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조선시대사38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한국문화 10, 1989) 머리말 16세기에 중앙정부로 진출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사림은 ‘修己治人’이라는 정합성을 추구하면서 학파와 정파를 등치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기존 정치세력이 완전하게 도태되었고, 사림을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었다. 광해군대에 이르면 북인을 중심으로 하여 정권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廢母殺弟’로 인해 성리학적 강상윤리를 져버림으로써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었고. 이후 서인과 남인의 연대 위에서 이루어진 인조반정을 통해 대북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정묘 ・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는데,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조선 지식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이.. 2018. 4. 29.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오수창, 2012,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역사학보』 213 1. 머리말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긴 역사적 맥락 속에서 18세기 조선의 정치사상을 검토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다만 저자는 각 시기의 구체적인 정치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17~19세기 정치사상의 연결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 정치의 내적논리를 검토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목적은 조선 정치사를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인식을 극복하고 조선의 정치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런데 저자는 왜 구체적인 정치사상을 검토하려고 하는 것인가? 왜 18세기 정치사상을 굳이 17~19세기의 긴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하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의 정치상황이 17세기 붕당정치의 현실을 이어받으.. 2018. 4. 23. 김수항의 학문관ㆍ정치활동에 관한 논저 검토 김수항의 학문관ㆍ정치활동에 관한 논저 검토-정재훈(1994)과 지두환(2009)의 연구를 중심으로- 1. 어떤 논저를 검토할 것인가? 김수항(金壽恒)은 17세기 서인-노론을 대표하던 관료였다. 그는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예송과 환국에서 서인-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조선의 정국(政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대상으로 연구한 논저는 적은 편이다. 17세기 예송과 환국을 다룬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김수항의 정치활동과 학문관, 사회경제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글에서는 정재훈(1994)과 지두환(2009)의 연구를 검토해보려고 한다. 두 연구를 검토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김수항의 정치적 입장.. 2018. 4. 22.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강문식, 2008, 「송시열의 『주자대전』 연구와 편찬」, 『한국문화』 43 1. 서론 16세기 이후 朱子書 選本과 그에 대한 주석서가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이는 이황의 『주자서절요』 편찬 이후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에서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주자서의 편찬은 250여 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저자는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주자성리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해가 심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송시열의 『朱子大典箚疑』와 『節酌通編』이다. 이 저술들은 17세기 주자학을 비판하는 학문 경향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송시열이 주자학 연구에 전념한 결과물이자, 주자학 연구의 주도권이 영남학파에서 기호학파로 이전되는 변화의 첫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 2018. 4. 22.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189집, 2006 Ⅰ. 들어가며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15세기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15세기, 특히 세종 시대의 문화가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라는 이러한 관점의 서술이 비단 국사 교과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연구들은 .. 2018. 4. 19.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후마스스무, 「홍대용과 조선통신사」, (한양대학교 초청강연 원고)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 땅을 밟은 홍대용은 1766년 2월 우연히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만나 교제했다. 엄성과 반정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절강성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필담을 주고받으며 교분을 나누었다. 자신들의 관계를 ‘천애지기’(天涯之己)라고 부를 정도였다. 홍대용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엄성과 반정균은 조선 사절단이 머물던 숙소로 홍대용을 찾아왔다. 홍대용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엄성과 반정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온 것은 그저 천하의 뛰어난 지식인을 만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국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 2018. 4. 19.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15~16세기 양반지주의 농업경영 *이 글은 『조선시대사 2』(푸른역사, 2015)에 실린 김건태의 글 일부를 정리한 것임 조선 전기의 양반에게 노비와 토지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다. 특히 16세기 초반에 수조권을 통한 토지지배가 그 의미를 상실하면서 노비와 토지는 양반이 부를 증식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양반은 수조권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대신 노비를 동원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하게 함으로써 부를 늘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양반은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는 데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양반들은 조세 부담으로 몰락하는 양인농민을 노비로 포섭하거나 자신들의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킨 뒤 그 자식을 노비로 삼았다. 노비가 많으면 전답을 증식시키기도 훨씬 수월했다. 무주공황지(無主空荒地), 즉.. 2018. 4. 18.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김백철, 2007,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 한국사연구 138 김백철의 문제의식은 17세기의 황극론과 양역변통이 어떻게 18세기에 황극탕평론과 균역법으로 정립될 수 있었는가에서 출발한다. 명목적으로 요순의 정치로 표현되는 이상정치를 구현한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탕평정치ㆍ균역법처럼 국가의 근간을 개혁하는 일이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김백철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성관의 변화를 당시 정국 운영의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영조대부터 ‘민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시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1) 백성인식의 사회적 배경 김백철의 논의는 백성관 변화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이래 긴급한 과제는 양역문제를 해결하고 .. 2018. 4. 16.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