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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by 衍坡 2018. 4. 14.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상징 공간, 청계천

 

 

 

1. 복원된 청계천의 비극

 

2005년 10월, 복원공사를 마친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2002년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이명박이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건 지 약 3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청계천 복원이 공약으로 제시되었을 때, 언론과 전문가들은 청계천 복원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대효과는 이런 것이었다. ① 청계천의 역사성을 회복함으로써 서울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되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 ② 친환경 생태하천을 복원하여 대중의 환경의식을 고양할 수 있다. ③ 청계천 주변의 상업 활성화 등으로 서울시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경제적 효과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는 청계천의 ‘역사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사에 앞서 청계천의 역사성이 무엇인지, 그 역사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복원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유물의 원형이 훼손되고 그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었다. 수표교의 “귀틀석이 사라지고 동자석의 위치가 달라”지는가 하면, 오간수문 터는 다른 자리로 옮겨졌다. 심지어 복원사업을 주도했던 이명박 서울시장은 공사 도중 발견된 유적ㆍ유물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전문가들은 서울시의 사업 방식을 비판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청계천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은 오랫동안 중랑구 하수종말처리장에 방치되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계천의 역사성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환경 생태하천 복원이라는 기대 역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환경연합 하천위원장이자 건국대 환경학과 교수인 황순진에 따르면, 청계천에는 “어류가 휴식을 취하고 먹이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인 소(pool·돌 틈 사이 물이 고인 곳) 등이 부족”하고, “산란터나 은신처 역할을 해주는 침수성 수초더미도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오염에 강하고 생존력과 번식력이 좋은 붕어가 많았다.” 한 마디로 청계천은 “어류가 살기에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건설기술연구원의 연구원 안홍규도 청계천이 “관상학적 측면만 강조”됐을 뿐 “생물이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들을 고려한다면, 청계천이 친환경 생태하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청계천 일대를 재개발하면서 적지 않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청계천의 경제적 가치는 약 1,902억”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청계천의 경제적 편익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적지 않았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청계천 변의 노점상들이었다. 복원사업으로 청계천 변에서 쫓겨난 노점상들에게 새로운 상업 공간을 제공하겠다던 이명박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시가 송파구에 ‘가든파이브’라는 새로운 상업 공간을 마련하긴 했지만, 그것이 청계천 변 노점상을 위한 대책은 아니었다. 가든파이브의 분양가는 서울시가 노점상들에게 제공한 보상금보다 월등히 높았다. 결국 노점상 대부분은 가든파이브 입점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2000억에 가까운 경제적 편익은 적어도 힘없는 노점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청계천은 역설적으로 서울시 재정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2013년을 기준으로 보면 복원된 청계천을 유지ㆍ보수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총 565억에 달한다. 매년 평균적으로 75억이 투입된 셈인데, 이는 애초에 서울시가 1년 유지비로 예상했던 18억을 훨씬 초과한 금액이다. 복원된 청계천은 경제적 이익만큼이나 적잖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왜 이런 문제들이 발생했을까. 그 이유는 이명박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의 진행방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을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최단기간에 최소비용으로 최대성과를 산출해야 한다는 개발논리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공사 기간과 비용을 단축하고자 24시간 공사를 강행하는가 하면 어떠한 대안도 없이 청계천 유물들을 하수처리장으로 옮겨버렸다. 이런 ‘전략’은 실제로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고, 이명박이 추진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이끌어내는 데 이바지했다. 문제는 공사가 급박하게 진행되어 여론 수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생계를 위한 대책을 요구하는 노점상과 유물ㆍ유적 훼손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개발논리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특징은 건축물의 ‘가시적 효과’가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명박은 청계천을 복원하여 서울 도심에 하나의 ‘랜드마크’를 건설하려고 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세계적인 조형물”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올덴버그(Claes Oldenburg)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서울시의 결정에 전문가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청계천의 역사성ㆍ장소성과 전혀 관련이 없는 올덴버그의 조형물을 세우는 데 아무런 여론수렴 없이 35억 원을 투입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끝내 청계천 머리에 올덴버그의 조형물을 세웠다. 전문가들의 반발을 묵살하면서까지 굳이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조형물을 세운 서울시의 결정은, 이명박이 랜드마크 건설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점은 “청계천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세운 조형물을 보기 위해 올 정도로 대단한 명소를 만들 것”이라는 이명박 본인의 발언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왜 굳이 랜드마크 건설에 힘을 쏟은 것일까. 랜드마크가 자신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이명박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승효상은 1960-7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가시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랜드마크에 집착하는 “랜드마크 콤플렉스”에 걸린 것 같다고 지적했는데,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명박은 랜드마크의 효과를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청계천 복원의 목표는 처음부터 역사성 회복이나 생태하천 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경제적 이익 창출’이 중요했다. 그마저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최단기간에 최소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가시적 성과를 산출하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성과 위주의 개발논리 안에서 복원사업의 다각적인 측면과 복잡한 문제들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였다. 다양한 견해와 의견이 수렴될 수도 없었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 역시 생략되고 말았다. 그 결과 청계천의 유물과 유적은 철저히 훼손되었고, 청계천 변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다. 성과주의적 개발논리 아래 복원된 청계천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박 청계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의해 다시 복원된 청계천 

 

 

 

2.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의 기원 : 청계천 복개와 고가도로 건설

 

청계천 복원 사업을 지배한 개발논리를 단지 이명박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사업은 수십 년 동안 개발과 성장의 논리에 포착된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개발논리는 이미 19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것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ㆍ세월호 참사 등의 기원이 19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청계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청계천 복원 과정을 관통했던 개발논리는 1960년대 청계천 복개사업과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이끌었던 개발논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청계천 복원 과정을 관통했던 개발논리의 기원은 청계천 복개사업과 청계고가도로 건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계천을 복개(覆蓋)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식민지 시기 끝자락에 등장했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래로 도성(都城)의 하수구로 기능했던 청계천은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인 준설의 대상이었다.[각주:1] 이는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져 1920년대까지 몇 차례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1920년대 이래로 준설공사가 축소되면서 청계천은 토사와 도시의 오물로 가득 찼고, 위생문제와 홍수문제 같은 도시문제를 양산했다. 청계천을 복개하자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청계천 복개사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청계천은 홍수와 전염병 같은 도시문제의 온상이었다.

 

 

오간수문 복개구간

 

 

 

▲오간수문의 위치와 청계천 복개 구간 

 

 

청계천 복개 논의는 1958년 허정(許政)이 서울시장에 취임한 직후에 다시 등장했다. 서울시는 1958년 3월 광교부터 오간수교까지 약 2.4km 구간을 복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9월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복개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예산문제였다. 손정목에 따르면 당시 서울시는 “직원들의 봉급과 최소한의 사무비, 그리고 전재민 구호비 등 필요경비를 지출하고 나면 건설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용재원은 거의 남지 않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계천 복개사업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한 가지 문제는 청계천 주변에 즐비해 있던 판자촌이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형성되었던 판자촌은, 처음에 오간수문 주변에서 생겨나 종로 3가 일대까지 확장됐다. 서울 도심에 대규모의 판자촌이 형성된 것이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시내 한복판에 대규모 판자촌이 생기는 것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판자촌은 화재사고의 온상이었을 뿐 아니라, 도시계획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런 이유로 서울시는 여러 차례 청계천 주변의 판자촌을 철거하려고 했지만, 전쟁 이후 갈 곳을 잃고 청계천 변에 정착한 이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다. 이 같은 사정은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계천 암거(暗渠) 작업은 주위에 있는 무허가 판잣집 때문에 벌써 수개월 중단”되었다. “판잣집을 강제철거하기 위하여 강권(强權)까지 발동할 것을 결정한 바 있으나 그것도 막상 실천에 옮기려다 지지부진”했다. 판자촌이 철거되지 않는 상황에서 복개공사가 계획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지지부진하던 청계천 복개사업은 5.16쿠데타를 계기로 전기를 맞았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때 서울시장으로 새로 임명된 인물은 윤태일(尹泰日)이었다. 윤태일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선배로 광복 이후 육군공병학교장ㆍ제36보병사단장 등을 역임하다가 5.16쿠데타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윤태일은 곧바로 판자촌 철거 작업에 착수했다. 서울시는 “서울의 신작로 ‘중앙로’를 휩쓸어 길 양편에 보기 싫게 들어섰던 판잣집이며 무허가 가게들을 깨끗이 철거해버렸다.” 몇 년 동안 해결되지 않던 판자촌 철거문제가 단숨에 해결된 것이다. 판자촌 철거 문제가 해결되자 청계천 복개공사도 탄력을 받아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문제는 청계천 변 판자촌을 철거하는 방식이다. 청계천 판자촌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철거되었다. 이 점은 당시 서울 시내 다른 지역의 판자촌을 철거하는 방식에서 짐작할 수 있다. 1961년 5월 21일, 영등포 일대 판자촌에 거주하던 이상용은 자신의 판잣집을 철거하려는 경찰관을 폭행했다. 그는 곧바로 구속되어 군법회의에 서야했다. 같은 시기에 서울 도심의 판자촌이 대대적으로 철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청계천 변 판자촌 역시 강압적인 방식으로 철거되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판자촌 거주민에 대한 이주대책이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같은 해 5월 23일, 윤태일은 기자회견에서 판자촌을 철저하게 철거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철거 후 대책은 강구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철거민을 위한 이주대책조차 마련하지 않고 판자촌 거주민들을 쫓아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득과 협상, 대화와 타협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가장 빠르게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가시적 성과를 내는 일이 중요했을 뿐이다.

 

물론 청계천 복개 과정에서 보여준 군사정권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는 쿠데타 직후의 특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최단기간에 최소비용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려는 일방적인 개발방식은 1963년 민정이양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점은 삼일고가도로(뒤에 ‘청계고가도로’)를 짓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66년 서울시장이 된 군인 출신의 김현옥(金玄玉)은 취임 직후부터 청계천 복개도로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땅을 파고 건설하는 것이 나의 소신이며 철학”이라는 김현옥 본인의 발언을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1967년 8월 8일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3년 동안 35억 원을 투입해 미아리-용두동-청계천-세종로-서대문-홍제동ㆍ신촌ㆍ삼각지를 잇는 고가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삼일고가도로 건설 계획안

▲삼일고가도로 건설 계획안

 

 

김현옥의 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즉각 전문가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전(前)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한정섭은 두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자동차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고가도로는 굳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공사비를 대중교통 확충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고가도로는 외곽교통을 원활히 하는 것이므로 도심에는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현옥은 한정섭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가도로 건설계획 발표 불과 일주일만인 8월 15일에 박정희가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착공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공사는 기공식으로부터 두 달이 지난 10월 14일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삼일고가도로 건설계획이 애초에 ‘무설계 무예산’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공식 당시까지도 삼일고가도로를 위한 설계와 예산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김현옥은 기공식 이후에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면서 예산을 그때그때 충당하는 방식으로 고가도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1969년 삼일고가도로의 첫 번째 구간이 완공되었다.

 

청계천 개발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보면, 군사정권의 개발 방식이 지닌 독특한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강력한 추진력을 앞세우며 최단기간ㆍ최소비용으로 최대한의 가시적 성과를 내려고 했다. 심지어 김현옥은 “공정(工程)이 길면 업자들의 부정이 있기 쉬우므로 모든 공사는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오직 중요한 것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성과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어떤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인 대화와 타협은 성과 중심의 개발논리 속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특징은 ‘가시적 효과’가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무예산 무설계’를 무릅쓰고 삼일고가도로 건설을 강행한 것은, 그것이 미치는 ‘가시적 효과’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시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감수하면서까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시장 취임 직후 김현옥은 “시비(市費)의 50% 이상을 건설 사업에 주입, 교통망 정비, 관광개발 및 세제개혁까지도 도시건설을 위주로 해나갈 방침”이라고 천명했고, 그 두 달 뒤에는 “서울시 예산의 60% 이상을 건설공사에 투자했다”고 밝혔다. 이듬해 1월 1일에는 순수시비의 “75%에 해당하는 1백 58억 원을 건설사업”에 투입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김현옥이 건설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것은 건설 사업이 ‘발전상’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공공연하게 “땅을 파고 건설하는 것이 나의 소신이며 철학이다”라고 한 사실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2000년대 청계천 복원공사에서 나타난 개발논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청계천 복원공사 과정에서 등장했던 개발논리의 기원은 사실상 1960년대 군사정권의 개발논리에서 기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현옥의 “급격한 토건 중심의 도심행정이 그 이후 서울시장의 모델이 되어 버렸다”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평가는 이런 맥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3. 영조의 준천사업, 우리의 ‘오래된 미래’

 

수십 년간 청계천의 모습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청계천은 여전히 성과 중심의 개발논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물론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한 한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많은 성과를 내려는 태도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결과와 성과만이 최우선의 가치가 되면, 다른 모든 가치가 그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에 종속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득과 타협, 토론과 협상이라는 절차가 모조리 무시된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비용과 문제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청계천 복개ㆍ복원과정은 그러한 개발논리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청계천에서 이런 현실의 대안을 모색할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영조의 청계천 준설[준천(濬川)]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왕의 의지에 따라 일방적으로 국가가 운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합의된 의사결정 과정이 있었다. 국왕 역시 그 절차에 따라 일의 가부(可否)를 결정하고 실천했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은 철저히 이 과정에 기초해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영조가 청계천 준설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과정은 성과주의적 개발논리에 포착된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대안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어떤 과정을 거쳐 준천(濬川)을 실시했을까?

 

 

준천시사열부도

▲영조가 준천 사업을 독려하던 모습을 담은 그림, '준천시사열무도' 

 

 

우선 청계천을 준설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의 상주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자연스럽게 서울의 규모도 커졌다. 그 구체적인 변화를 살펴보면, 1657년(효종 8)에 80,572명이던 서울 인구는 1669년(현종 10)까지 194,000명으로 급증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구휼의 혜택을 입으려는 지방민들이 서울로 몰려드는가 하면, 농촌에서 발생한 실업자들이 일거리를 얻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훈련도감 설치와 함께 생겨난 직업군인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기도 했다. 서울 인구가 급증하자 다양한 도시 문제들이 생겨났다. 주택부족으로 청계천 변에 불법 거주지가 형성되면서 오물 배출량도 늘어났다. 이때 발생한 오물과 토사는 당시 하수도 기능을 하던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퇴적됐고, 하천 바닥이 높아지면서 홍수 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청계천 준설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영조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1752년(영조 28) 영조는 직접 광통교에서 백성을 만나 준천에 관한 여론을 경청했다. 물론 준천이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상당한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58년(영조 34) 영조는 대신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다시 준천 문제를 꺼냈다.

 

영  조 : 지난번에 광충교(廣衝橋 : 광통교)를 보니 전에 비해 더욱 흙이 막혀 있으니 가히 걱정스럽다.

홍봉한 : 하천 도랑을 준설하는 것은 불타는 사람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시급한 일입니다. 만약 홍수를 만난다면 개천 주변의 인가(人家)가 반드시 표류하거나 물에 잠길 것입니다.

영  조 : 경들은 도랑을 준설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가?

홍봉한 : 만일 신들에게 그 일을 담당하게 하신다면 어찌 온힘을 다해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영  조 : 서울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비록 하천을 준설해도 토사를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 : 혹은 배로 운반하고, 혹은 수레에 싣고, 말에 얹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영  조 : (웃으며) 배가 어떻게 성에 들어올 수 있는가?

홍봉한 : 배로 운반한다는 말은 큰 비를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영  조 : 사관(史官)들은 생각이 같지 않을 수 있으니 각자 자신의 소견을 말해보라.

사  관 : 도랑을 준설하는 일이 비록 시급한 일이라 하더라도 만일 백성의 힘을 움직여 하는 일이라면 처음에 백성들의 원성이 많을 것입니다.

영  조 :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말해보라.

이해진 : 시골의 사람들은 준천의 이익과 손실, 어려움과 쉬움에 대해 정해진 의견이 없습니다. 도성 안의 여러 의견을 들으니 모두가 준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서병덕 : 준천 사업은 일찍이 도랑을 깊이 판 뒤에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영  조 : 그 말이 옳다.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 5월 2일

 

대신들을 접견한 영조는 신하들에게 준천을 할 역량이 충분한지, 준천 과정에서 퍼낸 토사를 어떻게 운반하고 어디에 둘 것인지, 준천에 관한 여론은 어떤지를 물었다. 영조는 준천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두고 여러 신하와 의견을 나누면서 구체적인 사업 방법을 모색했다. 영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백성들의 의견까지 수렴한 뒤에야 준천을 시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국가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사업을 실시하더라도 여론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며칠 뒤 영조는 청계천 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불러 준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영  조 : 너희는 개천 주변에 살고 있으니, 준천의 이익과 손해에 관해 상세히 말해보라.

주  민 : 개천 주변에 사는 집은 혹 비를 만나면 매번 물에 잠길까 근심합니다. 준천이 시급합니다.

영  조 : 그렇다면 너희는 어째서 스스로 준설을 하지 않느냐?

주  민 : 이는 저희가 사사로운 힘으로 준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 5월 6일

 

백성들을 불러 국가적 차원의 준천 사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한 영조는 대신들과의 논의 끝에 준천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준천은 1760년(영조 36)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약 57일 동안 진행됐다. 사업에 동원된 인원은 약 21만 5천여 명이었고, 소요된 물자는 3만 5천 냥과 쌀 2,300여 석에 달했다. 그야말로 대규모 공사였다. 영조는 준천의 진행 과정을 일일이 점검하고, 몸소 현장에 나가 백성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준천이 끝난 뒤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고 새겨진 표석을 세웠다. 후대에 개천의 표준 높이를 제시해 준천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영조의 준천은 후대까지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영조의 준천 사업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영조는 결코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데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지 않았다. 국가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합당한 절차에 따라 관료와 백성들의 공론(公論)을 모아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해 추진했다. 청계천 복개와 삼일고가도로 건설,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은 이 같은 의사결정과정이 아니었을까. 성과 중심의 개발논리에 짓밟힌, 공론을 모아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18세기와 20세기를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시기의 역사적 맥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두 시대의 역사적 차이를 무시한 채 청계천을 매개로 두 사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하지만 경제적 성과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영조의 준천 사업은 우리가 또 다른 삶의 모델을 찾아가는 데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2014년 1학기 '역사유적과 지역연구' 수업에서 기말 보고서로 제출한 글임. 2016년 2학기에 간행된 서울시립대학교 교지 대학문화에 실린 바 있음.

 

 

  1.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에 이름이 없었다. 그저 ‘개천’(開川)이라고 불렸다. 개천에 ‘청계천’(淸溪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식민지 시기의 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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