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저 정리/고려시대사14 10~13세기 고려 왕실의 구조와 편제: 서론 서론 (황향주, 2022, 10~13세기 고려 왕실의 구조와 편제, 서울대 박사논문) (1) 목표: 고려 왕실의 인적 구성과 법제적 위상을 구명하고, 왕실의 권위 및 특권의 기반이 되었던 체제를 고찰 (2) 왕실의 개념과 연구 필요성 광의의 개념: 祖宗苗裔를 포괄하고 때로는 왕조 그 자체를 의미 협의의 개념: 국왕과의 ‘공인된’ 가족 관계를 토대로 왕위계승권을 공유하거나 왕위계승권의 재분배에 관여할 수 있는 협소한 단위 → 이 논문에서 채택한 ‘왕실’의 개념 왕실 연구의 필요성: 국왕의 이데올로기 권력은 국왕의 기원인 왕실을 그 사회가 어떻게 명명하고 인식하는가에 따라 좌우되었고, 왕실의 ‘비범성’은 사회 전반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덕목 → 왕실이 어떤 내적 논리와 공적 체제를 바탕으로 차별화된 존재감을 .. 2023. 3. 10. 고려의 오복친과 친족관계 법제 노명호, 1981, 「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 『한국사연구』 33 정리일: 2021.09.30. 1. 서론 고려의 친족관계가 어떤 구조였으며, 그것이 고려 사회에서 어떤 영역에 어떻게 기능했는가? 저자는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五服制를 비롯한 고려의 친족 관계 법제를 검토한다. 저자는 선행연구에서 고려 사회의 일반적인 친족조직과 정치ㆍ사회단위를 성씨집단으로 전제해왔으나 정작 면밀히 논증된 적은 없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고려의 친족조직은 조선 후기와 달리 양측적 친속의 구조였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려는 당ㆍ송의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친족관계 법제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고려시대 친족조직의 구조가 중국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점에 주목한 저자는 고려시대 친족관계 법제의 특징을 분석해서 고려시대.. 2021. 9. 30.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이민우, 2015,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규장각』 47 2020.04.13. 1. 머리말 위화도회군으로 국정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사전을 혁파해서 고려의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제정했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의 성과는 조선의 토지제도로 계승되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고려 말의 토지제도 개혁은 수조권이 쇠퇴하고 소유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건국이라는 큰 정치적 변화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토지제도 개혁의 결과인 과전법은 여전히 수조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려의 토지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 말 사람들의 인식이 기존 연구의 논점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 2020. 4. 23.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이익주, 2006,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동방학지』 134 정리: 2020.04.12. 1. 머리말 그간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정치세력 내부의 구성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저자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과 조준을 비교해서 조선건국세력 내부의 구성과 다양한 정치운영론을 규명하려 한다. 저자는 이전에 『삼봉집』의 시문을 분석해서 정도전이 이색 문하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유한 반면 조준 계열의 인물들과는 소원했음을 밝혔다. (이익주, 2004) 저자는 그것이 정도전의 인간적인 교유에 국한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 글에서는 이전 연구의 연장선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관계’를 분석하려 했다. 즉, 정도전이 고려 말.. 2020. 4. 14.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정동훈, 2019, 「명초 외교제도의 성립과 그 기원: 고려-몽골 관계의 유산과 그 전유」, 『역사와 현실』 113 2020.01.12. 문제의 소재: 조공시스템은 과연 실재했나? 저자는 오늘날 연구자들이 거론하는 ‘조공시스템’(tributary system)을 당대인들이 처음부터 기획하거나 상정한 적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오히려 후대 연구자들이 몇 가지 제도나 관례를 조합해서 사후적으로 구성해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John K. Fairbank가 1940년대에 조공시스템론을 제창한 이래로 그 개념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틀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과 그 주변국의 관계는 상하 위계 속에서 외교와 무역이 결합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한다. 주변국은 거대한 부를 .. 2020. 1. 19.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 15 2020.01.18. 1. 머리말 공민왕 대는 원 간섭기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新興士大夫’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신흥사대부 등장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원 간섭기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와 공민왕 대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여전히 사대부의 개념조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과 새로운 사회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사대부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부당하고, 그보다는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대부가 정치세력화한 시기를 과도하게 소급하는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사대부는 ‘중소지주로서 동일.. 2020. 1. 19.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노명호, 1999,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2019.07.23 1. 머리말 선행연구는 고려시대의 천하관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했다. 신채호는 ‘묘청란’을 화풍파와 국풍파의 대립으로 파악했다. 구선우의 연구는 두 세력의 사상적 기반을 단지 유교와 비유교로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고려시대 천하관을 화풍파와 국풍파로 구분하는 관점은 남아있었다. 환구사와 팔관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고려가 중화제국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율적ㆍ자존적인 다원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구사와 팔관회를 제정하고 시행했던 세력의 천하관이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한 가지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 이른바 ‘국풍파’로 분류된 이들 중에서도 서로 다른 천.. 2019. 7. 23.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65 정리일: 2019.05.04 1. 머리말 일반적으로 1356년(공민왕 5) 5월에 공민왕이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와 만호부를 해체한 사건을 ‘반원운동’(反元運動)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저자는 공민왕에게 고려-원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의사가 없었다고 파악한다. 오히려 공민왕의 목적은 ‘세조구제’ 회복에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원개혁’으로 규정되었던 사안들은 공민왕이 마주했던 국내의 국정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1356년에 단행된 공민왕의 개혁을 재검토했다. 그가 검토한 내용은 ①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②만호부제 폐지 요구, ③재정개혁, ④.. 2019. 5. 4. 1960~70년대 고려 귀족제설의 정립과 그 전망 박재우, 2018, 「1960~70년대 고려 귀족제설의 정립과 그 전망」, 『한국사연구』 183 정리: 2019.04.28 1. 머리말 ㆍ이미 식민지시기부터 고려의 지배층을 귀족으로 지칭했다. 하지만 고려 귀족제설이 통설로 정립된 것은 1960~70년대의 일이다. 이 시기에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하고 관료제설이 대두하면서 고려 전기 지배층에 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종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귀족의 개념과 범주, 귀족제의 기반과 역사적 위상 등이 규명되었고, 귀족제설은 통설로 자리 잡았다. ㆍ내재적 발전론은 귀족제설 정립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귀족제설은 귀족제-관료제 논쟁을 거치며 어떻게 정립해 갔는가. 귀족제설은 여전히 고려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효한가. 저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 2019. 4. 28. 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윤영인,「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동양사학연구』 101, 2007) 1. 논문의 문제의식 이 글에서 논문의 필자(이하 필자)는 ‘조공-책봉체제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漢族중심적 역사의 사상적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각 시대의 실제 상황을 간과하고 朝貢體制의 용어가 갖는 명목적, 이론적 의미를 그대로 역사의 실체로 확대, 해석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가 中華帝國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세계질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여러 대등한 국가들이 자국의 利害와 세력균형의 원리[力關係]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多國家體制” 혹은 “多元的 世界”야말로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宋은 “동등한 국가 중의.. 2018. 5. 1.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