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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by 衍坡 2018. 4. 22.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1. 서론

 

현상윤(1893~1950)은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근대적 학문방법론에 입각해 『조선유학사』(1948)를 저술함으로써 해방 이후 한국 유학사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해방 이후 조선 유학사 연구의 전체 틀은 이미 그의 『조선유학사』에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그런 점에서 현상윤을 “조선유학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각주:2]

 

하지만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 제시한 유학사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조선유학사』에 담긴 그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의 유학관(儒學觀)은 전통 한학과 근대 학문을 접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조선유학사』는 현상윤이 수십 년 동안 거쳤던 사상적 노정의 최종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전통 유학을 해체ㆍ변형하여 근대학문으로서의 유학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현상윤이 유학과 근대문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유학사 재해석의 전제가 되는 그의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이 어떻게 지속되거나 달라지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특히 현상윤이 처했던 현실, 현상윤과 동아일보 계열 사이의 관계가 그의 사상적 작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구성이 어떤 정치적 요구에 부응한 것인지, 또 어떤 사상적 노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의 연구는 현상윤의 삶에서 주로 ‘근대지향적’인 태도나 민족운동가로서의 면모에 주목해왔다. 현상윤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는 민족운동ㆍ구국운동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현상윤의 생애를 분석했다.[각주:3] 물론 이 연구에서도 현상윤의 유학관을 다루기는 했지만, 실천적 유학과 ‘공자주의’에 뿌리를 두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규명하는 데 머물렀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최근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현상윤은 1910년 이래로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고 서구문명에 경도되어 갔던 ‘근대인’이거나 전통 유학과 근대 학문을 절충하여 민족의 독립을 모색한 민족주의자였다.[각주:4] 

 

기존의 연구들은 현상윤이 근대문명에 어떤 태도를 취했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어떻게 조응하려 했는지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현상윤이 평생에 걸쳐 유학과 근대문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나갔으며, 조선 유학사 재구성이 그의 근대문명관ㆍ민족운동론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현상윤이 평생에 걸쳐 조선사상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유학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단지 개인적 관심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상윤이 처했던 현실과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조선 유학사 재해석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현상윤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면서 그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을 근대주의적 맥락에서 분석한 연구도 있다.[각주:5] 이 연구는 현상윤의 유학관이 근본적으로 청년기에 자각한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밝혔다. 청년기에 근대주의를 자각하고 유학를 비판하던 현상윤은 1930년대 이후 유학을 근대 학문으로 체계화하려 했지만,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유학을 비판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기존 연구들과 달리 현상윤의 전체 생애 속에서 그의 유학관을 조망한다는 점, 현상윤의 유학사 재해석을 근대적 맥락 위에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아일보 계열 인물과의 관계가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해방 이후 유학에 관한 그의 ‘제한적인 고평(高評)’이 어떤 사상적 노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는 다루지 못했다.

 

이 글은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재해석하는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을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현상윤의 사상에서 전통 유학의 흔적은 식민지 시기와 해방정국을 거치며 어떻게 변형ㆍ해체되어 가는가. 해방 이후에 재구성한 조선 유학사는 식민지시기에 제시했던 유학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재구성하는 데 동아일보 계열의 정치활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함으로써 현상윤이 서구문명에 경도되었다는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따라서 현상윤의 생애 전반에 걸쳐 그의 유학관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이 작업을 위해 현상윤의 생애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다룰 것이다. 그 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유년기 전통 유학ㆍ신학문과의 조우, ②일본 유학기(1914~1919) 근대문명 수용, ③1930년대 이후 조선 유학사 재발견, ④해방 이후 『조선유학사』 저술. 네 시기에 현상윤이 가지고 있던 유학관을 살펴보면, 『조선유학사』로 수렴되는 그의 사상적 노정과 그 역사적 맥락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유학사 초판본

▲현상윤이 저술한 『조선유학사』

 

 

2. 전통 유학과 신학문 수학

 

현상윤(玄相允)은 1893년 6월 14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면에서 현석태(玄錫泰)와 박국애(朴菊愛)의 차남으로 태어났다.[각주:6] 그가 태어난 19세기 말은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던 시기였다. 현상윤은 그 시대적 조건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전통 유학과 신학문을 모두 학습한 그의 청소년기를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윤이라는 인물이 전통 유학과 신학문으로부터 각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의 집안은 대대로 평안도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연주도령(延州都令) 현담윤이 그의 25대조로 알려져 있으며, 17대조인 현상문이 정주로 이사했다고 전해진다.[각주:7] 하지만 이 가문에서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남긴 인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순조 대에 현인복(玄仁福)이 의병을 일으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사실이 있다. 『순조실록』 등에는 “현인복은 본래 사인(士人)이었다”거나 “대대로 내려오는 향인(世鄕)으로 유학을 업으로 해왔다”고 서술되어 있다.[각주:8] 이 기록은 현상윤 집안이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상윤의 부친 현석태는 1892년(고종 29)에 치러진 춘도기(春到記)에 입격(入格)하여 벼슬을 지냈다.[각주:9] 이러한 집안 환경을 고려하면, 현상윤이 어려서부터 전통 유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상윤 자신도 12세 무렵부터 수년간 집안사람인 진암(鎭菴) 현상준(玄商濬)에게 유학을 배웠다.[각주:10] 현상윤에 따르면, 현상준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게 수학했다.[각주:11] 유인석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각주:12] 그는 1900~1902년 사이에 관서지역에 머물며 학계(學契)를 결성하고 강론했는데, 그 목적은 ‘기자(箕子)의 터전’인 관서 지역에 존화(尊華) 사상을 전파해 항일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데 있었다.[각주:13] 현상준이 유인석에게 수학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현상준이 유인석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현상준이) 의암 선생을 만난 뒤로는 크게 깨닫고 돌이켜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에만 뜻을 두셨다”는 현상윤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각주:14] 유인석과의 만남은 현상준이 유학에 천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상준은 평생에 걸쳐서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사후 간행된 『진암문집』(1940)이 심성(心性)ㆍ성정(性情)ㆍ이기(理氣)ㆍ함양(涵養)ㆍ태극(太極)에 관한 논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상준이 평생 유학 연구에 몰두했음을 의미한다.

 

현상준이 청소년기 현상윤의 학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상윤이 현상준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현상준의 기일에 직접 제문을 짓는가 하면, 그의 문집 편찬에 각별한 관심을 쏟기도 했다. 당시 문장으로 이름났던 동강(東岡) 김영한(金寧漢)에게 직접 『진암문집』의 서문을 부탁하고, 몸소 발문을 지을 정도였다. 현상준 제문에 “매양 선생에 대한 생각은 갈수록 독실해져만 갔는데 이제는 다 끝났도다. 들보가 꺾이고 산이 무너졌으니 나의 막힘을 누가 열어줄 것인가, 나의 의혹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라고 한 것이 단지 의례적 표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각주:15]

 

그렇다면 현상윤은 현상준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그는 『진암문집』 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저 고종 때 경자(1900), 신축(1901)연간에 의암 유 선생께서 우리 관서지방에 오시어 석계에서 가르치셨다. 그 문하에서 수업한 이들이 매우 많았지만 결국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가듯 학문의 순서를 밟아서 그 종지를 전수받는 데 이른 것은 오직 우리 스승 진암 선생 한 분뿐이었다. …… 부친의 명을 따라 일찍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셔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는데, 의암 선생을 만난 뒤로는 크게 깨닫고 돌이켜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학문에만 뜻을 두셨다. 오로지 경서와 전적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겨 공자가 기초한 진리와 정주학에서 세운 종지를 멀리 상고하고 가까이 기준 삼아서 모름지기 정밀하게 살피고 독실하게 실천하고자 하셨으니, 일상생활 하나하나에도 모두 정성스레 준행하는 실질이 있으셨다. …… 나는 어릴 적 집안 청소하고 응대하는 소학(小學)을 배울 때부터 선생의 신념과 실천에 대해 익히 보고 배워 온 바 있는 까닭에, 이상과 같이 대략 적어서 책 끄트머리에 붙인다.[각주:16]

 

여기에서 두 가지 측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현상준의 모습에서 철저히 전통 유학자의 면모를 부각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유인석의 종지(宗旨)를 이은 인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현상윤이 이 글을 쓴 시점은 근대문명과 근대학문을 체득한 뒤인 1940년이었다. 그럼에도 현상준을 전통 유학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윤이 초년에 현상준으로부터 전통 유학의 가치를 받아들였다는 점, 현상준을 통해 전통 유학자의 모습을 긍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유학과 단절할 수 없었던 직접적인 배경에 현상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통 유학을 학습하던 현상윤이 처음 신학문과 조우한 것은 1908년 부호육영소학교(鳧湖育英小學校)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가 부호육영소학교에 입학한 직접적인 계기는 장인 백이행(白彛行)의 권유였다.[각주:17] 백이행은 운암 박문일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했던 인물이지만, 을사조약 이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각주:18] 이후 서북학회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주지회장을 맡았고, 오산학교 초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상윤이 입학한 부호육영소학교 역시 백이행이 근대적 교육을 확산시키려는 목적에서 세운 학교였다.

 

현상윤이 신학문과 만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평안도 지역사회의 변화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었다. 평안도는 조선시대 내내 정치적 차별의 대상이었다. 평안도 출신의 향인(鄕人)은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고위 관직에 진출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게다가 평안도는 경제적으로도 토지 생산성이 낮아 농업이 발달하지 못하던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평안도에서는 삼남지방과 같은 향촌지배질서가 구축되기 어려웠다. 지역민의 계층 간 차이가 비교적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각주:19] 더구나 청일전쟁 이후로 이 지역에 개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근대 교육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1895년부터 1900년 사이에 선교사가 학교 건립을 주도하면서 평안도에서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는 지역민들이 학교 건립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사립학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각주:20] 그 과정에서 세워진 학교 중 하나가 부호육영소학교였다.

 

이듬해 현상윤은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입학했다. 대성학교는 신민회(新民會)에서 추구했던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이었다. 현상윤은 대성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안창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학문을 배우기로 한 계기 중 하나로 “안도산 외 제씨(諸氏)가 각처에 학교를 설립한 것”을 들었고,[각주:21] 학생시절 기억에 남는 일로 “대동강에서 선유(船遊)를 하면서 도산선생의 주시는 갈비국을 먹던 일”과 “모란봉 아래 광풍정에서 도산선생의 연설을 듣던 일”, “도산선생의 병난 생도 방문하시던 일”을 언급했다.[각주:22] 그의 회고를 미루어 볼 때, 신학문을 학습하는 초기 과정에서 안창호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안창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의 어떤 모습에 감명을 받았는지는 직접적인 언술이 없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안창호의 논설을 통해 현상윤에게 미쳤을 영향을 짐작할 수는 있다.

 

民族社會에 對하여 스스로 責任心이 있는 者는 主人이요, 責任心이 없는 者는 旅客입니다. 우리가 한때에 우리 民族社會를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뿌리는 때도 있고 忿한 말을 吐하는 때도 있고 슬픈 눈물과 忿한 말뿐 아니라 우리 民族을 爲하여 몸을 위태한 곳에 던질 때도 있다 할지라도 이렇다고 主人인 줄로 自處하면 誤解입니다. 지나가는 旅客도 남의 집에 慘變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거나 忿言을 吐하거나 그 집의 危急함을 救濟하기 爲하여 投身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主人이 아니고 客人 때문에 한때 그리고 말뿐 그 집에 對한 永遠한 責任心은 없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고 또 要求하는 主人은 우리 民族社會에 對하여 永遠한 責任心을 眞正으로 가진 主人입니다.[각주:23]

 

이 논설에서 안창호는 민족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민족의식과 애국심뿐 아니라 ‘영원한 책임심’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성학교의 교육목표도 안창호의 논설에 부합했다.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목표는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병행하여 주인의식ㆍ책임의식ㆍ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각주:24] 대성학교의 교육이념은 현상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조선의 현실에 책임의식을 느끼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윤은 대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대성학교가 강제 폐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듬해 서울에 위치한 보성학교(普成學校)로 전학해야 했다. 1913년 보성학교를 졸업한 현상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각주:25] 정주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남긴 글을 보면 그가 가졌던 생각을 알 수 있다. 1914년 1월 어느 날 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새와 같이 짓이 있으면 逼迫도 悲哀도 없는 구만장천 날아서 보고, 고기같이 날램이가 있으면 맑고 깊은 汪洋大海 헤어보련만은, 짓도 없고 날램이도 없으니 이 슬픔과 이 逼迫을 어느 곳에서나 避하리오! 나에게 春秋의 붓을 빌렸으면 冷冷한 이 사회의 惡毒을 시원하게 갚아보고, 秋霜같은 舌權을 주었으면 頑盲한 浮世의 깊은 꿈을 깨우련만은, 붓의 힘도 혀의 권위도 가지지 못하였으니, 사회의 惡毒 浮世의 頑盲은 나날이 심할 뿐이구나! 죽을 힘을 다하여 끌고 가는 사람에게는 苦痛의 붉은 땀이 흐르건만, 타고 가는 사람에게는 快樂의 웃음이 띠우나니, 이 어떤 不調理, 不平等이뇨!? 아아 無情한 이 世上아 너의 찬 맛은 언제까지냐?[각주:26]

 

이 글을 보면 현상윤이 당대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의 현상윤은 현실에 관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붓의 힘’도 ‘혀의 권위’도 갖지 못한 “하기에 게으르고 배우기에 게으른” 자신에게서 찾았다.[각주:27] 그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 것도 그런 자괴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일본 유학 시기에 보여준 생각들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겪었던 내적인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각주:28]

 

 

고려대 초대 총장 현상윤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시절의 현상윤

 

 

3. 일본 유학기 새로운 문명관 수용과 모순적 인식

 

현상윤은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의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기의 현상윤은 조선의 현실을 의식하고 책임의식을 느끼며 현실 참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점은 『청춘』과 『학지광』에 실린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학 초기 쓴 글에서 현상윤은 조선 청년의 시대적 사명을 누차 강조했다. 조선 청년이야말로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주역이므로 문제의식을 연마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현실과 세계에 관한 문제의식 없이 외모를 꾸미고 허세를 부리기 급급한’ 도일유학생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각주:29]

 

조선 청년의 책임의식을 환기하려는 태도는 조선의 현실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현상윤에게 조선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중국에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해 ‘조선민족’, ‘우리’라는 자의식을 갖지 못한 나라였다.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편협한 관습에 빠져 오히려 민을 천시하고, 일용품조차 제힘으로 만들지 못하면서도 자원은 모두 남의 나라에 주는 가난하고 한심한 나라였을 뿐이다.[각주:30] 현상윤은 암울한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고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라도 청년들이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회비판’을 누차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대개 批判이란 只今까지 지나온 過去와 當場에 서있는 現在를 批評하고 判斷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理想鄕의 將來로 올라가려는 努力의 한 階段이니, 社會의 進步가 이에서 發端되고 人間의 向上이 이에서 起源함이라. 停滯되었던 文明이 다시 開展코자함에도 批判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으며, 沈澱되었던 潛勢力이 다시 發現코자 함에도 批判이 아니고는 할 수 없도다. 그럼으로 批判力이 微弱한 社會는 發展이 없고 進步가 없으며 批判力이 伴하지 않는 時代는 創造가 없고 向上이 없나니, …… 今日 朝鮮社會에는 沈澱된 것은 事實이로되 發現코저함이 아직 없는 것은 오직 批判이 없는 까닭이오, 今日 朝鮮人에게는 停滯된 것은 分明하되 展開코저 함이 아직껏 없는 것은 다만 批判力이 不足한 까닭이라.[각주:31]

* 밑줄 및 강조는 필자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현상윤이 사회와 문명을 ‘발전’ 또는 ‘정체’와 관련지어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힘의 논리에 기초한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었다. 현상윤은 인류 문명이 동물의 먹이사슬처럼 약육강식의 법칙 위에 건설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동정 없는 것을 서러워하지 아니하고 나의 힘없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며, “남은 어찌 되었던지 내 배나 잘 채우는 것이 현대 인류의 도덕”이라고 주장했다.[각주:32] 이 생각은 만물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오직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강력주의’로까지 이어졌다.[각주:33]

 

현상윤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동ㆍ서양 문명 비교로 이어졌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은 매우 극명하게 대비된다. 동양은 겸손과 억제를 미덕으로 삼으며 앞사람이 잘못된 것을 말해도 순종하고 침묵하는 문명이다. 반면 서양은 아무리 교황의 명령이라도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생명으로 삼으며 자기표현을 이상으로 삼는 문명이다. 이러한 진단은 “동양문명은 정적이오 보수적이며 소극적이오 정신적이며, 서양문명은 이 반대로 동적, 진취적, 적극적, 물질적”이라는 결론으로 수렴되었다.[각주:34] 그런 점에서 조선 청년의 책임의식과 사회비판을 강조하는 그가 동양문명을 열렬히 비판하고 서양문명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동양문명은 단지 현대 사회에 해만 끼치는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할 문명이었을 뿐이다. 가장 이상적인 세계질서는 동양이 서양문명에 통합되는 것이었다.[각주:35]

 

현상윤에 따르면,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차이는 사상과 지리에서 발원했다. 그의 논점은 이런 것이다.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동양문명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운운하며 자신을 내버리는 것을 윤리라고 생각했고, 지식을 천하게 여겼으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나고 도가 있으면 나아간다고 하면서 공익을 경시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자아확충을 강조하고, 지식을 중시했으며,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여 개인의 개성을 존중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양 사람들은 땅이 넓고 재화가 많아 안일함에 빠졌지만, 서양 사람들은 땅이 좁고 물산이 적어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이 강해진 이유는 여기에 있다.’[각주:36]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는 현상윤의 논리가 그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현상윤의 생각은 1910년대 일본의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도일유학생들과 교유하며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현상윤이 어떻게 서구 문명과 적자생존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이 교유했던 인적 관계망 속에서 그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라면, 그들이 속해있던 1910년대 중후반 일본의 사상적 분위기와 와세다 대학의 학풍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하나다.

 

일본 유학기 현상윤의 인맥은 주로 ‘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이하 학우회)를 중심으로 맺어졌다. 학우회는 표면상으로 “회원 상호 간의 지덕체의 발달 및 학술연구와 의사소통 도모”를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회원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각주:37] 현상윤은 이 모임의 임원으로 참여하면서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현실인식을 공유했다. 이때 학우회를 주도했던 인물은 안재홍ㆍ신익희ㆍ백남훈ㆍ정노식ㆍ장덕수ㆍ김성수ㆍ송진우 등이었는데,[각주:38] 현상윤은 특히 장덕수ㆍ송진우ㆍ김성수ㆍ이광수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각주:39]

 

청년의 시대적 책임감을 강조하고,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수용하며, 서구문명을 우호적으로 인식한 것은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자강론’(自强論)에 속하는 그들의 생각은 크게 ①청년론, ②구관습ㆍ구사상 타파, ③신문화 건설, ④실력양성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각주:40] 장덕수는 조선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청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고, 이광수는 조혼ㆍ관혼상제ㆍ계급제도ㆍ관존민비 등의 구관습을 타파하고 신문화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송진우는 배타적이고 봉건적인 유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41] 장덕수와 이광수, 송진우의 생각은 현상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상윤이 이광수의 「우리의 이상」을 읽으며 “힘껏 찬양하고 힘껏 경의를 표”한 사실은 이들 사이에 이미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각주:42] 현상윤이 1920년대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에 몸담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각주:43]

 

현상윤ㆍ송진우ㆍ이광수ㆍ장덕수 등의 생각에는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고 근대문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한 ‘실천의식’이 깔려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논리에서 차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상윤은 이광수의 「우리의 이상」을 읽고 민족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정치를 함께 강조하지 않고 굳이 문화만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사례는 ‘민족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을 두고 서로 생각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을 비판하고 자강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이 근대문명을 성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1910년대 도일유학생들이 자강론을 공유하며 그 지향점을 서구문명에 둔 것은 당시 일본의 정치ㆍ사회적 분위기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상윤의 일본 유학기는 이른바 다이쇼(大正)데모크라시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자유주의 사조가 사회적으로 대두했다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번벌(藩閥)ㆍ관료세력에 비판적인 도시 중산층ㆍ지식인ㆍ학생 등을 중심으로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내세우며 “천황주권의 틀 속에서 국가기구를 자유주의적으로 변혁하자고 제창”했다. “추밀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보통선거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각주:44]

 

현상윤이 재학하던 와세다 대학도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본래 와세다 대학의 전신이었던 동경전문학교는 영국식 입헌정치를 일본의 이상적 정치모델로 삼았던 정치세력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이들은 헌법제정ㆍ국회개설 등을 통해 영국식 입헌정치를 실현하려고 했고, 동경전문학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전파하려고 했다. 따라서 동경전문학교의 교육이념 역시 영국식 입헌주의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교육목표 역시 “입헌정치와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 발전을 담당할 중견국민으로서의 주체적 도덕의식을 갖춘 ‘모범적 국민’의 양성”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교육이념은 와세다 대학으로 이어져 자유주의적 학풍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각주:45] 와세다 대학의 도일유학생들은 당시 일본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와 와세다 대학의 학풍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는데,[각주:46] 현상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실비판을 사회발전과 연결 지어 적극적으로 긍정했던 것도 일본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지광』에 실린 글만으로 당시 현상윤의 사상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측면을 읽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우회의 기관지였던 『학지광』의 주된 논점은 조선이 근대서구문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와 가능성, 조선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맞추어졌다. 세계가 서구문명으로 귀일해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학지광』에서 지향하는 논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 유학을 학습한 현상윤의 모습이 『학지광』에 실린 그의 글에서 여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실제로 현상윤은 근대문명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유학의 가치를 옹호했다. 그의 모순적인 태도는 한문 사용 폐지가 불가하다는 논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각주:47] 이 글에 담긴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천ㆍ지ㆍ인 삼재(三才) 중에서 하늘을 우러러볼 줄 모르는 자와 땅을 굽어볼 줄 모르는 자는 하늘과 땅을 폐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하늘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폐하자고 주장하고, 땅은 사막(沙漠)ㆍ교광(交廣)ㆍ조선과 일본ㆍ곤륜(崑崙)과 서장(西藏)까지라고 여겨졌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으므로 폐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양 역법가들도 칠정(七政)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일주일의 각 요일에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땅이 옛날에 알던 것보다 넓어졌다지만, 옛 땅은 옛 땅이고 새로운 땅은 새로운 땅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운 것으로 옛 것을 폐하자고 하는가?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은 인륜의 도리 덕분에 만물의 영장이 된다. 모든 사람이 상도(常道)를 주관하는 하늘로부터 인륜의 도리를 모든 각기 받아 갖추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서에 선후가 있어 스승과 제자가 생겨났고, 스승과 제자가 가르치고 배우면서 문자가 생겨났다. 그러니 문자는 인륜의 도리를 전하는 날개다. 『중용』에서 글은 하나의 문자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바로 한문이다. 그러므로 한문을 폐하는 것은 사람을 폐하는 것이요, 인륜을 폐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늘을 폐하고 땅을 폐하는 것이다.’

 

즉,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인륜의 도리를 부여받았으며 한문은 인륜의 도리를 전하는 수단이므로 폐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자(儒者)가 아니고서는 구사하기 어려운 논리다. 삼재를 전제한 뒤 구사하는 논리나 하늘이 상도를 주관한다는 생각, 인간이 하늘로부터 인륜의 도리를 부여받아 만물의 영장이라는 주장은 모두 전통 유학에서 구사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상윤은 한문 사용 폐지가 불가하다는 논설을 한문으로 작성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데, 한문을 구사하는 전통적 글쓰기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언어가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문 사용을 고집하는 현상윤의 태도는 단순히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한문을 ‘인륜의 도리를 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전통적 가치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현상윤이 일본 유학기에도 전통과 완전하게 단절하지 못했다면, 그가 1910~20년대 사이 서구문명으로 경도되어갔다는 평가에는[각주:48] 이론의 여지가 있다.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문이 인륜도덕을 전하는 수단이라는 다분히 ‘전통 유학적’인 생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1930년대 이후 현상윤이 유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 “‘중용’(中庸)은 ‘극단’(極端)의 싸움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그 진보가 분명하며 ‘극단’과 ‘극단’의 상거(相距)가 멀면 멀수록 그 취할 바 위치가 확연해진다”는 현상윤의 논설에 주목하면,[각주:49] 그가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각주:50] 하지만 이 문장을 해당 논설의 전체 문맥 속에서 보면, 중용과 극단에 관한 설명은 오로지 ‘약동하는’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활용된다. 따라서 그가 전통과 조화를 추구했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상윤이 전통 유학과 근대문명 중 무엇을 선택했는가보다 자신의 사상에서 양자의 위계와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현상윤은 분명히 근대문명을 자기 사상의 중심에 배치했다. 전통 유학은 그 사상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1910~20년대 현상윤이 양자를 종합적으로 체계화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즉, 근대적 사유와 전통적 사유가 공존하면서도 정합적인 사상체계로 재구성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서구문명에 관한 현상윤의 이해와 문제의식이 그만큼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상윤은 근대문명으로의 도약을 누차 강조했지만, 정작 서구문명에 관한 이해는 단순하고 초보적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다거나, ‘훈장 달고 예복 입은 대신’보다 ‘실크모자에 프록코트 입은 신사’를 더 추앙했다는 주장은 서양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이해가 단편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서구문명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현상윤은 다이쇼 시기 일본사회의 모습을 ‘서구문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그가 누차 강조하는 근대문명은 서구문명 그 자체라기보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구문명’에 가깝다. 그만큼 전통 유학과 근대문명 사이에서 자신의 문제의식과 사상을 구축해나갈 역량이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현상윤의 두 모습은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성장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16세 이후 약 10년에 걸친 시간은 그가 근대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자각해가는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전통 유학의 관성이 남아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현상윤을 비롯해 송진우ㆍ장덕수ㆍ이광수 모두 ‘근대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전통 유학의 관성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현상윤은 전통 유학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1920년대 후반부터 근대주의적 맥락 속에서 유학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송진우ㆍ장덕수ㆍ이광수와 다른 현상윤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현상윤의 필적

▲현상윤이 남긴 원고의 일부

 

 

4. 조선 유학사의 재발견

 

1930년대 초부터 현상윤의 유학관에 변화가 나타났다. 현상윤은 1925년부터 1929년 사이에 폐병을 앓아 고향 정주에서 요양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유학관이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20년대에는 유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다면, 1930년대 초부터는 일본 양명학과 조선 유학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상윤의 유학관이 요양 중에 변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주에서 요양하던 시기의 유학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현상윤의 유학관이 달라진 계기를 그의 국제정세 인식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31년 11월호 『동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勃發의 原因은 滿蒙을 中心한 日中兩國의 衝突에 在할 것인데, 今番에도 原則으로 보면 中國에 抵抗할 實力이 없으니 戰爭이 될 것이 아니나, 그러나 만일 中國 國民의 敵愾心의 所激으로 어떤 方面에 엄청난 衝突事件이 生기면 日本도 默視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되면 或 戰爭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戰爭哲學으로 보아서는 相對國인 中國이 日本과 對抗할 만한 實力을 얻게 될 때라야 戰爭이 勃發할 것이니 그러자면 自然 한 十年 있어야 될 듯합니다. 戰爭의 中心陣營은 日, 美 兩國인데 戰爭이 主로 極東과 太平洋에서 될 것이요, 歐洲本土에서는 아니 생길 듯합니다.[각주:51]

 

현상윤은 중국이 일본만큼의 국력을 갖춘 후에야 중일 간의 전쟁이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그는 오히려 일본이 장차 미국과 전쟁할 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현상윤의 눈에 비친 일본은 향후 미국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다. 위의 글이 같은 해 9월에 발발한 만주사변 직후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만주사변은 현상윤이 일본의 국력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직접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조선에 근대문명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현상윤으로서는 비서구권 국가인 일본이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지 관심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각주:52] 그래서 그는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을 분석하며 “우리가 최근 세계사를 볼 때 가장 놀라고 가장 이상스럽게 보이는 것은 일본민족의 발전이다”라고 썼다.[각주:53]

 

일본으로 눈을 돌린 현상윤은 일본의 근대화가 가능했던 이유로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무사도 정신, 위대한 모방성, 풍부한 자존심과 애국심, 견고한 단결력 등을 들었다.[각주:54] 아울러 그 사상적 배경을 양명학에서 찾았다.[각주:55] 현상윤은 유학을 크게 주자학과 양명학 두 갈래로 나누었다. 주자학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을 강조하여 이론적인 공리공담에 빠지기 쉽지만, 양명학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추구하므로 주자학에 비해 훨씬 실천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현상윤은 일본의 국민성이 진취적인 무사도 정신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이었으므로 주자학보다 양명학을 더 선호했다고 판단했다. 즉, 양명학이 일본을 근대화할 수 있게 한 사상적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유학관과 차이가 있었다. 첫째, 유학을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구분했다. 여전히 주자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유학 안에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은 기존과 다른 태도였다. 둘째, 근대문명의 실현 가능성을 유학에서 발견했다. 1910~20년대 현상윤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대비시키고 후자로부터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은 조선의 현실에 관한 실천적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1930년대의 현상윤은 여전히 실천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문명의 실현 가능성을 서양사상이 아니라 유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찾은 것은 이전에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상윤이 유학을 근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해낼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음을 의미한다.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요인을 양명학에서 찾은 현상윤의 논점은 자연스럽게 조선 유학사로 옮겨갔다. 조선은 근대문명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끝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현상윤의 질문이었다. 그는 조선 유학사에서 제한적이나마 긍정적인 지점들을 찾아냈다. 바로 정여창(鄭汝昌)과 조광조(趙光祖), 실학파(實學派)였다. 현상윤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고 실천적인 학문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정여창과 조광조는 따르는 무리가 적었고, 그 영향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퇴계가 정주학을 소개한 이후 조선의 지배층은 이론유학인 성리학에 빠져 심성정(心性情)공부에만 몰두했고, 그 이론을 두고 당쟁을 일삼기 급급했다.[각주:56] 즉,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공리공담’과 ‘당쟁’이었다.

 

현상윤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서 이어지는 실학파가 공리공담과 당쟁을 일삼는 조선 성리학에 반대하며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실학파의 시초인 유형원은 공리공담을 배제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산수 연구에 몰두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유형원의 뒤를 이어 서양과학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공정한 인재 등용과 과거제도 재정비를 골자로 하는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그 뒤로는 안정복ㆍ이가환ㆍ박지원ㆍ이덕무ㆍ유득공ㆍ정약용 등이 이익의 사상을 이어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은 애민사상ㆍ고증적 연구태도ㆍ서양학문 수용으로 규정할 수 있다.[각주:57] 공리공담 배제와 서양 학문 수용을 실학파의 공통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현상윤이 실학파에게서 굳이 서양과학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이유는 조선 유학사에서 근대적 요소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을 공리공담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편에 ‘실용적 학문을 추구한’ 실학파를 배치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실학운동이 계속되고 성공되었다 하면 필연적으로 구미의 물질문명은 훨씬 용이하게 또는 일찍이 조선에 수입되었을 것이다”라는 그의 서술은 조선 유학사에 실학파를 계보화한 이유를 짐작케 한다.[각주:58] 그런 점에서 현상윤에게 근대문명은 물질문명과 등치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실학파는 바로 그 ‘실용성’을 추구한 사람들이었고,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긍정할 수 있는 계기였다.

 

물론 현상윤이 실학에 부여하는 역사적 의의는 제한적이었다. 비록 실학으로부터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을 발견해냈지만, 조선 유학사 전반에 관한 인식은 아직도 부정적이었다. 주자학은 여전히 주류적 사상이었고, 실학은 “소수 불우한 학자들의 일시적 환몽(幻夢)”에 그쳐 영향이 미미했으며, 서양사상과 과학은 사학(邪學)으로 몰려 배척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기존 연구가 지적하는 것처럼, ‘유교망국론’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현상윤이 굳이 실학파를 범주화하면서도 조선이 망한 요인을 유학으로 귀결시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적 흐름이 바뀌지 않았다면 굳이 실학파를 범주화ㆍ개념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상윤은 끝내 조선 유학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것인가.

 

현상윤이 실학파에 주목하면서도 끝내 망국의 원인을 유학에 돌린 이유는 그의 조선 유학사 연구가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조선에도 근대화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국 조선이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가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에서 찾고 싶었던 모습이라면, 두 번째 전제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현상윤으로서는 이 두 가지 상반된 명제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망국의 책임을 주자학에 전가하는 전략을 택했다.[각주:59] 그럼에도 그 반대편에 실학을 범주화한 이유는 조선 유학 내부로부터 근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현상윤이 실학파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발견은 1930년대 초 민족주의 세력의 문화운동과 관련이 있었다.[각주:60] 1930년을 전후하여 세계 대공황, 만주사변 등으로 국내외 정세가 변화하자 국내 민족운동의 양상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철회하고 ‘계급 대 계급’ 전술을 구사하며 ‘비합법적’ 활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대중을 결집함으로써 국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사회주의 세력의 독자적인 활동은 자연스럽게 신간회 해체로 이어졌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의 연대가 와해된 것이다. 민족주의 세력으로서는 ‘계급 대 계급’ 전술을 구사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응하면서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제시된 대안이 민족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여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문화운동론’이었다.

 

당시 민족주의 세력의 문화운동론은 동아일보 계열과 조선학 운동 계열로 나뉘었다. 현상윤은 기본적으로 동아일보 측 문화운동론의 입장을 대변했지만,[각주:61] 안재홍ㆍ정인보가 주도했던 조선학 운동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기존 연구에서는 현상윤이 기본적으로 조선학 운동에 반대하면서도 동아일보의 문화운동과 조선학 운동 사이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지적했지만,[각주:62]

 

나는 ‘朝鮮學’이라는 名辭에 반대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나라 이름 밑에다가 ‘學’ 字를 붙여 가지고 부르는 것은 마치 英, 佛 等의 學者들이 埃及을 硏究할 때에 ‘에집토로지’라는 말을 쓰는 것 과 같아서 퍽 不愉快합니다. …… 그것은 말하자면 英, 佛 等의 學者들의 埃及하면 埃及의 文物을 ‘한데 모아서’ 알아보자고 하는 것을 意味하는 것인데 어디 남의 나라 文物을 그렇게 쉽게 ‘한데 모아서’ 이것이오 하고 손쉽게 硏究할 수가 있겠소. …… 朝鮮을 한 개의 硏究對象으로 하여 ‘한데 모아서’ 硏究하는 것이 아니라 文化의 各 部門을 專門的으로 硏究하는 것이 穩當할 것이고, 말하자면 國學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朝鮮文化硏究’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요.[각주:63]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조선학 운동의 취지에는 공감하고 있었다. 단지 조선 문화를 한데 모아서 연구하는 방법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오히려 현상윤은 실학파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정인보와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 같다.[각주:64] 그런 점에서 현상윤이 「이조유학사(李朝儒學史) 상(上)의 정다산(丁茶山)과 그 위치(位置)」라는 글을 쓴 사실이나, ‘다산서세백년기념회’(茶山逝世百年紀念會) 발기인 명단에 정인보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각주:65]

 

조선 유학에 관한 현상윤과 정인보의 논리는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을 지녔다. 첫째, 두 사람 모두 양명학을 중요하게 인식했다. 현상윤은 양명학이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요인이라고 인식했고, 정인보는 양명학 연구에 천착하여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을 66회나 연재하기도 했다.[각주:66] 둘째, 성리학과 실학을 각각 ‘허’(虛)와 ‘실’(實)로 규정했다. 정인보는 성리학을 ‘허가소실’(虛假少實)한 학문으로, 실학을 ‘실심실행’(實心實行)한 학문으로 인식했는데,[각주:67] 현상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런 관점에서 유형원을 실학파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이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파의 계보를 구성했다.

 

물론 현상윤의 문제의식이 정인보와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각주:68] 두 사람의 사상에서 양명학의 의미는 서로 달랐다. 양명학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인 측은 정인보였다. 실학의 계보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이 꼭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현상윤은 실학파의 사상으로부터 서양의 흔적을 찾아낸 뒤 ‘근대지향성’에 강조점을 찍었다. 반면, 실학에서 민족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읽어내려고 했던 정인보는 실학파의 중요성을 애국애족사상에서 찾았다.[각주:69] 실학의 선구자로서 유형원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현상윤과 달리 정인보가 이익을 더 강조했던 것도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각주:70]

 

현상윤과 정인보의 문제의식 차이는 각자 몸담았던 문화운동론이 추구했던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했다.[각주:71] 현상윤이 동아일보 계열의 문화운동을 대변했다면, 정인보는 조선학 운동의 논리를 대변했다. 1930년대 동아일보 계열의 문화운동은 민족운동ㆍ정치운동ㆍ경제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해당했다. 조선 문화 연구 그 자체를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현상윤이 조선 문화를 통째로 연구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부문별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각주:72] 반면, 조선학 운동은 ‘합법적’ 정치투쟁이 봉쇄된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그 목적은 ‘민족문화’ 그 자체를 연구하여 민족 주체성과 독자성을 회복함으로써 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조선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정인보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계열의 문화운동과 조선학 운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민족주의 세력의 문화운동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현상윤과 정인보가 사상적 공감대를 이루었던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현상윤과 정인보가 실학파의 존재라는 지점에서 입장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인보와 동아일보 사이에 이미 정치적 유대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정인보가 생각했던 문화운동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양자 모두 ‘독자적인 민족문화의 창달’을 지향했다.[각주:73] 동아일보와 정인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실제로 1924년 1월 동아일보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어 사회적 반발에 직면했을 때, 정인보는 동아일보를 옹호했다.[각주:74] 그는 송진우가 주도했던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운동’에도 참여하여 여러 편의 논설을 발표했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33년 9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 1면에 「양명학연론」 66편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는 정인보의 조선학 운동이 동아일보 계열의 문화운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각주:75]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현상윤이 정인보와 사상적 공감대를 이루는 데 동아일보가 중요한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현상윤이 제시한 조선 유학사의 틀은 기본적으로 동아일보의 문화운동론을 대변하면서도 조선학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재발견은 민족주의 세력이 전개했던 문화운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현상윤의 집터

▲현상윤이 살던 집터. 현재는 멸실되었다.

 

 

 

5. 유학사의 완성 : 『조선유학사』 저술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 성과는 1948년 간행된 『조선유학사』로 수렴되었다. 이 책에서 현상윤은 조선 유학의 기원을 고대로 설정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조선시대에 있었다. 실제로 책의 구성상 조선시대 유학에 관한 서술이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한다. 그 이유는 고대의 전적(典籍)이 부족해서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이 조선시대 유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유학이라 하면 오로지 조선의 유학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요, 그 이전의 유학은 거의 그 존재가치조차 인정하기 어려운 정도”라는 서술은 현상윤의 강조점이 조선시대 유학에 찍혀있음을 보여준다.[각주:76]

 

해방 이후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인식은 기본적으로 1930년대 유학관을 계승했다. 이는 현상윤이 조선 유학을 어떻게 구분했는지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유학의 흐름을 ①조선 초기 유학, ②지치주의 유학, ③성리학, ④예학 중심 유학, ⑤당쟁시대 유학, ⑥경제학파의 등장, ⑦성리학의 재연, ⑧척사위정(斥邪衛正) 운동으로 구분했다. 특히 조광조로 대표되는 지치주의 유학과 유형원ㆍ이익 등 경제학파를 강조한 점이나 성리학이 다시 재연되었다는 생각은 1930년대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특징은 『조선유학사』의 서술 체계가 전근대의 유학사 서술과 다르다는 점이다. 학안(學案)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유학사 서술은 “도통의식에 입각하여 ‘선현(先賢)’들의 행적과 사상을 본받거나 자기 학파의 학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각주:77] 하지만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도통 대신 사상적 특징에 따라 학파와 계보를 범주화했는데, 이것은 조선 유학사를 근대학문의 방법론으로 재구성했음을 의미한다.[각주:78]

 

현상윤은 자신이 구분한 각 유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조선 초기 유학은 문장 중심의 유학이었고, 조광조가 추구했던 지치주의 유학은 공맹(孔孟)의 도를 현실에 실천하는 실천유학이었으며, 성리학은 존양(存養)과 궁리(窮理)에 힘쓴 이론유학이었다. 조선 후기의 예학과 당쟁은 유학적 논리의 연장에서 발생한 결과였다. 경제학파는 성리학의 한계에 대응해 나타났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성리학이 재연되어 화서학파로 이어졌다.’ 1930년대에 제시된 유학사의 전체 틀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전후의 유학사 인식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성리학과 실학에 관한 평가였다. 

 

해방 이후 실학파에 관한 현상윤의 평가는 1930년대와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 점은 실학파를 ‘경제학파’로 호명했다는 사실에서부터 확인된다.[각주:79] 현상윤에 따르면, 경제학파는 당쟁을 거듭하며 공론(空論)으로 흘러간 성리학이 백성의 삶을 구제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덕(德)보다 지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공맹의 왕도(王道)정신을 본받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ㆍ경국제민(經國濟民)의 학문에 힘썼고, 조선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ㆍ지리ㆍ물산ㆍ풍토 등을 연구했으며, 고증학을 받아들였고, 청과 서양으로부터 선진적인 외국 문물제도를 수용하고자 했다. 현상윤의 평가는 서양의 흔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학파를 ‘공맹의 왕도정신’과 연결했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평가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경제학파의 역사적 역할도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해방 이전의 현상윤은 실학이 “완명무쌍(頑冥無雙)한 유학계(儒學界)는 이 제창에 반향(反響)을 주지 못하고 이 운동에 공명(共鳴)을 주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실학을 “소수 불우한 학자들의 일시적 환몽(幻夢)”으로 본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조선유학사』에서는 “경제학파 여러 학자들의 업적이 거대하고 주장의 당당함 때문에 그 풍동(風動)과 세력이 커서 일시 사상계와 학계를 풍미하는 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학자치고 그 학문방법에서 이 실학의 학문경향을 가미하지 않은 이가 없을 이만큼 그 영향과 침투력이 컸었다.”라고 하였다. 실학파의 의의를 더 높이 평가한 것이다.

 

물론 경제학파의 활동이 성공했다고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현상윤은 경제학파의 활동이 끝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당쟁에서 찾았다. 정부가 “완명한 당파적 감정으로 경제학파의 의견을 써주지 아니하”여 경제학파의 실용적ㆍ실천적 주장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이 평가에만 주목한다면 조선 유학에 관한 인식이 해방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리학에 관한 인식이 해방을 전후하여 크게 달라졌다는 점과 함께 고려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해방 이전의 성리학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성리학은 양명학ㆍ실학과 대비되는 공리공담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성리학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아래의 글은 현상윤의 성리학 평가를 잘 보여준다.

 

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유교철학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유학은 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토론함에 미쳐서, 그 발전은 비로소 절정에 이른 것이다. 즉 경학에 통달하고 역사의 밝은 것[通經明史]을 그 ‘물의 발원지[發源]’라고 보며, 문장의 학문을 ‘물줄기의 시기[河川時期]’라고 보고, 지치주의로 향하는 정치와 교화의 실천을 ‘강의 시기[江漢時期]’라고 보면, 이 성리학의 이론유학은 바야흐로 그 왕양(汪洋)한 ‘해양의 시기[海洋時期]’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한 영역 내에서 이전 사람이 일찍이 밝히지 못하였던 것을 한층 명료하게 발휘한 곳도 있고, 중국의 선유가 일찍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비로소 우리 선현들이 개척한 것도 적지 않다. …… 이 시기 유학의 업적이야말로 조선사상이 적지 않게 동양 또는 세계사상사에 공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현상윤은 조선 성리학을 ‘해양의 시기’로 규정하고 그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조선 성리학의 업적은 동양사ㆍ세계사적으로도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같은 맥락에서 호락논쟁을 단순히 공리공담으로 치부하지 않은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현상윤은 더 이상 공리공담을 성리학의 속성으로 귀결시키지 않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공리공담으로 흘러갔다고 평가하긴 하지만, 공리공담을 성리학 자체의 특징으로 곧바로 연결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히려 그는 성리학의 ‘효용성’을 인정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군자학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었다.[각주:80] 성리학의 ‘효용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해방 이후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인식은 해방 이전과 분명히 달랐다.

 

물론 당쟁에 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현상윤은 숙종ㆍ경종 연간의 당쟁을 거치며 조선 성리학이 “학문의 연구도 공평하고 정직한 것이 없고, 사물에 대한 비판도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당파적 감정과 선입의 주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성리학이 공리공담이 흘러간 이유는 당쟁이었고, 당쟁은 자신과 상대를 각기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하는 유교적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에서 가장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당쟁이었다. 당쟁이 공적 가치는 추구하지 않고 자당(自黨)과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기주의에서 발원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성리학ㆍ실학 평가의 변화는 부분적 변화라기보다 조선 유학사에 관한 전반적인 평가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해방 이후의 현상윤은 기본적으로 1930년대의 조선 유학사 인식을 유지하면서도 조선 유학을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 점은 『조선유학사』 서론에서도 확인된다. 해방 이전의 현상윤은 주로 성리학의 과실만을 지적했는데, 1933년에 이미 ①복고사상, ②계급사상, ③이학(理學) 숭상, ④당쟁, ⑤문약(文弱), ⑥사상 통제, ⑦상공업 천시, ⑧토색, ⑨가족주의를 유학의 폐단으로 제시한 바 있다.[각주:81] 이는 『조선유학사』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서론에는 모화사상ㆍ당쟁ㆍ가족주의의 폐해ㆍ계급사상ㆍ문약ㆍ산업능력 저하ㆍ상명주의ㆍ복고사상이 유학의 폐단으로 제시되었다.[각주:82] 하지만 현상윤이 1930년대와 달리 유학의 공로와 의의도 함께 인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군자학 면려, ②인륜도덕 숭상, ③청렴절의 강조가 그가 제시한 유학의 공이었다. 아울러 조선 유학이 세계사적으로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그 의의를 평가했다.[각주:83]

 

과연 상반된 평가의 공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조선 유학을 단순히 국내적으로 볼 때는 앞에서 논술한 것과 같이 ‘공’도 있고 ‘죄’도 있으나, 그러나 이것을 국외적으로 볼 때에는 그 평가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조선 유학 자체의 가치를 동양사 상이나 세계사 상으로 보면 상당히 고가로 평가하지 않아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라는 서술에 주목하면, 현상윤의 의도는 유학의 공과 죄, 세계사적 의의로부터 각기 다른 의미를 도출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현상윤이 유학의 공과 죄, 세계사적 의의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해냈는지 확인해야 한다.

 

『조선유학사』 서론에 언급된 유학의 여덟 가지 죄는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된다. 여덟 가지 유학의 죄는 1930년대에 지적했던 성리학의 폐해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현상윤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그런데 『조선유학사』의 결론에서 여덟 가지 유학의 죄가 단순하게 나열된 것은 아니다. 현상윤은 자신이 열거한 유학의 죄를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면서 아래와 같이 썼다.

 

이 모양으로 하여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풍속은 날로 파괴되며 국정은 날로 문란하여 가고 국력은 나날이 쇠약하여져서 백성은 뿔뿔이 흩어져 천만인(千萬人)이 천만심(千萬心)을 가지고, 국왕이나 귀족이나 관리는 인민을 보호하기 전에 내 몸과 내 집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먼저 인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라가 있으되 주인이 없으며 주인이 있으되 국민이 없고 국민이 있으되 구수(仇讎)가 있고 도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위에 국민이 또 다시 암매하고 약하고 빈핍하고 나타(懶惰)하고 신용이 없으니, 이러고야 어떻게 안으로 국맥을 유지하며 밖으로 외국의 모멸을 막으랴?

*밑줄 및 강조는 필자

 

이 글은 『조선유학사』에 제기된 유학의 문제점이 단순한 유학 비판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자신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점을 향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천만인이 각자 이기심에 따라 이익을 도모하면 국가의 명맥이 유지될 수 없다고 썼다. 유학 비판을 통해 민족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조선 유학의 공을 제시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군자학과 인륜도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공자 사상의 재평가와 맞물린다.[각주:84] 현상윤은 “공자의 사상은 의연히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그가 공자의 사상을 고평한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공자는 사회도덕으로 인서(仁恕)와 효제충신(孝悌忠信), 중용(中庸)과 예악(禮樂)을 역설했다. 중용의 덕이 진(眞)이라면, 인서와 효제충신은 선(善)이고, 예악은 미(美)에 해당한다. 공자는 법치(法治)와 이해(利害)를 좇는 정치를 배제하고 군자학을 장려했다. 개인이 인격을 수양하여 인륜도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자의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내세운 인류문명의 정수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사랑과 석가의 자비, 칸트의 윤리학도 공자의 사상으로 수렴될 수 있고, 편벽된 마르크스주의에는 중용의 진리로 정문일침을 놓을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을 서로 다른 사상을 포괄할 수 있는 인류의 근본적 기초로 설정한 것이다.

 

현상윤은 공자의 사상이 사회 무질서를 극복하고 시국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제시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도 공자의 사상이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조선 유학의 가능성을 읽어내려고 한 의도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에게 조선 유학은 ‘거대한 실천력’을 지닌 사상이었다. 인륜도덕에 기초한 유학의 이상을 현실사회에 충실하게 구현했을 뿐 아니라, 시대적 과제에 따라 문장ㆍ정치ㆍ경제ㆍ이론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발달시켜 온 학문이었다. “역사적 발전의 결과를 보면, 실천유학이 출현하였다가 좌절되고 이론유학이 그에 대신하며 이론유학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게 될 때 실리주의 유학이 또 다시 등장한 것”이라는 서술은 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조선 유학으로부터 실천성을 읽어내는 것은 유학이 단지 낡은 사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면한 시대에 맞게 재해석될 수 있는 사상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상윤은 왜 굳이 동양사ㆍ세계사적 차원에서 조선 유학의 의미를 고평한 것인가. 그 이유는 현상윤이 조선의 독자성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유학이 정주학의 이론을 답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내용을 많이 발견했을 뿐 아니라, “양적이고 질적인 면에서도 조선 유학의 독특한 토대와 역량을 쌓아 올리며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유학의 죄를 모화사상에서 찾은 사실은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맥락과 연결된다. 이때 조선 유학이 독자적이었다고 하면서 모화사상을 비판하는 논리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선유학사』에서 모화사상을 비판한 사례는 정몽주뿐이다. ‘모화사상의 고취’라는 장에 거론된 김상헌ㆍ정온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절의를 부각했다. 이는 현상윤이 조선 유학의 독자성을 부각하고 싶어 했음을 시사한다.

 

현상윤이 조선 유학에서 민족단결과 인륜도덕, 실천성과 독자성을 읽어내려 했던 것은 해방 직후의 현실과 관련이 있었다. 미ㆍ소의 개입과 좌ㆍ우의 이념대립이 극을 향해 치닫는 상황에서 그는 조선 유학을 불러냈다.[각주:85] 그 결과물이 바로 『조선유학사』였다. 그는 당쟁ㆍ가족주의 등을 비판함으로써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공자의 사상을 보편적인 인류도덕의 기초로 설정한 것도 각 정치세력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유학의 가치로 포섭함으로써 민족단결을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극단의 정치’를 비판하고 ‘중용의 정치’를 통해 통일된 국내여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했다.[각주:86] 그러면서 군자학과 인륜도덕을 강조함으로써 개개인의 각성과 사회질서 재구축을 통한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물론 이때 현상윤이 군자학을 강조한 목적은 전통적 수양론의 재현이 아니라 민족국가 수립의 주체로서 근대적 공민(公民)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현상윤은 이런 의도에서 미ㆍ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조선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기 위해 모화사상을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독자성을 불러냈다. 민족단결을 통한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목적 아래 유학을 재해석한 것이다. 현상윤이 철저히 근대민족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유학을 재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현상윤이 당대의 현실을 의식하며 조선 유학사를 재해석했다면, 『조선유학사』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뚜렷한 정치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동아일보』에 게재한 논설에서 그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47년에 작성한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각주:87]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주독립을 획득하는 것이니, 연합군이 하루라도 빨리 철퇴하고 즉시 그들은 우리의 완전독립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탁통치와 같은 정치형태는 절대로 반대하는 것이다. …… 어느 때나 우리의 민국적 단결이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나, 금일 三八선을 경계로 하여 지도이념이 서로 다른 양대 강국에 분할점령을 당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일층 단결을 굳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항상 정치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된다고 믿으며, 정치해결에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단결과 국론통일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며, 자주독립을 획득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굳게 단결해야 한다.

 

이 글에서 현상윤은 연합군의 철수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 승인, 신탁통치 반대와 민족대단결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 3ㆍ1운동을 회상하면서 ‘민족적 혁명운동’으로 누차 강조한 것도 민족단결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각주:88] 이런 사실은 현상윤의 유학사 해석이 그의 정치적 입장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현상윤의 정치적 견해가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뚜렷한 정치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아일보 계열이 주도하여 결성한 한국민주당의 정치적 입장을 공유했다.[각주:89] 그런 점에서 현상윤이 한국민주당 창립 발기인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각주:90] 한국민주당은 한국의 “완전자주독립”과 “전민족의 합동일치협력”을 추구했고, 반공과 반탁을 표방했다.[각주:91] 이는 현상윤이 자신의 논설에서 밝힌 정치적 입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상윤의 유학사는 우익 계열, 특히 동아일보 계열이 주축이 된 한국민주당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을 재해석하면서 “중용의 진리를 생각하면 맑스학도에게 정문(頂門)의 침(針)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 사실도 그런 판단을 뒷받침한다.[각주:92] 따라서 현상윤은 우익계열, 특히 동아일보 계열이 취했던 정치적ㆍ사상적 입장을 공유하면서 조선 유학사를 재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6. 결론

 

혹 조선 유학을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 그 성취를 긍정하기도 했지만, 현상윤은 평생 조선 유학사 연구에 매진했다. 그에게 유학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는 왜 조선 유학사 연구에 몰두했을까.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 지식인으로 살면서 그의 유학관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통과 근대, 일본 유학(留學)과 민족운동, 식민지와 해방이라는 변수가 그의 유학사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19세기 말 평안도에서 태어난 현상윤은 성장기에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시대적 특성과 평안도라는 지역적 특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삼았던 가풍의 영향으로 전통 유학을 접했는데, 특히 현상준을 통해 전통 유학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성장기의 현상윤은 전통 유학을 수학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부호육영소학교와 대성학교, 보성학교를 거치며 신학문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대성학교 재학 시절 안창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안창호가 추구했던 주인의식ㆍ책임의식ㆍ민족의식은 대성학교 교육을 통해 현상윤의 문제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현상윤은 조선의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조선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청년이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활발하게 현실을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사회진화론적인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런 인식은 현상윤이 서양근대문명의 우월성을 예찬하게 된 계기였다. 그의 생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장덕수ㆍ송진우ㆍ김성수 등과 교유하며 형성되었고, 여기에는 일본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와 와세다 대학의 학풍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현상윤은 근대문명을 자기 사상의 중심에 배치하면서도 전통 유학과의 관계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근대와 전통 사이에서 자신의 문제의식과 사상체계를 구축해나갈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사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강력한 일본의 국력을 목격한 현상윤은 일본이 근대화할 수 있었던 요인에 관심을 두었고, 그 사상적 요인으로 양명학을 발견했다. 유학 내부에서 근대화 가능성을 발견한 것으로 근대적 맥락에서 유학을 재해석할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현상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조선 유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실학파를 통해 조선 유학사에서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을 말하고 싶어 했다.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재발견한 데는 1930년대 민족주의 세력의 문화운동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 계열의 입장을 대변하면서도 조선학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조선 유학사의 틀을 마련했다.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해방 이후 『조선유학사』로 정리되었다. 『조선유학사』는 1930년대 현상윤의 유학사 인식을 계승했지만, 차이도 있었다. 성리학과 실학에 대한 평가는 해방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변화했다. 이것은 현상윤의 유학관이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조선 유학의 과실만이 아니라 공헌과 세계사적 의의를 함께 제시했다는 사실도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 유학의 공과 죄, 세계사적 의의에는 해방 이후 현상윤의 현실인식과 정치적 입장이 반영됐다. 현상윤은 당쟁ㆍ가족주의 등을 비판하여 민족단결을 도모했고, 군자학과 인륜도덕을 강조하여 개인의 각성과 사회질서 구축의 방법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미ㆍ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조선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유학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여기에는 한국민주당의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를 재해석하는 과정은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따라서 현상윤이 재구성한 조선 유학사에는 그의 현실인식과 정치적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일관되게 동아일보 계열의 정치적 입장을 공유했다. 따라서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에는 실력양성론ㆍ근대주의ㆍ민족주의ㆍ반공주의로 표현되는 동아일보 계열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공적인 정치활동의 일환이었다. 그것은 평생토록 ‘정치적 실천’을 강조했던 그의 삶의 태도와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시기에 시작되어 해방 이후에 완성된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근대와 전통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문명을 사상의 핵심에 배치한 뒤, 근대문명과 전통유학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재해석해가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연구는 근대문명관을 중심으로 전통 유학을 변형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근대문명으로 경도되었다고 평가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윤은 어느 한 쪽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는 근대문명과 전통 유학 모두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다만 정치적 실천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가 근대문명과 유학에 부여하는 가치의 위계가 달랐을 뿐이다.

 

 

*이 글은 2016년 2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전공수업 '역사논문작성'에서 학부 졸업 논문으로 작성한 글임

 

 

  1. 고영진, 1994, 「한글로 쓴 최초의 한국유학통사 :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역사와 현실』 14. [본문으로]
  2. 최영성, 2006, 『한국유학통사』, 심산 ; 최영성, 2009, 「조선사상사ㆍ조선유학사 연구의 선구자, 기당 현상윤」, 『오늘의 동양사상』 20. [본문으로]
  3. 조종환, 1984, 「玄相允의 生涯와 思想」,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조종환, 1986, 「玄相允의 救國運動小考 (그의 文學, 三ㆍ一運動 推進, 敎育活動을 중심으로)」, 『경희사학』 12ㆍ13 ; 조종환, 1987, 「玄相允의 敎育救國思想小考」, 『경희사학』 14. [본문으로]
  4. 최선웅, 2009, 「1910~20년대 玄相允의 자본주의 근대문명론과 개조」,『역사문제연구』21 ; 김기승, 2008, 「현상윤과 3ㆍ1운동」, 『공자학』 15 ; 이태훈, 2011, 「해방 후 현상윤의 유학(儒學)인식과 사상적 지향 -평가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38; 김지수, 2012, 「현상윤의 민족의식 형성과 3·1운동에서 역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0. [본문으로]
  5. 염복규, 2011, 「식민지 지식인의 유교 이해와 근대주의 : 幾堂 玄相允(1893~1950)의 경우」, 『사학연구』 101. 이 연구에서는 “『조선유학사』단계에 오면 성리학에 대해 끊임 없이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도 그 사상적 깊이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고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방 전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태도이다.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해방이라는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현상윤이 다른 유교 비판자들과 달리 성리학의 내적 논리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듯이 유학에 관한 ‘제한적인 고평’의 가능성은 이미 1930년대 이후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현상윤의 유학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기적이고 맥락적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본문으로]
  6. 오상무, 2008,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 연보(年譜)」, 『공자학』15. [본문으로]
  7. 현상윤, 「고조(高祖) 효자부군(孝子府君) 묘표(墓表) 음기(陰記)」(1940),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41면). 물론 이 기록은 묘문(墓文)이므로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현상윤 집안이 대대로 평안도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8. 『純祖實錄』, 純祖 12年(1812) 5月 4日 乙亥(“玄仁福, 本以士人”) ; 『承政院日記』, 純祖 12年(1812) 5月 16日 丁亥(“旣以世鄕, 且尙儒業.”). [본문으로]
  9. 『高宗實錄』, 高宗 29年(1892) 1月 26日 丙戌 ; 『承政院日記』, 高宗 29年(1892) 6月 6日 壬辰 ; 『承政院日記』, 高宗 31年(1894) 1月 28日 甲申. 도기(到記)란 “성균관 유생이 식당에 들어간 횟수를 적던 장부”를 말한다. 아침ㆍ저녁 두 끼를 1도로 계산하는데, 50도를 채우면 봄과 가을에 과거를 칠 수 있었다. 1892년에 28살이었던 현석태가 춘도기에 응시했다는 사실은 그가 성균관에서 공부했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현상윤, 「진암(鎭菴) 현선생(玄先生) 제문」(1938),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23면). [본문으로]
  11. 현상윤, 「진암선생문집(書鎭菴先生文集)의 뒤에 쓰다」(1939),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32면). [본문으로]
  12.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상윤의 형 현상조가 수학한 백례행(白禮行)의 스승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도 화서학파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화서학파가 평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는 박문일과 유인석의 영향이 컸다. [본문으로]
  13. 이상주, 2015, 「柳麟錫의 關西地方에서의 崇華活動과 「石溪九曲歌」」, 『고전과 해석』 19. [본문으로]
  14. 현상윤, 「진암선생문집(書鎭菴先生文集)의 뒤에 쓰다」(1939),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32면). [본문으로]
  15. 현상윤, 「진암(鎭菴) 현선생(玄先生) 제문」(1938),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23면). [본문으로]
  16. 현상윤, 「진암선생문집(書鎭菴先生文集)의 뒤에 쓰다」(1939),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 432면). [본문으로]
  17. 「名士諸氏의 學生時代 回顧」, 『新東亞』 1935년 7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5, 184~185면). [본문으로]
  18. 현상윤, 「恥堂白彛行先生挽」, 『新東亞』 1935년 4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5, 186~187면). [본문으로]
  19. 오수창, 2002,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일조각, 10~16면. [본문으로]
  20. 임인재, 2015, 「1895~1910년 평안도 사립학교 설립 과정과 주체」, 『사학연구』 120. [본문으로]
  21. 「名士諸氏의 學生時代 回顧」, 『新東亞』 1935년 7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5, 184~185면). [본문으로]
  22. 「名學校校長 學生時代의 逸話」, 『新東亞』 1934년 11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5, 178면). [본문으로]
  23. 「國內同胞에게 드림 (三)」, 『東亞日報』 1925.01.25. 이 논설은 1920년대 중반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성학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논설에서 강조된 책임의식과 주인의식은 그가 이미 대성학교 설립 당시부터 강조하던 가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명화, 2008, 「도산의 교육관과 초기 미주 한인사회의 교육」,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1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24. 이명화, 2008, 앞의 글. [본문으로]
  25. 오상무, 2008, 앞의 글. [본문으로]
  26. 현상윤, 「無題」(1914.01.06.), 『小星의 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권, 127면). [본문으로]
  27. 현상윤, 「逼迫」(1917.06.), 『靑春』 제8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19면). 현상윤의 자전적인 단편소설「핍박」이 발표된 것은 1917년이지만, 글의 말미에는 “癸丑五月二十七日夜”라고 적혀 있다. 계축년은 1913년에 해당하므로 1913년에 쓴 소설을 1917년에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8. 염복규, 2011, 앞의 글. [본문으로]
  29. 현상윤, 「求하는 바 靑年이 그 누구냐?」(1914.12), 『學之光』 제3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39~341면). [본문으로]
  30. 현상윤, 「求하는 바 靑年이 그 누구냐?」(1914.12),『學之光』 제3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39~340면). [본문으로]
  31. 현상윤, 「社會의 批判과 및 標準」(1915.05.), 『學之光』 제5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58~359면). [본문으로]
  32. 현상윤, 「말을 半島靑年에게 부침」(1915.02.), 『學之光』 제4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49면). [본문으로]
  33. 현상윤, 「强力主義와 朝鮮靑年」(1915.07), 『學之光』 제6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64~365면). [본문으로]
  34. 현상윤, 「東西文明의 差異와 及 其將來」(1917.11.), 『靑春』 제11호(『기당 현상윤 전집』 4, 326면). [본문으로]
  35. 현상윤, 「東西文明의 差異와 及 其將來」(1917.11.), 『靑春』 제11호(『기당 현상윤 전집』 4, 326면). [본문으로]
  36. 현상윤, 「東西文明의 差異와 及 其將來」(1917.11.), 『靑春』 제11호(『기당 현상윤 전집』 4, 326면). 현상윤이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양 사상을 ‘몰아망아’(沒我忘我), ‘멸지천식’(滅知賤識), ‘이기주의’로 규정한 것이 정말 현상윤 자신의 생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이 현상윤의 학부논문 중 일부라는 점, 현상윤이 이 글을 쓰기 몇 달 전 유학의 논리를 구사해 한문 사용 폐지에 반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동서문명을 비교한 이 글을 문면 그대로 다 현상윤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37. 김인덕, 1995, 「학우회의 조직과 활동」, 『국사관논총』 66. [본문으로]
  38. 김인덕, 1995, 앞의 글. [본문으로]
  39. 이광수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15년이지만, 유학 초기에 ‘학우회’ 활동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1914~1917년 사이의 임원 명단에서는 이광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김인덕, 1995, 앞의 글) 그러나 현상윤이 1914년 12월에 이광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형님이 오산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은 일전 경성으로 오는 송진우 형에게 대강을 들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미 이들 사이에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현상윤이 이광수를 처음 만난 것은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일 것이다. 현상윤과 이광수 모두 정주 출신이고, 대성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으며, 나이 차이도 한 살밖에 나지 않는다.) [본문으로]
  40. 박찬승, 2007, 「1910년대 도일 유학생의 사상적 동향」, 『한일공동연구총서』 5. [본문으로]
  41. 박찬승, 2007, 앞의 글 ; 심재욱, 1997, 「古下 宋鎭禹의 思想과 活動 硏究」,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심재욱, 2007, 「雪山 張德秀(1894~1947)의 政治活動과 國家認識」,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본문으로]
  42. 현상윤, 「李光洙君의 [우리의 理想]을 讀함」(1918.03.), 『學之光』 제15호.(『기당 현상윤 전집』 4, 369면.) [본문으로]
  43. 김성수ㆍ송진우ㆍ장덕수 등 ‘동아일보 계열’이 주축이 된 1920년대 문화운동에 현상윤이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서로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지를 보여준다. 현상윤은 김성수가 세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고(1921), 동아일보 계열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도 참여했다. 『기당 현상윤 전집』 에 실린 논설ㆍ담화문ㆍ좌담 169편 중 『東亞日報』와 『新東亞』에 게재된 것이 가장 많다는 사실(58편)에서도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상윤을 인촌 김성수로 대표되는 인맥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염복규, 2011, 앞의 글)는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44. 朝尾直弘, 이계황 외 역, 2003,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477~479면. [본문으로]
  45. 김경택, 1999, 「1910·20年代 東亞日報 主導層의 政治經濟思想 硏究」,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87면. [본문으로]
  46. 김경택, 1999, 앞의 글, 87~91면. [본문으로]
  47. 현상윤, 「漢文不可廢論」(1917.04.), 『朝鮮文藝』(『기당 현상윤 전집』 4, 300~306면). [본문으로]
  48. 최선웅, 2009, 앞의 글. [본문으로]
  49. 현상윤, 「中庸과 極端」(1918.06), 『靑春』 제14호(『기당 현상윤 전집』 5, 341면). [본문으로]
  50. 김지수, 2012, 앞의 글. [본문으로]
  51. 현상윤, 「十年 以內에 日米가 對戰」, 『東光』 1931년 11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5). [본문으로]
  52. “이 偉大한 事業은 如何히 하야 成就된 것이냐? 우리는 이것을 硏究하고 探索하여 볼 必要가 있는 것이다. 이 點에 對하여는 中華民國에서도 그 必要를 感하여 梁啓超, 章炳麟 等의 先輩들은 勿論이오, 最近 南京政府에서도 日本의 三浦博士를 招聘하여 維新 以後의 日本近世史를 講學하던 것이다.”라는 현상윤의 서술은 그가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을 분석한 의도를 잘 담고 있다.(현상윤, 「維新의 原動力」, 『東亞日報』 1932.01.01.~1932.01.15.(『기당 현상윤 전집』 4, 138면)) [본문으로]
  53. 현상윤, 「維新의 原動力」, 『東亞日報』 1932.01.01.~1932.01.15.(『기당 현상윤 전집』 4, 137면). [본문으로]
  54. 현상윤, 「維新의 原動力」, 『東亞日報』 1932.01.01.~1932.01.15.(『기당 현상윤 전집』 4, 137면). [본문으로]
  55. 현상윤, 「陽明學과 日本思想界」, 『新東亞』 1932년 11월호(『기당 현상윤 전집』 4, 257~258면). [본문으로]
  56. 현상윤, 「李朝儒學史上의 丁茶山과 그 位置」, 『東亞日報』 1935.07.16. [본문으로]
  57. 현상윤, 「李朝儒學史上의 丁茶山과 그 位置」, 『東亞日報』 1935.07.16. [본문으로]
  58. 현상윤, 「李朝儒學史上의 丁茶山과 그 位置」, 『東亞日報』 1935.07.16. [본문으로]
  59. 망국의 책임을 주자학에 전가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실학파로 표현되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사상 내부로부터 근대의 흔적 또는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아내려 했던 것은 현상윤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뒤에 서술한 것처럼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던 정인보와도 다른 태도였다. [본문으로]
  60. 1930년대 초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운동론’ 등장배경과 성격에 관해서는 이지원, 1994, 「1930년대 前半 民族主義 文化運動論의 性格」, 『국사관논총』 51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61. 현상윤의 이력으로 보아, 그가 동아일보 계열의 문화운동론을 대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미 1920년대부터 동아일보의 문화운동에 몸담았다. 1923년에는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이었고, 김성수가 운영하던 중앙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비록 1925년 폐병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했지만, 1932년에 다시 중앙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는 1930년대 초에도 현상윤이 동아일보 계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62. 염복규, 2011, 앞의 글. [본문으로]
  63. 현상윤, 「朝鮮學이라는 ‘名辭’에 反對」,『東亞日報』 1934.09.1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206~207면). [본문으로]
  64. 현상윤이 1940년에 정인보에게 보낸 여러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40년에 현상윤이 정인보에게 자신의 선조와 장인의 묘문을 부탁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관계였다. 특히 정인보에게 화답한 시 중에 “정 깊으니 문을 닫아걸고 도(道) 같으니 맥락은 이어져있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사이에 사상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현상윤, 「和鄭薝園寅普 二首」, 『幾堂漫筆』(『기당 현상윤 전집』 5권, 455면)) 현상윤이 1921년에 중앙고보 교장이 되었다는 사실과 정인보가 1924년에 동아일보 논설진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현상윤과 정인보가 처음 관계를 맺은 시점은 늦어도 1920년대 중반일 것이다. 그러나 현상윤의 유학관이 정인보와 관계 맺은 시점부터 달라졌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현상윤이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정주에서 요양하는 동안 유학에 관해 쓴 글이 없기 때문이다. 1927년에 자신의 병을 걱정하는 송진우에게 “이미 활에 다친 새와 같은 신세인지라 굽은 나무만 보고도 놀라 날아갈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아직도 오전 오후 각 2시간가량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고 앞으로도 수년 간 이처럼 고요히 양병(養病)함을 생각해야 할 뿐입니다.”라고 한 점을 보아 별도의 연구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실학에 관한 정인보의 아이디어가 나타나는 시점도 1920년대 후반부터이다.(정인보, 「序」, 『星湖僿說』) 그렇다면 현상윤의 유학관은 요양 이후인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에 적극적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본문으로]
  65. 「茶山逝世百年紀念會合」, 『東亞日報』 1935.07.16. [본문으로]
  66. 정인보의 양명학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특히 최재목, 2008, 「鄭寅普 ‘陽明學’ 형성의 ‘知形圖’ -‘世界’와의 ‘호흡’, 그 重層性과 관련하여-」, 『동방학지』 143을 참고할 것. 이 연구는 양명학에 관한 정인보의 관심이 동아시아의 양명학 연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본문으로]
  67. 정인보, 「茶山先生의 一生」, 『東亞日報』 1933.07.16. [본문으로]
  68. 현상윤과 정인보의 문제의식이 달랐던 데는 그들이 몸담았던 문화운동 계열 외에도 두 사람의 집안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정인보는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동래(東萊) 정씨 가문의 후예로 소론계의 국학연구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조선 유학에서 근대적 요소를 발견하기보다 국학연구에 매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정인보가 현상윤에 비해 양명학을 중시했던 것도 집안환경의 영향이 크다. 동래 정씨 가문은 정동유(鄭東愈)가 강화학파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래로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했다. 정인보가 양명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조성산, 2010,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역사와 담론』 56) 반면, 현상윤은 관서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 내내 정치적 차별의 대상이었던 평안도에서 사족층이 형성될 수 없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정인보에 비해 조선시대 ‘정통유학’과 당색(黨色)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거쳐 근대문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본문으로]
  69. 윤덕영, 2015, 「위당 정인보의 조선학 인식과 지향」, 『한국사상사학』 50. [본문으로]
  70. 정인보는 『성호사설』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보다 앞서 경제(經濟)를 말한 시조는 유반계(柳磻溪 : 유형원)였는데, 그 박후돈각(樸厚敦慤)함을 따져보면 주나라ㆍ한나라에 가까웠지만, 다만 시대풍조에 영향을 받아 주나라를 존중하는 뜻이 강했고, 더러는 남의 것에 근본을 두고 우리 것에 의거하지 않기도 했다. 선생(이익)은 우리나라에 뿌리를 두고 백성들이 보고 듣는 실제를 증명하였기에, 가여워하는 슬픔으로 인민의 의지하는 바를 자세히 통찰하였고, 옛 성인의 제도에 합치하기를 의도하지 않았다.”(정인보, 「序」, 『星湖僿說』) [본문으로]
  71. 동아일보의 문화운동과 조선학 운동의 방법적 차이는 이지원, 1994, 앞의 글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72. 현상윤, 「朝鮮學이라는 ‘名辭’에 反對」, 『東亞日報』 1934.09.1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206~207면). [본문으로]
  73. 최선웅, 2015, 「정인보와 동아일보-조선학을 둘러싼 접점」, 『한국인물사연구』 23. [본문으로]
  74. 최선웅, 2015, 앞의 글. [본문으로]
  75. 윤덕영, 2015, 앞의 글. [본문으로]
  76. 현상윤, 이형성 교주, 2008, 『조선유학사』(『기당 현상윤 전집』3), 나남출판, 40면. 해방 이후 조선 유학에 관한 서술은 별도의 각주가 없는 한 모두 나남출판사에서 간행된 『조선유학사』의 내용을 활용ㆍ인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77. 김태년, 2010, 「학안에서 철학사로-조선유학사 서술의 관점과 방식에 대한 검토」, 『한국학연구』 23. [본문으로]
  78. 『조선유학사』의 체재는 다카하시 도오루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종일에 따르면, 다카하시 도오루는 1924년에 간행된 『조선유학대관』에서 “「고려의 유학」과 「조선의 유학」을 나누고 조선의 유학을 다시 1.초기유학, 2.이황 이전의 유학, 3.이황과 이이, 4.이황ㆍ이이 이후의 유학 등으로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서술 편차는 기당이 『조선유학사』를 쓰면서 성리학을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또한 「퇴ㆍ율 전후의 일반 명유」라는 서술 방법을 취하는 데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서 “퇴계와 율곡의 사칠론(四七論)에 이어서 그 이후 성리학을 주리파와 주기파로 나누고 영남학과 기호학의 특징으로 서술한 것”은 다카하시 도오루가 「이조유학에 있어서 주리파 주기파의 발달」에서 제시한 조선 유학 분류 형식을 수용했다고 한다.(오종일, 2008, 「기당 『조선유학사』의 저술배경과 그 가치」, 『공자학』 15) 실제로 다카하시 도오루는 “나의 논문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파ㆍ주기파 발달’과 같은 체계”라고 하였다.(다카하시 도오루, 조남호 역, 1999, 『조선의 유학』, 소나무, 364면) 현상윤이 『조선유학사』 여러 곳에서 다카하시 도오루의 글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카하시 도오루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다만 현상윤이 다카하시 도오루의 글을 인용한 맥락은 퇴계에 대한 고평이나 문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유학에 관한 현상윤의 평가는 조선 유학의 특이성으로 주자학 신봉을 강조했던 다카하시 도오루와는 달랐다. 이는 다카하시 도오루의 『조선유학사』 서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다카하시 도오루, 조남호 역, 1999, 앞의 책, 364~366면) 그런 점에서 현상윤과 다카하시 도오루가 조선 유학을 재해석한 의도와 맥락이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79. 이 장에서는 ‘경제학파’와 ‘실학파’ 두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할 것이다. 『조선유학사』의 서술에는 “‘경제학파’는 일명 ‘실학파(實學派)’라고도 불린다”고 하여 두 용어 사이에 별 다른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경제학파’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경국제민의 학문에 힘썼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성리학을 더 이상 ‘허학’(虛學)으로 치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경제학파’라는 용어를 채택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80. 현상윤, 「孔子와 그 思想」, 『東亞日報』 1949.10.21.~10.2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83~191면). [본문으로]
  81. 현상윤, 「우리의 自覺과 生活의 新原理」, 『東亞日報』 1933.07.28.~08.0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51~160면). 현상윤이 조선 유학사의 폐단으로 ‘문약’을 든 것은 그가 평안도 출신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원래 우리가 祖先 때부터 그렇게 弱한 것은 아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고대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 보아서 文으로 이름난 것보다 武로 이름난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李朝에 와서는 突變하여 버리고 말았다. …… 平安道나 咸鏡道가 다 같이 國土로되 他道에 比하여 下待를 받은 것은 西北諸道가 所謂 弓馬之鄕이 되는 까닭이었다.”고 한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현상윤, 「우리의 自覺과 生活의 新原理」, 『東亞日報』 1933.07.28.~08.0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51~160면)) [본문으로]
  82. 이는 『조선유학사』가 기본적으로 1930년대 유학사 인식을 계승한 것임을 의미한다. 다만 이학 숭상ㆍ사상통제가 『조선유학사』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성리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본문으로]
  83. 현상윤이 조선유학의 공으로 청렴절의를 강조한 것은 해방 직후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는“解放 以後 三年 동안 官紀의 解弛에 대하여는 瀆職嫌疑로 起訴된 數件의 많은 것으로 보거나 또는 巷間의 風聞으로 들어서 遺憾이나마 隱蔽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고 하였는데, 당시 관료의 부패와 비행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상윤은 “政府는 먼저 이 점에 留意하여 官紀를 경장하고 吏道 振興에 奮起할 것이다. 그 方法은 먼저 率先垂範에 있다. 大統領 以下 上部에 있는 責任者가 各各 淸廉高潔과 犧牲奉公의 精神으로써 一切의 情實을 排除하고 오직 公平正直을 標榜하여 나가면 下部의 官紀는 저절로 肅淸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유학사에서 청렴절의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현상윤, 「官紀更張과 吏道振興」, 『東亞日報』 1948.08.15.(『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79~180면)) [본문으로]
  84. 현상윤, 「孔子와 그 思想」, 『東亞日報』 1949.10.21.~10.2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83~191면). [본문으로]
  85. 물론 해방 이후 현상윤의 정치적 입장이 그 자신의 생각인지, 또 조선 유학사 재해석을 굳이 정치적 맥락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이 1920년대 이래 장덕수ㆍ송진우ㆍ이광수 등과 관계 맺으며 꾸준히 ‘정치적 실천’을 강조해왔고, 그 연장선에서 1930년대 조선 유학에 주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방 이후의 『조선유학사』 저술도 ‘정치적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86. 현상윤, 「中庸을 取하라 一時的 極端을 버리고」, 『東亞日報』 1946.08.16.(『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71면). [본문으로]
  87. 현상윤, 「民族 總團結의 秋 學生은 惡條件을 克服코 勉學하라」, 『東亞日報』 1947.01.04.(『기당 현상윤 전집』 4권, 209~210면). [본문으로]
  88. 현상윤, 「三一運動의 回想」, 『新天地』 1946년 3월호(『기당 현상윤 전집』4, 272면) ; 현상윤, 「三一運動의 意義」, 『東亞日報』 1948.02.29.(『기당 현상윤 전집』4, 173면) [본문으로]
  89. 이태훈, 2011, 앞의 글. [본문으로]
  90. 「韓國民主黨 發起會 開催」, 『每日申報』 1945.09.09. [본문으로]
  91. 「韓民黨鬪爭史(2)」, 『東亞日報』 1949.01.28 [본문으로]
  92. 현상윤, 「孔子와 그 思想」, 『東亞日報』 1949.10.21.~10.23.(『기당 현상윤 전집』 4권, 183~191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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