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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by 衍坡 2018. 4. 14.

수탈론과 근대화론에서 본 식민지 공업화와 그 한계

 

 

 

1. 식민지 경제를 보는 두 가지 시선 : 수탈과 근대화

 

한국에서 ‘근대화’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항 이후 등장한 문명개화론부터 개발독재시대에 국시로 자리 잡은 ‘조국 근대화’의 기치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근대화는 한국 사회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였다.[각주:1] 비록 한국에서 근대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은 사람마다, 또는 시대마다 제각기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이때 서구화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체를 수립하는 것이나 만국공법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수용하자는 생각은 모두 조선에 서구적인 근대를 구현하려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비단 정치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근대 정치체제가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등장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각주:2]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근대화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각주:3]

 

한국의 근대화는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 관해 매우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은 식민지배라는 특이한 역사적 현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므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 근대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일제의 침략은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짓밟은 행위였는가? 혹시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일제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이식된 것이었는가? 궁극적으로 식민지 시기는 수탈의 시대였는가, 아니면 문명화를 이룩한 ‘대전환’의 시기였는가?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논쟁의 기본적인 구도는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각주:4] 물론 두 관점 안에서도 연구자마다 생각의 편차가 있지만, 두 입장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논리구조는 매우 다르다.[각주:5] 한국사 연구자들이 대개 앞의 관점을 지지하는 반면, 1980년대 이후 식민지 개발에 주목한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주로 뒤의 입장에서 식민지 경제를 이해한다.

 

식민지 수탈론은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과 맞닿아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에서는 정체성론, 타율성론, 당파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맥락에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었다.[각주:6] 내재적 발전론은 자의(字意) 그대로 한국 내부에서 역사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19세기 이전의 한국은 근대의 맹아가 싹트던 역동적인 사회였고, 외세의 영향 없이도 자주적인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역량이 축적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려는 한국인들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민족차별과 수탈을 자행하는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한국인에 의한 생산력 발전은 제한적이었고, 성장의 결과물은 일본에 의해 수탈되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근대화를 위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해야 했다. 이런 ‘수탈과 저항’의 도식이 바로 식민지 수탈론의 기본적인 논리구조이다. 

 

식민지 수탈론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일부 경제사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에 직면했다.[각주:7] 이들은 먼저 19세기 이전의 한국에 자본주의의 싹이 발생하였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고 나섰다.

 

결국 그(한국) 학자들은 오렌지밭에서 사과를 찾는 부질없는 노력에 경도되어 있는 듯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씨왕조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문제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한국인들의 대단히 특수한 민족주의적 편견과 그것이 한국의 실제 역사와 거의 무관했던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한에서 중요할 뿐이다. …… 한국에서 근대 공업기술은 수입된 것이지 발명된 것이 아니다. 진정 우리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1876년 이후일 뿐이다.[각주:8]

 

이런 주장은 식민지 수탈론의 전제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생한 것이 아니라 수입된 것이라는 이들의 생각은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진다. 이 생각에 따르면, 일제는 단지 수탈의 주체가 아니라 ‘식민지 개발자’였다. 일제는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한국에 근대적 제도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각종 사회간접시설(infrastructure)을 건설했다. 한국인들은 수탈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개발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근대적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였다. 한국인들은 이 과정에서 근대적 역량을 축적했고, 이는 해방 이후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같은 일부 경제사학자들의 생각은 ‘수탈과 저항’이라는 도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식민지 근대화에서 한국인의 역할을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1990년대 이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기존의 논쟁 자체를 비판하는 입장도 등장했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모두 ‘근대성’에 집착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비판은 근대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논쟁의 지형 자체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의 논쟁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 듯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두 축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 글은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염두에 두면서 식민지기 공업화 문제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식민지 공업에 관한 두 입장 사이의 쟁점을 소개하고,「조선의 공업화 문제」라는 1934년 5월 9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을 분석할 것이다.

 

 

2. 식민지 공업을 둘러싼 쟁점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각주:9] 그 이전에도 한국의 공업화가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0년대의 경우, 일제가 한국에 부여한 역할은 “염가의 곡물 공급”과 “일본 공업제품의 시장”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에 도로나 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게다가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상공업을 식민지 체제 안으로 재편하기 위해 회사령을 실시하였다.[각주:10] 이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규제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 공업화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1920년대 들어 한국의 공업화가 조금씩 진전되기는 했지만, 한국의 기본적인 기능은 “농업식민지”였다. 이 시기 일제 식민통치의 초점은 일본에서 부족한 쌀을 공급하는 것에 있었고, 이에 맞게 대부분의 개발자금은 농업 진흥에 투자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업투자는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은 1930년대가 되면서 크게 달라졌다. 일제는 이제 한국의 농업이 아니라 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박일은 여기에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산미증식계획의 중단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쌀 공급이 안정을 찾아가고 30년대가 되면 쌀 공급이 과잉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한국에서 쌀 생산에 집중해야 할 이유가 약해졌다. 둘째, 아시아 침략이라는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다. 일제는 광대한 만주 시장이 조선공업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고, 일제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농업보다 공업에 더 집중적으로 투자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대공황 이후 경제침체를 맞은 일본정부는 통제경제 체제로 이행하였다. 이는 일본 국내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규제하는 것이었으므로 기업은 일본 외부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다수의 일본 기업이 한국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가장 활발하게 투자된 부분은 면ㆍ섬유 공업과 군수산업이었다. 이 결과 1931년부터 1838년 사이 공업생산 평균성장율은 12.9%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제시기 공업화 문제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식민지 공업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즉, 한국의 공업화는 그저 일본의 침략정책을 위한 기만적인 현상이었는가, 아니면 한국 자본주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에 관해 박현채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달한 식민지 조선의 공업은 침략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의 자본이 유입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한국의 공업화는 민족자본을 육성하기는커녕 한국인이 경영하던 중소기업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반면, 안병직과 호리는 박현채와 의견을 달리한다. 일제가 주도한 공업화 정책은 조선 내의 산업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자본과 한국의 자본을 대립관계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양자 사이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 자본이 한국 공업화와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과 그에 관한 한국인의 대응을 강조하는 것이다. 

 

박현채와 안병직ㆍ호리 사이의 상반된 입장은 결국 식민지시기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박현채는 일제와 민족을 서로 대립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식민지기를 ‘수탈과 저항’으로 보는 식민지 수탈론을 대변한다. 반면 안병직과 호리는 일제가한국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해 근대적 역량을 축적해 나간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변한다. 결국 양측의 입장은 식민지 공업화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쟁점은, 일제가 주도한 공업화는 민족 자본 몰락과 자본주의 발달 중 어느 쪽으로 귀결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3. 전시체제기 식민지 공업의 단면 : 「조선의 공업화 문제」

 

식민지 경제가 민감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해방 이후 한국의 사회ㆍ경제와 긴밀하게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쟁의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두 관점 모두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를 호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사학이 시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지 식민지 경제가 산출해낸 결과 값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이 식민지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1934년 5월 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설 「조선의 공업화 문제」를 읽고 당시 사람들의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따져보려고 한다.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이 사설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공업화 사설

▲『조선일보』 1934년 5월 9일자 조간 1면에 실린 사설

 

 

이 사설의 주장은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논지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공업화 문제에 관해서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조선이 농업식민지이므로 공업 발달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도 반드시 공업화를 이뤄 자본주의화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중에서 후자가 정설이 된 듯하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최근 10년 동안 조선의 공업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932년(소화 7년) 말 조선에 거주하는 인구는 2000만 명인데, 그 중 공업인구는 23%에 해당하는 470만 명이다. 조선의 총 생산액은 40억 원 중 32%에 해당하는 8억 1천만 원이다. 이것은 1913년(대정 2년)에 비하면 14~15%가 증가한 액수이다. 약 20년 만에 조선의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최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조선의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품목으로 보면 경성의 방직업, 평양의 고무 및 양말 공업, 북쪽 지역의 질소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아마도 만주가 안정을 되찾고 수요가 증가하면 조선의 공업은 더욱 발달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발달한 공업을 보면 공업 그 자체라기보다 농업에 필요한 제품이나 군수품을 생산하는 데 머물러 있다. 물론 방직, 고무, 전기 같은 순수한 공업도 있지만, 이것은 전체 생산량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선은 아직 일본의 공업생산품을 파는 시장일 뿐이지, 공업품 생산지는 아니다. 일본은 아직도 농업진흥책을 강조하면서 공업진흥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만주가 안정을 되찾으면 조선이 공업화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만주도 독립하려면 자신들의 공업을 발전시킬 것이다. 만주는 조선보다 공업화하기에 훨씬 유리하다. 물론 조선도 원료와 임금이 싸다는 점을 이용하여 공업을 발전시킬 수는 있겠지만, 조선이 주도적으로 본격적인 공업을 발달시키려면 아직도 많은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 사설은 당시 식민지의 한국인들에게 공업화가 매우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기사만으로 한국의 공업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공업화의 현실과 전망을 담은 이 사설에서 식민지기 한국의 공업화가 대략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관한 단서를 얻을 수는 있다. 

 

첫째,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도 공업화는 이루어졌다. 기사에 제시된 통계자료만 보면, 약 20년 동안 조선의 공업인구와 공업생산액은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공업화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기사에서는 이 통계를 ‘전조선인구’와 ‘전조선생산액’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한반도 내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을 통틀어 낸 통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사만으로 섣불리 조선인이 공업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인이 식민지기 한국 공업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34년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총 56만여 명이었다.[각주:11] 가령 모든 재조일본인을 공업인구에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4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공업 인구로 파악된다. 물론 기사에서 인용된 통계의 출처를 따져봐야겠지만, 일제가 주도한 공업화에 한국인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식민지기 공업화가 전적으로 일본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둘째,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는 어디까지나 일제에 의해 그 규모와 목적이 설정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사를 보면 한국에서 특히 발달한 공업은 농업에 필요한 품목이나 군수품을 생산하는 산업이었다. 이는 1920년대 이래 일제의 기본적인 정책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달한 것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대륙침략이 조선 공업의 전체적인 규모와 특징을 규정한 것이다. 물론 면직 공업이 발달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일제의 산업과 관련이 있었다.[각주:12] 이런 조건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공업화에서 한국인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일제시기 한국의 공업화는 어디까지나 일제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모두 일제시기 사회ㆍ경제적 측면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민족이나 통계라는 하나의 프리즘으로 식민지의 복잡한 사회ㆍ경제적 측면 중 일면만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식민지기 사회ㆍ경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나는 당대의 역사적 컨텍스트를 좀 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 식민지가 생산해 낸 결과물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 공업화가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동시대의 어떤 변수와 맞물리며 발전 혹은 굴절하는지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2학기 '한국 근대사' 수업에서 보고서로 제출한 글임

 

 

  1. 엄밀히 말하면 조선ㆍ대한제국ㆍ식민지 조선ㆍ대한민국 등의 명칭을 모두 한국으로 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각 명칭은 서로 다른 정체성과 역사적 조건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국을 19세기 이래로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면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본문으로]
  2. 자본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계는 , 2012, 「로크, 자유주의 시민정부의 한계―자유주의 정치학」, 『다시 쓰는 서양 근대철학사』, 오월의 봄 참조. [본문으로]
  3. 이런 사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가 싹텄다는 이 주장은 조선 사회가 근대로 이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여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근대화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화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는 무엇일까? 이영훈은 영국의 사례에서 자본주의화의 지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①농업과 공업의 분리, ②개인의 배타적 토지소유권 확립, ③합리적 개인의 탄생, ④자율적인 시장경제의 성립, ⑤세계시장ㆍ세계체제의 성립(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21-1.) [본문으로]
  4.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명칭이 꼭 적절한 명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이름들은 식민지 근대화 논쟁 과정에서 서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은 마치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식민지배를 옹호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를 대표하는 안병직은 자신들의 이론을 ‘경제발전론’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보았다.(안병직, 1997,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창작과 비평』) 하지만 이미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본문으로]
  5. 두 입장에 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논의는 정연태, 2011,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 푸른역사 참조. [본문으로]
  6.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헌창, 2007,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한국사시민강좌』, 일조각 참조. [본문으로]
  7.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허수열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의 결론은 식민지 수탈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허수열, 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참조.) 그래서 이 글에서는 허수열의 논의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8. 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이영훈, 1996,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9.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와 그에 관한 논쟁은 주로 박일, 1997, 「식민지 공업화를 보는 관점 : 식민지 조선 공업화론의 재검토」, 『한국학연구』 9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별도의 각주가 없는 한 이 논문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본문으로]
  10. 전우용, 1997, 「1910년대 객주 통제와 ‘朝鮮會社令’」, 『역사문제연구』2. [본문으로]
  11. 이규수, 2011, 「‘재조일본인’ 연구와 ‘식민지수탈론’」, 『일본역사연구』 33. [본문으로]
  12.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박일, 1997, 앞의 논문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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