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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by 衍坡 2018. 4. 13.

독도 영유권 문제 다시 보기

- 영유권 발생 시기에 관한 비판적 검토 -

 

 

 

프롤로그

 

1952년 1월 28일,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한 영토인데도 한국 정부가 불법점거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독도 영유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논쟁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해왔다. 하나는 독도를 울릉도로 도항하는 정박장 및 어업구역으로 활용하면서 늦어도 17세기에 자신들의 영유권을 확립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00년대까지 주인이 없던 섬을 1904년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한국 측은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왜 한국의 영토일 수밖에 없는지를 입증하려고 했다.

 

한국 측은 역사적 기록에 나타나는 우산국ㆍ우릉도ㆍ울릉도ㆍ삼봉도 등의 명칭이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독도가 고대부터 줄곧 한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해왔다.[각주:1] 한국 측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신라 때부터 독도와 울릉도는 한국의 영토였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512년에 울릉도와 독도를 정복하면서 이 지역에 통치권을 확립했다. 신라가 울릉도와 독도에 지방행정구역인 주와 현을 설치하여 자국의 국토로 삼은 것이 그 증거다. 이때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에 지배권을 행사했다. 물론 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간접통치를 실시했지만, 고려 현종 대부터는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고려 인종 대에 울릉도ㆍ독도에 관리를 파견했던 것이 그 증거이다. 이것은 울릉도ㆍ독도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음을 입증한다. 여전히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의 영토였다.’

 

울릉도ㆍ독도가 신라와 고려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는 논리는 조선시대로까지 이어진다. ‘조선 국왕 태종이 울릉도ㆍ독도에 통치권을 행사했던 사실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독도는 한국의 영토였다. 조선 초기에 왜구가 빈번하게 침략하자 태종은 우산도에 쇄환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울릉도ㆍ독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ㆍ독도에 주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계속 통치권을 행사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울릉도ㆍ독도가 행정구역상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땅이라고 밝혔다.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울릉도ㆍ독도에 관한 조선 정부의 지배권이 흔들리기는 했다. 이때 일본의 어부가 울릉도와 독도 일대에 출몰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ㆍ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주기적으로 수토사를 파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울릉도ㆍ독도에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안용복이 우산도를 수호한 것도 그런 사실을 명백히 입증한다.’

 

이사부가 울릉도ㆍ독도를 정복한 이래로 독도가 줄곧 한국의 영토였다는 논리는 한국에서 상식에 가깝다. 그런데 정말 독도가 신라시대부터 한국의 ‘영토’였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현재의 ‘영토’ 개념을 과연 1500년 전까지 소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토’는 한 나라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적 범위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영토는 한 국가의 배타적인 통치권ㆍ영유권이 행사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권ㆍ영토 개념은 고대부터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18세기 이후에야 등장했고, 한국에는 19세기에야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전근대의 국토인식과 근대의 영토관념을 같은 것으로 전제하고 독도 영유권을 최대한 멀리까지 끌어올리는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영토 개념을 무작정 근대 이전의 역사에 투영할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산국, 우산도, 삼봉도, 우릉도 등 울릉도ㆍ독도를 지칭한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명칭이 정말 울릉도와 독도를 지칭하는 것인가, 지칭한다면 이 명칭이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지칭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이 글에서 다루려는 내용과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이므로 일단 역사적 기록에 나타나는 다양한 명칭이 울릉도ㆍ독도를 함께 지칭한다고 전제한다.)

 

 

독도 전경

▲독도 전경

 

 

신라는 독도에 영유권을 행사했을까?

 

『삼국사기』는 우산국(울릉도ㆍ독도를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 관한 기사 두 편을 전한다.

 

  (지증왕) 13년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 (우산국 사람들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우나 꾀로는 복속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의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각주:2]

 

  (지증왕) 13년 임진(壬辰)에 이르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의 병합을 계획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 복종시켜 항복받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복속시키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랐다. 거짓으로 고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각주:3]

 

『삼국사기』에 실린 두 편의 글을 보면, 이사부는 512년에 울릉도ㆍ독도를 정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신라가 울릉도ㆍ독도에 주현(州縣), 즉 지방행정구역을 설치함으로써 자국의 영토로 삼았다는 논리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는 사실만으로 신라가 울릉도ㆍ독도에 지방행정구역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울릉도ㆍ독도를 신라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편입했을 가능성은 적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서도 우산국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전하지 않는다. 우산국에 관한 언급은 위에 인용한 두 건의 기사가 전부인데, 두 기록에서도 우산국이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신라가 울릉도ㆍ독도에 군현을 설치하여 배타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라는 기록에는, “왕이 동해 가운데에 우릉도(羽陵島)란 섬이 있는데 지역이 넓고 토질도 비옥하여 옛날에는 주(州)ㆍ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관리를 보내 시찰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각주:4] 여기서 ‘옛날’이 신라 때를 의미하면, 울릉도ㆍ독도에 지방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그 ‘옛날’의 시점이 분명하지 않고, 왕이 처음에 보고받았던 우릉도의 정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신라가 울릉도ㆍ독도에 지방행정구역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산국이 항복한 뒤로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을 미루어보면, 신라가 우산국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신라의 중앙정부는 전국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 마을 촌주의 자치력에 의존하여 지방을 통치했고,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주요지역에 소경(小京)이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관리를 파견하고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울릉도ㆍ독도를 직접 통치했다거나 주권을 행사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사부

▲후대에 제작된 이사부의 초상화와 기념비

 

 

고려 조정은 독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고려사』에서 울릉도ㆍ독도가 처음 언급되는 것은 태조 13년(930년) 8월의 기록에서다.[각주:5]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고려에 보내 조공했다고 한다. 고려는 이들에게 각각 ‘정위’(正位)와 ‘정조’(正朝)라는 7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렸다. 이 벼슬들은 중국의 관직 체계가 고려에 수용되기 이전에 수여하던 고려식 벼슬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건국된 뒤 지방 호족을 포섭하려는 목적에서 제수되었지만, 반드시 국내인에게만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고려식 벼슬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들을 고려로 포섭하려는 목적에서였다.[각주:6] 그렇다면 고려 때 우산국 사람들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고려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에 조공하기 위해 온 백길과 토두를 우릉도에서 보낸 ‘사신’이라고 기록했다.[각주:7] 사신이 “임금이나 국가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사절로 가는 신하”라는 것을 생각하면, 고려와 우릉도의 관계는 중앙정부와 지방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려 현종 대의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 현종 때 여진족이 우릉도에 침략하여 그곳의 주민이 고려로 피난을 온 적이 있는데, 고려는 피난민을 우릉도로 돌려보냈다.[각주:8] 그 이유는 우릉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고려의 주민과 구분되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고려로 넘어온 우릉도 사람을 고려의 호적에 편입했다는 기록도 간혹 보이는데,[각주:9] 뒤집어 생각하면 우릉도 주민이 고려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고려와 우릉도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관계는 수직적ㆍ계서(階序)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우산국을 자국의 영역에 직접 편입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간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고려와 우산국의 관계는 고려 인종ㆍ의종 대에 이르러 크게 달라졌다. 이 무렵 고려는 울릉도ㆍ독도를 자국의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 19년(1141년), 명주도 감창사 이양실(李陽實)이 사람을 보내 우릉도를 살펴보게 했는데, 이것은 그 이전에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각주:10]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초기와 달리 지방통치체제가 정비되면서 우릉도를 자국의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릉도에 관한 인식의 변화는 우릉도에 고려의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개척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의종 11년 5월, 고려 조정은 우릉도에 백성을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관리를 보내 사전조사를 하게 했다. 하지만 우릉도를 살펴본 관리가 “암석이 많아서 백성이 살 수 없다”고 보고하자 백성을 이주시키려는 논의를 그만두었다.[각주:11] 이후 무신집권기에도 우산도 일대에 백성을 이주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풍랑과 파도가 험악하여 익사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백성을 거주시키는 일을 중단”했다.[각주:12]

 

지금까지 독도가 고려의 영토였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는 고려의 중앙정부가 울릉도ㆍ독도 일대에 백성을 이주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울릉도ㆍ독도 일대에 백성을 이주시키려는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전히 중앙정부는 울릉도ㆍ독도 일대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직접 통치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고려의 중앙정부가 울릉도ㆍ독도 일대에 지방행정구역을 설치하여 지속적인 통치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관념상 고려의 영역과 실질적 통치구역으로서 고려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근대적인 영토 관념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조선 초기 쇄환정책의 의미

 

조선 초기에 중앙정부가 섬 지역에 취한 조치는 쇄환정책이었다. 이것은 공도정책이라고도 하는데, 섬에 거주하는 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조선 정부가 섬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려했던 일차적인 이유는 왜구 때문이었다.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부터 섬의 주민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왜구의 침략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왜구는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ㆍ황해도는 물론 조선 주변의 섬에도 빈번하게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쇄환정책은 조선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영유권의 문제에서 쇄환정책을 바라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오늘날 영토 개념을 전제하면, 조선 조정의 선택은 이해하기 어렵다. 독도가 조선의 고유영토라면 조선 정부는 울릉도ㆍ독도 일대를 어떻게든 지켜내야만 했다. 따라서 쇄환정책보다 군대를 주둔시키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이 경우 조선 조정은 왜 울릉도ㆍ독도 일대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혹 “주민들이 군대를 싫어하여 오래 주둔시킬 수가 없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우산도에 관한 조선의 영향력이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 해석이 타당하더라도, 충분한 설명이 되기는 어렵다. 조선 조정에서 쇄환정책을 선택한 것은 주민의 안위뿐 아니라 ‘요역’(徭役)의 문제도 함께 고려했기 때문이다. 요역이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하던 것으로 전근대적인 조세 수취의 일환이었다. 국가에서 궁궐을 짓거나 성을 쌓을 때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한 것이 대표적인 요역의 사례이다. 이 문제는 주민의 안위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조선의 태종은 이 문제를 두고 신하들과 울릉도ㆍ독도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이 타당한지 논의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신하들은 울릉도ㆍ독도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주민에게 곡식과 농기구를 주어 안정된 삶을 살게 하고, 관리를 보내 공납을 바치게 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유독 황희만 울릉도ㆍ독도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은 황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태종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울릉도ㆍ독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을 피해서 편하게 살아왔다. 만일 그 섬에 다시 공납을 납부하게 하고 관리를 둔다면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서 숨어 살 것이다. 그러니 그곳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각주:13]

 

울릉도ㆍ독도의 주민이 요역을 피해 편안히 살아왔다는 태종의 논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역이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취하던 조세제도의 한 방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로서는 조세제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륙 사람들이 요역을 피해 우산도로 숨어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각주:14] 이것은 울릉도ㆍ독도에서 조세 징수나 요역 징발이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울릉도ㆍ독도는 국가의 행정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정부의 쇄환정책은 울릉도ㆍ독도 주민을 국가 행정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 이주시키려는 목적에서 시행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울릉도ㆍ독도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조선의 국토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섬들은 조선의 국토로 인식되었다. 다만 실제로는 국가의 영향력이 제대로 행사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은 관념상 조선의 국토와 실질적 통치구역으로서의 조선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조선 정부 안에서는 두 가지를 서로 일치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종종 나오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각주:15]

 

공도정책 쇄환 논의

『태종실록』에서 울릉도ㆍ독도 주민의 쇄환문제를 논의하는 부분

 

 

조선 후기 섬의 위상 변화와 수토사 파견의 실상

 

조선 후기 국토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왕의 교화가 얼마나 잘 미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섬 지역은 왕의 교화가 미치기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섬 지역은 늘 ‘왕의 교화가 닿지 않는 먼 바닷가의 땅’이었다.[각주:16] 그런데 왕의 교화가 얼마나 잘 미칠수 있는가의 문제는 지방관의 통치력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행사되는가에 달려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방관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은 왕의 명령과 교화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섬은 국왕의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제대로 행사될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각주:17]

 

그런데 17세기 말부터는 섬 지역의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주로 군사적ㆍ경제적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민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 즉 해금정책을 철회했다. 청나라의 조치는 즉각 조선에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의 해적선이나 어업선이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자 조선 정부는 치안 유지를 위해서라도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무렵 조선 정부는 섬의 재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가 재정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각주:18] 이러한 변화는 섬에 대한 인식과 정책에 변화를 불러왔다. 섬은 ‘재부(財富)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섬 지역에 군사시설이나 지방행정기구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울릉도ㆍ독도 일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울릉도와 독도에 실제로 군사시설이나 지방행정기구가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17세기 말에도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울릉도ㆍ독도까지 미치지 못했다. 물론 조선 정부는 숙종 연간부터 공식적으로 2~3년마다 울릉도ㆍ독도 지역에 수토사를 파견했다. 지금까지 수토사 파견은 울릉도ㆍ독도가 조선의 영토이며 조선이 울릉도ㆍ독도를 실제로 통치한 증거로 여겨졌다. 하지만 수토제의 명칭과 실상을 검토하면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문맥상 수토사의 ‘수토’(搜討)는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찾기 위하여 조사한다’는 의미다. 영토를 지키거나 실질적인 통치행위를 하는 관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수토사는 울릉도ㆍ독도의 산물과 수목 등을 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각주:19] 물론 울릉도ㆍ독도의 산물(産物)을 조사하는 행위는 그 곳이 조선의 국토로 인식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여전히 울릉도ㆍ독도에는 국가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원칙상 2~3년 주기로 정해져있던 수토사 파견이 200년 동안 꾸준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각주:20] 울릉도ㆍ독도는 분명히 조선의 국토였지만, 중앙정부의 배타적인 주권이 행사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영토 개념을 전제하여 조선이 울릉도ㆍ독도에 영유권을 행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적 영토인식의 등장과 독도 영유권의 확립

 

19세기 말부터는 그 이전과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1895년(고종 32)에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이 ‘울릉도에 도감(島監)을 두는 안건’을 올려 고종이 재가했다.[각주:21] 조선 정부는 곧 울릉도 주민 중에서 도감을 임명했다. 도감은 울릉도의 남녀 인구, 호구의 수, 토지 등을 조사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각주:22] 4년이 지나 1899년(광무 3)이 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아예 울릉도를 울릉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직접 군수를 파견했다.[각주:23] 이런 사실은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정부의 통치방식이 그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즉, 19세기 말부터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울릉도ㆍ독도에 직접 행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ㆍ독도의 벌채권을 독점하는 등 배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그것은 『독립신문』에 실린 몇 가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4월에는 울릉도 주민들이 그 지역의 나무를 베기 위해 중앙정부의 허가를 요청해야 했다.[각주:24] 울릉도감은 정부가 무단으로 울릉도의 나무를 벌채하는 일본인에 대한 조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각주:25]이 두 사례는 대한제국 정부가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배타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립신문 울릉도 벌채

울릉도 나무 벌채와 관련된 『독립신문』의 기사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ㆍ독도에도 배타적 주권을 행사했고, 그 과정에서 군을 설치하여 군수를 파견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영토 개념과 비교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은 사실상 19세기에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영유권은 근대적 의미의 영유권을 말한다. 이 시기에 독도 영유권이 확립된 데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선은 서구의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 사회로 진입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근대국가의 개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근대국가는 세계사적으로 18세기 말부터 등장했는데, 흔히 ‘국민국가’라고 불리기도 한다.[각주:26] 이때 국민(people)은 전근대적 의미의 민(民)과 달리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통합하면서 형성된 단일한 공동체를 의미한다.[각주:27] 오늘날의 ‘국민’ 개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근대국가가 ‘하나의 합의체’로 표현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각주:28] 동시에 근대국가는 다른 세력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영토의 경계를 만들어내면서 등장했다. 이 배타적인 영토 안에서 주권(sovereignty)이라는 개념은 국가라는 단일한 통합체에 작동하면서 그것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각주:29] 이러한 서구의 근대정치사상은 1900년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의 지식인에게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대한제국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석하(崔錫夏)의 글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고 있다.

 

옛날부터 국가의 정의(定義)에 대해 학자들의 논의가 같지 않지만, 금일 문명한 나라들에서 통용되는 학설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일정한 토지를 보유하고 또 권력으로써 통일하는 인민의 단체”라는 것이다. 이 정의를 분석하면 국가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토지이다. 수천만인이 공동으로 단체를 결합하더라도 일정한 영토가 없으면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 두 번째는 권력이다. 일정한 토지가 있고 숫자가 많은 민족이 있더라도 이것을 통치하는 주권자가 없으면 국가가 아니다. …… 세 번째는 인민의 단체다. 이는 사회에 무수한 단체들이 존재했지만, 국가는 단순한 단체가 아니며 일정한 토지와 권력으로 조성한 단체인 것이다.[각주:30]

 

*밑줄 및 강조는 인용자

 

최석하의 글은 대한제국기의 국가 및 영토인식이 근대적인 국가ㆍ영토 개념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국가적인 영토가 등장하고, 왕조국가가 단일한 주권국가로 변화하며, 인민(국민)이라는 동질적 집합체가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1900년 이후 신문에서는 ‘영토’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국가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존재의 혼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통합체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울릉도ㆍ독도는 중앙정부의 배타적인 주권이 행사되는 한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랫동안 울릉도ㆍ독도에 간헐적으로 행사되던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19세기 말에 근대적 영유권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독도가 한국 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각 시대의 역사적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상식과 사회적 요구를 그대로 역사에 투영하는 역사인식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역사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아왔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필요에 부합하는, 우리의 상식과 유사한 사실만 찾아내 성급하게 일반화했던 것은 아닐까. 과거의 사실들이 놓인 역사적 맥락과 조건을 무시한 채 말이다.

 

한국이 고대부터 독도에 영유권을 행사했다는 상식도 그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영유권은 오늘날의 주권ㆍ영토 개념을 전제한다. 그런데 정작 근대 이전에 한반도를 통치했던 왕조들은 독도에 배타적인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가졌던 국토인식이 근대적인 영토관념과 같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독도 영유권은 오히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확립된 역사적 산물이었다. 물론 울릉도ㆍ독도가 19세기 이전까지 한국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전근대의 국토인식과 근대의 영토관념, 전근대의 통치행위와 근대의 통치행위, 전근대의 국가권력과 근대의 국가권력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그 이면에 놓인 역사적 조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연 독도가 512년부터 한국의 ‘영토’였을까? 한국이 고대부터 독도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상식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독도 영유권의 발생 시기를 무리하게 끌어올린 결과물이다. 독도 영유권의 발생 시기를 소급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상식과 목적을 전근대 역사에 일방적으로 투영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맥락과 조건의 차이는 깨끗이 지워졌다. 그 결과 현재의 독도 영유권 문제가 마치 본래 과거부터 존재했던 선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문제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 이 글은 2013년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학술제에서 발표한 글을 대학 교지 대학문화 2017년 봄호에 싣기 위해 고쳐 쓴 것임

 

 

  1. 우산국이 울릉도ㆍ독도를 포괄하는 개념임을 밝히고, 그것을 전제로 삼아 독도가 고대부터 한국의 영토였음을 주장한 대표적인 글은 신용하의 논문이다. ( 신용하, 1991, 「한국의 고유영토로서의 독도 영유에 대한 역사적 연구」, 『사회와 역사』 27, 1991; 신용하, 1998, 「독도·울릉도의 명칭변화 연구: 명칭 변화를 통해 본 독도의 한국고유영토 증명」, 『한국학보』 24, 1998.) [본문으로]
  2. 『삼국사기』,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본문으로]
  3. 『삼국사기』, 열전4, 이사부열전. [본문으로]
  4. 『고려사』(권11),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5월 날짜미상; 『고려사절요』(권11), 의종 11년(1157년) 5월. [본문으로]
  5.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13년(930년) 8월 15일. [본문으로]
  6. 김갑동, 1988, 「고려초기 官階의 성립과 그 의미」, 『역사학보』 117. [본문으로]
  7. 『고려사절요』(권1), 태조 13년(930년) 8월. [본문으로]
  8. 『고려사』(권4), 세가4, 현종 10년(1019년) 7월 24일. [본문으로]
  9. 『고려사』(권4), 세가4, 현종 13년(1022년) 7월 8일. [본문으로]
  10. 『고려사』(권17), 세가17, 인종 19년(1165년) 7월 날짜미상. [본문으로]
  11. 『고려사』(권18),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5월 12일. [본문으로]
  12. 『고려사』(권129), 열전42(반역3), 최충헌열전부최이열전. [본문으로]
  13. 『태종실록』 태종 17년(1417년) 2월 8일. [본문으로]
  14.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9월 2일; 『세종실록』, 세종 7년(1425년) 10월 20일. [본문으로]
  15. 우산도에 현읍(縣邑)을 설치하자는 주장은 누차 제기되어 왔지만, 이루어진 적은 없다. (『세종실록』(권73), 세종 18년(1436년) 윤6월 19일; 『세조실록』(권7), 세조 3년(1457년) 4월 16일) [본문으로]
  16. 배우성, 1997, 「조선후기 연해 ․ 도서지역에 대한 국가의 인식 변화」, 『도서문화』 15. [본문으로]
  17. 배우성, 앞의 글. [본문으로]
  18. 배우성, 앞의 글. [본문으로]
  19. 『정조실록』(권40), 정조 18년(1794년) 6월 3일. [본문으로]
  20. 배재홍, 2011,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 운용의 실상」, 『대구사학』 103. [본문으로]
  21. 『고종실록』 고종 32년(1895년) 8월 16일(음력). [본문으로]
  22. 『독립신문』1897.04.06. ; 1897.04.08. [본문으로]
  23. 『고종실록』 광무 4년(1900년) 10월 25일(양력). [본문으로]
  24. 『독립신문』1899.04.14. [본문으로]
  25. 『독립신문』1899.09.13. [본문으로]
  26. 에릭 홉스봄, 정도영 역, 1998, 『자본의 시대』, 한길사, 197~201면. [본문으로]
  27. 이진경, 2010, 『역사의 공간』, 휴머니스트, 238면. [본문으로]
  28. 토마스 홉스, 최공웅 ․ 최진원 역, 『리바이어던』, 동서문화사, 2009, 176면. [본문으로]
  29. 고병권, 201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54면. [본문으로]
  30. 최석하, 1906, 「국가론」, 『태극학보』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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