전제에서 구성된 다카하시의 유학사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다카하시와 달리 유학이 진(秦)에서 단절되었다가 한나라 때 다시 부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부활한 유학은 후대로 이어지지 못하다가 송대에 다시 밝혀졌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관과 도통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던 것이다.(최재목, 2009) 따라서 다카하시의 논점이 장지연과 사뭇 달랐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다카하시와 장지연의 차이점은 현상윤과 장지연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유학사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편제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 장지연이 도통을 중심으로 조선 유학사를 이해했다면, 현상윤은 “시대ㆍ이념ㆍ학문에 따라 유학자를 구성하고 유학사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장지연은 정몽주를 조선 유학의 종조(宗祖)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이황까지 도통이 이어졌다고 보았다. 물론 조선 후기에 관한 서술에서는 도통이라는 기준이 약해지고 학풍ㆍ지역ㆍ당쟁 등 여러 기준이 적용되었지만, 그 인물 편제 방식은 여전히 연원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지식인들의 이념과 학문의 내용과 성격을 기준으로 조선 유학사를 서술한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전통적인 연원록의 영향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학술서의 형태를 갖추었다.(노관범, 2017) 장지연이 전통적인 유학관과 도통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현상윤은 근대적인 방법론에 따라 조선 유학사를 재구성한 것이다.[각주:3] 이런 간극을 고려할 때, 현상윤은 다카하시의 유학사 서술 방식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모두 근대적인 방법론으로 조선 유학사를 구성했더라도, 그 사실만으로는 다카하시가 현상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일단 현상윤 본인이 일본에서 근대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사 저술이 현상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근거는 없다. 더구나 현상윤은 『조선유교연원』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비록 현상윤과 장지연이 택한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른 건 사실이지만, 『조선유학사』와 『조선유교연원』의 구성은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 실제로 한 연구는 “『조선유학사』는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에서 많은 부분을 『조선유교연원』에 의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고영진, 1994)

 

물론 다카하시가 현상윤에게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다카하시의 체계에 따라 ‘주리파’ㆍ‘주기파’ㆍ‘절충파’라는 삼분법으로 구분했다”는 지적이 있다.(이형성, 2005) 실제로 『조선유학사』는 18세기 이후 조선 유학사를 주리파ㆍ주기파ㆍ절충파로 나뉘어 설명한다.

 

사칠리기론을 중심으로 ‘이기호발설’과 ‘기발이승설’로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는 이때에 이르러, 퇴계학파는 주리설을 주장하는 학파가 되고 율곡학파는 다시 두 학파로 나뉘어 한 학파는 퇴계학파와 정반대되는 입장에서 주기설을 주장하게 되고 다른 한 파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중간에 서서 주기설과 주리설의 양설을 다 취하지 아니하고 주리설에 약간의 접근을 보이면서 이기겸지(理氣兼指)의 학설을 주장하는 중간파 내지 절충파가 되었다.

 

다카하시가 현상윤의 저작을 읽고 자신의 논문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 발달」과 체계가 같다고 평가한 것도 이런 서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차이점도 있다. 바로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ㆍ절충파라는 구분이 차지하는 위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점은 주리파ㆍ주기파의 구분을 서술하는 비중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다카하시는 「조선유학대관」에서 조선 유학사를 고려의 유학과 조선의 유학으로 나누고, 조선의 유학은 다시 퇴계와 율곡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이런 설명은 퇴계와 율곡 단계에 성립한 주리파와 주기파의 구분으로 조선 유학사의 전체 틀을 규정할 수 있다는 다카하시의 생각을 반영한다. 그는 실제로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의 발달」에서 주리파ㆍ주기파ㆍ절충파의 틀로 조선 유학 전체를 설명한다. 반면, 현상윤은 대체로 18세기 이후로 국한해서 다카하시의 도식을 채택한다.[각주:4] 그에 따르면, 영남학파가 처음부터 “기를 버리고 이만을 취하는 주리설”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다보니 논의가 점차 그렇게 변화해 갔다고 본다. 그 기점은 이재(李栽) 단계, 즉 17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더구나 현상윤이 꼭 ‘주리파=영남학파=남인’이라는 다카하시의 도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현상윤은 영남학파 이외에도 주리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들이 “무슨 당쟁의 관계도 없이 순전히 학문적 입장에서 주리설을 주창”했다고 판단했다.

 

‘주리파ㆍ주기파’라는 구분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다보니 다카하시와 현상윤이 구성한 유학사의 구성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다카하시는 대체로 조선시대 유학사를 퇴계와 율곡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조선 유학의 ‘철학적인 논의’만을 기준으로 조선 유학사를 구분했기 때문이다.[각주:5] 반면 현상윤은 여러 기준을 적용하여 조선 유학사를 여러 단계로 구분했다. 「나려시대의 유학」ㆍ「조선 초기의 유학」ㆍ「당쟁시대의 유학」이 ‘시대’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라면, 「모화사상의 고취」ㆍ「척사위정의 운동」은 ‘이념’을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다. 「성리학」ㆍ「호락 학파의 분열」ㆍ「경제학파의 출현과 풍동」 등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학문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노관범, 2017) 더구나 현상윤은 각 단계의 유학이 지닌 특성도 다르다고 보았다. 주리파ㆍ주기파ㆍ절충파라는 도식이 단지 한 장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현상윤이 다카하시처럼 이기론만으로 조선 유학의 성격을 재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3. 조선 유학사 평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일부 연구에서 다카하시를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가 조선 유학사를 폄훼하고 왜곡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의 조선 유학사 연구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사 연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연구의 기초가 되는 식민주의 역사관이다. 다음과 같은 의견에서 그런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 학문에 대한 초기 연구자들은 대부분 조선의 망국 원인이 주자학에 있었다는 부정적 인식이 있었기에 다카하시의 주자학에 대한 연구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도 그의 이론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이형성, 2005) 이 장에서는 이런 견해를 따져 보기 위해서 다카하시와 현상윤의 유학관을 비교하려 한다.

 

조선 유학 전체를 바라보는 다카하시의 시선은 꽤 단순한 편이다. 그가 조선 유학을 평가하는 방식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모든 평가에는 식민주의적인 생각이 짙게 배어있다. 일단 그는 조선 유학에서 독자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조선 유학의 학술사는 매우 간단하고 단조롭다”는 것이다. 다카하시의 진단에 따르면, 그 이유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독창적인 학술을 만들어내지 않고 본인들의 학문이 주희의 취지에 부합하는지만 논의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는 자신이 조선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기는 퇴계 이황조차 ‘창조적인 생각과 발명이 빈약한 주자학의 가장 충실한 조술자’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다카하시는 조선 유학이 학술적인 측면보다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조선 유학사의 가치는 학설보다도 오히려 사회 정치적으로 국가 사회에 미치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서술에서 그런 인식을 살필 수 있다. 한 마디로 다카하시는 조선 유학을 ‘학문’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그가 ‘고착성’과 ‘종속성’을 조선 유학의 특징으로 규정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다카하시의 관점에서 보면, 주자의 학설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학문은 더 이상 학문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권력의 문제와 직결된다. 권력을 두고 정파 간의 대립이 벌어졌을 때, 시비를 판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어느 쪽의 견해가 주자의 학설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의 다양성이 보장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조선의 학설은 어디까지나 주희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을 뿐이다. 다카하시가 “조선 유학은 단일 주자학”이라고 하면서 “다른 학문의 존립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유학의 ‘고착성’과 ‘종속성’은 다카하시가 조선 유학을 일본 유학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가 보기에 고학파(古學派)로 불리는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는 “마침내 한 파의 견해를 열어 관학인 주자학파에 대해서 크게 민간 학문의 불꽃을” 밝힌 “호걸 유학자”였다. 하지만 그와 달리 조선에서는 주자의 학설을 금과옥조로 여겨 민간의 학술 활동을 진흥시키지 못했으므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다카하시에게 이런 차이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큰 차이이고, 장래에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두 학풍의 차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과 조선 유학의 차이를 ‘민족성’ 혹은 ‘국민성’에서 찾는다는 사실인데, 그의 식민주의적 관점이 조선 유학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조선 유학에 관한 부정적인 시선은 현상윤의 『조선유학사』에서도 나타난다. 그 책의 서론에서 현상윤은 유학의 허물로 모화사상ㆍ당쟁ㆍ가족주의의 폐해ㆍ계급사상ㆍ문약ㆍ산업능력 저하ㆍ상명주의ㆍ복고사상 여덟 가지를 들었다. 그중에서 모화사상과 당쟁, 가족주의의 폐해와 상명주의, 문약은 이미 다카하시가 조선인의 특성으로 지적한 적이 있다.[각주:6] 물론 ‘조선 유학’의 특성과 ‘조선인’의 특성이 꼭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다카하시가 ‘학풍’의 차이를 ‘국민성’의 차이와 결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카하시가 규정한 조선인의 특성은 유학과 구분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특히 현상윤이 언급한 모화사상과 당쟁은 각기 다카하시가 말한 ‘사상의 종속’과 ‘사상의 고착’에 서로 대응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현상윤이 “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인 관변학자들의 연구를 일정한 반성과 대안 없이 답습한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상윤이 조선 유학의 공로도 인정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가 보기에 군자학(君子學)의 면려, 인륜도덕의 숭상, 청렴절의의 존중은 조선 유학의 중요한 공로였다. 더구나 현상윤은 조선 유학이 세계사적 차원에서 매우 훌륭했다고 고평한다. 유교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키는 거대한 실천력과 논리정연한 입론 체계로 볼 때, 조선 유학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독특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유교의 죄’를 물은 현상윤이 실제로는 조선 유학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유교철학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유학은 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토론함에 미쳐서, 그 발전은 비로소 절정에 이른 것이다. 즉 경학에 통달하고 역사의 밝은 것[通經明史]을 그 ‘물의 발원지[發源]’라고 보며, 문장의 학문을 ‘물줄기의 시기[河川時期]’라고 보고, 지치주의로 향하는 정치와 교화의 실천을 ‘강의 시기[江漢時期]’라고 보면, 이 성리학의 이론유학은 바야흐로 그 왕양(汪洋)한 ‘해양의 시기[海洋時期]’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한 영역 내에서 이전 사람이 일찍이 밝히지 못하였던 것을 한층 명료하게 발휘한 곳도 있고, 중국의 선유가 일찍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비로소 우리 선현들이 개척한 것도 적지 않다. …… 이 시기 유학의 업적이야말로 조선사상이 적지 않게 동양 또는 세계사상사에 공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유교의 죄를 묻는 현상윤의 태도는 다카하시의 영향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했다고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정작 같은 지면에서 그는 조선의 유학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과연 이런 상반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현상윤이 구사하는 용어와 논리가 다카하시의 생각과 ‘표면적으로’ 얼마나 유사한가를 묻기보다 현상윤 본인의 의도와 그가 고려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상윤은 『조선유학사』 서문에서 언급했던 조선 유학의 죄목 여덟 가지를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여덟 가지 죄가 단순히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나열된 것은 아니다. 현상윤은 자신이 거론한 유학의 죄를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 모양으로 하여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풍속은 날로 파괴되며 국정은 날로 문란하여 가고 국력은 나날이 쇠약하여져서 백성은 뿔뿔이 흩어져 천만인(千萬人)이 천만심(千萬心)을 가지고, 국왕이나 귀족이나 관리는 인민을 보호하기 전에 내 몸과 내 집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먼저 인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라가 있으되 주인이 없으며 주인이 있으되 국민이 없고 국민이 있으되 구수(仇讎)가 있고 도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위에 국민이 또 다시 암매하고 약하고 빈핍하고 나타(懶惰)하고 신용이 없으니, 이러고야 어떻게 안으로 국맥을 유지하며 밖으로 외국의 모멸을 막으랴?

 

이 글은 『조선유학사』에 제기된 유학의 문제점이 단순한 유학 비판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그것은 유학사를 빌려 현상윤 본인이 몸담은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조선유학사』는 현상윤 본인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실천의식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어느 연구는 현상윤의 『조선유학사』가 “해방 후 민족 사상의 올바른 수립이라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그가 조선 유학을 ‘실천유학과 이론유학의 반복’으로 이해하면서 지치주의 운동ㆍ경제학파 운동ㆍ척사위정 운동의 ‘실천성’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도 그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노관범, 2017) 그렇다면 현상윤이 제시한 조선 유학의 죄목이 설령 다카하시의 생각과 유사해 보이더라도 반드시 현상윤이 다카하시의 식민주의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4. 에필로그

 

지금까지 다카하시 도오루와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가 서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연구 방법론이나 저작의 구성, 조선 유학에 관한 평가를 살펴보면 꽤나 비슷해 보이는 곳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다카하시와 현상윤은 모두 도통의식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유학사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점은 두 사람이 구성한 조선 유학사의 특징을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과 비교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단순히 현상윤이 근대적인 유학사를 구성해냈다는 사실만으로는 다카하시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둘째, 다카하시와 현상윤 모두 조선 후기 유학사에 주리파 주기파 절충파라는 도식을 적용했다. 이 사실은 대체로 다카하시가 한국인의 조선 유학사 연구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제시한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도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히 다르다. 현상윤은 단순히 다카하시의 학설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틀 안에서 그의 학술을 활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조선 유학사를 구분하는 방식에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셋째, 다카하시와 현상윤에 저술에서는 모두 조선 유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평가는 유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다카하시와 달리 현상윤의 저술에서는 조선 유학의 공로와 세계사적 위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이 공죄론에는 “해방 후 민족 사상의 올바른 수립이라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이 반영된 만큼, 조선 유학의 죄목을 거론하는 이유가 다카하시와 같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일 현상윤이 다카하시를 답습하는 데 불과했다면 굳이 조선 유학의 공로를 거론하거나 그 긍정적인 면모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카하시와 현상윤의 연구에는 적잖은 차이점이 있다. 두 사람의 개인적ㆍ사회적 조건이 서로 달랐던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차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다카하시의 비판자들도 동의하듯이,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맥락과 떼어놓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연구가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다카하시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진행한 조선 유학사 연구를 한국 철학과의 모색기ㆍ정립기ㆍ응용기로 구분했는데, 그 변화는 식민통치 방식의 변동과도 긴밀히 얽혀있다고 분석했다.(김미영, 2010) 반면 현상윤은 다카하시와 사뭇 다른 고민을 하며 『조선유학사』를 저술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 어떤 형태의 국가ㆍ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 해방 이후에 “현상윤이 발견한 유학의 사상적 역할은 구성원의 덕성함양과 교화를 통해 안정적 사회유지를 추구하는 ‘보수적’ 성격의 것”이었다는 평가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이태훈, 2011)

 

하지만 다카하시를 비판하는 연구들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른 고민을 했다는 변수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이 구사한 용어와 논리의 표면적인 유사성에만 주목했을 뿐, 그 용어와 논리가 어떤 문제의식 혹은 어떤 학문적 맥락에서 구사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 결과 다카하시의 식민주의적 논점이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유학사 인식을 지배했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다카하시 비판이 단순히 학술적 차원을 넘어 ‘식민주의 청산’이라는 당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도 바로 그런 판단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런 논점에서는 다카하시나 해방 이후 한국인 연구자들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선 유학사를 읽어내려 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어렵다. 식민주의에 내포한 문제점을 세밀하게 검토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 천착해 온 다카하시 비판은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 다카하시를 비판하는 방식도 민족주의적인 당위에서 벗어나 철학사ㆍ사상사적 맥락 위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다카하시 도오루, 구인모 역, 2010, 「식민지조선인을 논하다」, 『동국대학교출판부』
다카하시 도오루, 조남호 역, 1999, 『조선의 유학』, 소나무
현상윤, 이형성 교주, 2008,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심산

 

고영진, 1994, 「한글로 쓴 최초의 한국 유학 통사」, 『역사와 현실』 14
김미영, 2010,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한국철학관’과 내셔널리즘」, 『동양철학』 34.
김태년, 2010, 「학안에서 철학사로 - 조선유학사 서술의 관점과 방식에 대한 검토」, 『한국학연구』 23
노관범, 2017, 「연원록에서 사상사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를 읽는 방법-」, 『한국사상사학』 56
이태훈, 2011, 「해방 후 현상윤의 유학(儒學)인식과 사상적 지향 -평가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38
이형성, 2005, 「다카하시 도오루의 조선 성리학 연구 영향과 새로운 모색」, 『오늘의 동양사상』 13
최영성, 2005, 「다카하시 도오루의 한국 유학관 비판」, 『오늘의 동양사상』 13
최재목, 2009, 「張志淵과 高橋亨의 ‘紙上論爭’에 대하여」, 『일본문화연구』 32




  1. 다카하시에 관한 저술은 모두 다카하시 도오루, 조남호 역, 1999, 『조선의 유학』, 소나무를 참조했다. [본문으로]
  2.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는 현상윤, 이형성 교주, 2008,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심산을 참고했다. [본문으로]
  3. 물론 장지연의 생각이 전통적인 도통의식에 완전히 충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유교연원』에서 다루는 인물들을 보면, 특정한 학파ㆍ정파에 구애받지 않는다. 심지어는 정제두 같은 양명학자도 같은 책 안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런 사실을 고려하면, 기존의 학안(學案)과 비교할 때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이 도통의식과 더 멀어졌다는 평가는 설득력 있다. (김태년, 2010) 그러나 『조선유교연원』의 총론에는 조선이 송유의 학문을 계승했다거나 유교의 종지가 정몽주로부터 길재ㆍ김숙자ㆍ김종직 등을 거쳐 조광조에게 이어졌다는 서술이 있다. 이 점은 장지연이 도통의식을 바탕으로 유학사를 이해하는 전통적인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조선유교연원』이 전통적인 연원록과 근대적인 유학사 사이의 과도기적 위치에 놓인다는 노관범의 평가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노관범, 2017) [본문으로]
  4. 「조선유학대관」에서는 ‘주리’와 ‘주기’ 혹은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황과 이이 단계에서 조선의 2대 학파가 성립했다는 설명은 분명하게 제시된다.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의 발달」에서 제시된 주리파와 주기파라는 도식적인 설명은 「조선유학대관」 단계에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다카하시는 실제로 「조선유학대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유학은 자세히 살펴보면 유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철학은 유교를 일상 생활의 실천적 도덕과 정치적 법도로만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철학적 체계로 봄으로써 우주와 심성의 문제를 해석하여 도덕이나 정치 등이 그 원리에 근거한다고 보는 본체학적ㆍ심성학(목적학)적 가치를 승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학을 배우는 자는 단순히 訓詁, 記誦, 詩文을 연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고를 통하고 이성에 비춰 자신의 사상과 신앙의 안정을 얻는 데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6. 다카하시는 조선인의 특징으로 10가지를 지적했다. ①사상의 고착, ②사상의 종속, ③형식주의, ④당파심, ⑤문약, ⑥심미관념의 결핍, ⑦공사의 혼동, ⑧관용과 위엄, ⑨순종, ⑩낙천성. (다카하시 도오루, 구인모 역, 2010, 「식민지조선인을 논하다」, 『동국대학교출판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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