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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친일파인가?

by 衍坡 2018. 4. 23.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을 바라보는 시선들 : 민족주의자 VS 친일파

 

몽양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ㆍ중국ㆍ미국ㆍ소련 등 다양한 외부세력과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 점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소련과 미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그 모두와 폭넓게 교류했던 여운형의 행보는 분명히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미군정과 한국 우익 세력은 그를 공산주의자ㆍ친일파 등으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좌익 세력은 여운형이 친미앞잡이이자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들은 특정한 정파나 이념, 노선에 얽매이지 않았던 여운형의 삶의 궤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일대 전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여운형은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주의자’로 한국 현대사에 그 위상을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화두로 삼았던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조선 민족의 독립을 외치면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일본과 중국, 소련과 미국을 가리지 않았던 여운형의 삶은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그가 삶의 막바지에 이끌었던 좌우합작운동은 좌우의 이념대립을 극복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되었다.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 민족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던 여운형의 삶이 부각되면서 그에 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운형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이들은 여운형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며 친일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논쟁과정에서 여운형의 친일 의혹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여운형의 친일 혐의는 어떤 맥락에서 왜 제기된 것일까?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과연 제시된 근거는 충분한 것일까?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여운형을 두고 친일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것일까? 나는 이 글에서 이런 질문들에 답해보고 싶다.

 

 

여운형

▲몽양 여운형

 

 

여운형의 친일혐의를 제기하는 네 가지 맥락

 

여운형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의혹은 크게 네 차례 제기되었다. 네 번의 의혹제기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1919년 일본의 수뇌부와 접촉했던 여운형에 대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비난, ②해방 직후 미군정과 우익세력이 여운형에게 품었던 의혹, ③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제시한 혐의, ④2000년대 건국훈장 추서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두고 보수진영에서 제기한 의혹. 이러한 의혹들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 다른 주체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그 역사적ㆍ정치적 맥락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여운형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주장을 사례별로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사례는 여운형이 추구했던 독립운동 노선과 관련이 있었다. 1919년 당시 여운형이 추구했던 독립방안은 외교독립론이었다. 그가 일본 정부에 외교관을 파견해 조선 독립을 주장하자고 외쳤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여운형의 주장은 임정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동휘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생각은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운형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운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하라(原敬, 수상)ㆍ다나카(田中義一, 육군대신)ㆍ고하(古賀廉造, 척식국 장관) 등을 접견했고, 그 자리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운형의 행보는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 쏟아지던 비난도 종식시켰다.

 

여운형의 친일 혐의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과 우익 인사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14일자 정보 보고서에서 여운형에게 친일 의혹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또,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여운형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일본놈들에게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지?”라며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친일파로 인식했던 데는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의 영향이 컸다. 미군정의 정치적 파트너가 주로 우익 세력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익세력이 여운형을 친일파로 인식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1940년대 여운형의 두 번째 일본행이고, 다른 하나는 1944년 『경성일보』(오늘날의 『서울신문』)에 실린 학병 권유 논설이다. 특히 『경성일보』 논설은 그의 친일 혐의를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적 근거였다. 논설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부터 극히 엄숙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조선의 가야할 길을 내선(內鮮) 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대동아전쟁은 소극적으로 구미(歐美) 침략에 대한 대동아의 방위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있다. 상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영국이며 그것에 협력하는 세력이다. 이제 세계 신질서의 역사를 창건하는 성업을 하고 있는 추축국의 유대를 강화하며,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착착 건설되고 있다. 제국의 존망을 걸고 피로써 싸우는 이 일전(一戰)을 어떤 어려움과 쓰라림이 있더라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래서 청년은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반도 2500만 동포에 호소함」)

 

논설에 따르면, 대동아전쟁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대동아를 보호하고 서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므로 조선 청년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일제가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글이 여운형의 이름으로 게재되었다는 것이다. 여운형에게 친일 혐의를 제기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이 논설은 해방 이후에도 여운형을 친일파로 공격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이 여운형을 친일파로 인식했던 것도 그런 근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운형 친일 혐의 제기 자료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제기하는 기사

 

 

 

여운형은 죽은 뒤에도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친일 혐의가 새롭게 제기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친일파 연구가’였던 임종국은 여운형과 친일단체의 관계에 주목하여 그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여운형은 1930년대부터 친일단체 두 군데와 일정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한 곳은 ‘전아세아제국의 평화를 확보하고 공존공영의 실을 거하여 그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창설된 조선대아세아협회였고, 다른 한 곳은 ‘황도사상과 일본 신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였다. 임종국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해방 직후 미군정 및 우익의 입장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해방 직후에 제기된 의혹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철저히 1980년대의 사상적 분위기, 즉 민족적ㆍ실천적 관점 위에서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이후 여운형은 ‘민족과 사상을 초월한 민족주의자’로서 그 입지를 분명히 했다. 2005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2008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사실은 오늘날 여운형이 어떤 위상을 점하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9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간행을 추진하자 여운형에 대한 친일 의혹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반대하는 보수진영이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직접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보수진영이 여운형을 거론한 이유는 분명했다. 친일인물 선정이 좌편향적이므로 좌우를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나 김성수 같은 우파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다면 좌파 계열이었던 여운형도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수진영의 생각은 『신동아』에 실린 정진석(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의 글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진석은 『경성일보』와 『대동신문』을 근거로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열거한다. 그에 따르면, 여운형은 『경성일보』에 학병 권유 논설을 썼을 뿐 아니라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각주:1] 정진석은 글머리에 이런 사실들을 열거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운형의 글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친일논란의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글이 여운형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친일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일본 강점 시기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의 명단에 포함된 인물 가운데는 친일의 과오에 비해 독립운동, 항일언론 문화 활동 등의 공적이 현저히 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친일의 흔적이 뚜렷한 여운형은 처음부터 검토 대상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 대해선 추상같은 검찰관의 자세로 애매한 혐의까지 과도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단죄하는 한편, 좌파에 대해서는 변호사 입장으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눈감아준다는 의혹을 살 수 있다. (정진석, 「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신동아』 2010년 1월호)

 

다른 사람의 친일 행위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친일 혐의가 뚜렷한 여운형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는 정진석의 논리는 보수진영의 생각을 정확히 대변한다. 실제로 그의 논리는 보수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여운형의 친일 혐의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과정에서 호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누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했는지를 크게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이 중에서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②, ③, ④의 경우다. 첫 번째 사례는 여운형의 외교 노선에 관한 임정 요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머지 사례들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뒷받침하는 근거의 문제점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여운형의 친일 혐의는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여운형이라는 인물이 한국 현대사에서 점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 제기된 여운형 친일 의혹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춘 데다 한국의 정치적 문제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에게 제기된 친일 의혹은 타당한 것인가?

 

여운형에게 제기된 친일 혐의가 타당한 것인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근거의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으면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사실만으로 여운형을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대상은 『경성일보』와 『대동신문』이다. 두 신문에 실린 기사들이야말로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여운형의 친일 의혹을 입증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 근거 자체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지는 않은 듯하다. 

 

일단 여운형이 썼다는 학병 권유 논설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경성일보』의 논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논설이 발표된 시점이 1944년이라는 점이다. 이 시기는 전시체제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작동하면서 황민화정책과 전시동원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의 언론이 중립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경성일보』는 1930년대부터 총독부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한 마디로 ‘어용신문’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 신문사가 1930~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경성일보』의 논설을 섣불리 여운형 친일 혐의의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오히려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의 한 기사는 여운형의 학병 권유 논설이 날조된 것이라는 증언을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 권장 유세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 면담 6-7분 만에 밖으로 나왔다.” 이 증언은 1944년 당시 경성일보사 사회부 기자였던 조반상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 그는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학병을 권장하는 유세를 요구할 때 통역으로 동석했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여운형은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은밀히 항일단체 결성을 준비하고 이듬해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건국동맹은 지하에서 활동하던 항일단체로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여 무장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조반상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운형의 학병 권유 논설은 어떻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일까? 그의 논설이 위조된 것임에도 대중에게 유포되어 영향을 미쳤다면, 어떤 경로로 유포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그 경로를 추적하면 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운형 친일 의혹이 제기된 시점이 학병 권유 논설이 발표될 당시가 아니라 해방 이후라는 점이다. 즉,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비난했던 이들은 논설의 원본을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근거로 삼은 것은 『대동신문』의 보도였다. 『대동신문』은 여운형이 학병 권유 논설을 발표했다거나 전향서와 친일적 한시를 썼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보도했다. 이 같은 내용의 기사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의심했던 우익 세력에게 충분한 근거를 제공했다. 또, 2000년대 이후 보수진영이 여운형 친일 의혹을 제기하며 제시한 근거 역시 이 기사들이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는 데 활용된 근거는 모두 『대동신문』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동신문』이 어떤 신문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동신문』은 독립운동에서 친일협력으로 삶의 궤적을 바꿨던 이종영(李鍾榮)이 1945년 11월 25일 창간한 신문으로, “우익테러를 공공연히 선동”했던 “격렬한 반공극우지”였다. 심지어 “공격의 초점이 좌익세력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우익세력들에게도 돌리어져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우익계열의 신문사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여운형이 친일행위를 일삼았다는 『대동신문』의 기사는 정치적인 의도 속에서 보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물론 여운형이 전향서에 서명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향서에 서명한 시점이 1943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1940년대 초 일본행에 나선 여운형은 귀국하자마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투옥되었고, 1943년 7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여운형은 신경쇠약에 걸려 곧바로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다. 그가 전향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그러므로 여운형이 전향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섣부른 결론이다. 그가 놓였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이듬해 항일단체인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던 사실을 함께 생각하면 그런 결론을 간단히 내리기는 어렵다. 일제의 어용단체와의 관계를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조선대아세아협회의 구성원으로 여운형이 추천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추천을 받았을 뿐 실제 활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발회식에 참석했다는 점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는 이후에도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친일파의 개량화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그가 몸담던 『조선중앙일보』 역시 그런 논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여운형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이런 주장들은 정치적인 의도 위에서 파편화된 사실만을 강조할 뿐이다. 그 사실이 어떤 자료에서 도출된 것인지, 그 자료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접근이 그리 역사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여운형은 ‘사상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2016년 1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전공 수업 '한국 현대사'에서 발제문으로 작성한 글임

 

  1.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 /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 /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 /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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