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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고려시대사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by 衍坡 2020. 4. 23.

이민우, 2015,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규장각』 47


2020.04.13.








1. 머리말


  • 위화도회군으로 국정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사전을 혁파해서 고려의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제정했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의 성과는 조선의 토지제도로 계승되었다.
  • 기존 연구에 의하면, 고려 말의 토지제도 개혁은 수조권이 쇠퇴하고 소유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건국이라는 큰 정치적 변화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토지제도 개혁의 결과인 과전법은 여전히 수조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려의 토지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 저자는 고려 말 사람들의 인식이 기존 연구의 논점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당시 사람들은 고려 말의 토지제도 개혁이 고려의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조권ㆍ소유권에 관한 전제개혁의 사후적 결과에만 주목하기보다 고려 말의 토지개혁이 고려의 토지제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 저자가 이 글에서 밝히려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조준 등이 고려 후기 토지제도 개혁론의 일반적인 문제설정에서 벗어나 사전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사전을 혁파하자는 제안은 이전 시기 개혁론과 제도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사전혁파 이후 토지제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




2. 사전혁파론자들의 사전 비판


  •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고려 후기에 매우 빈번하게 제기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私田 자체를 문제시하며 혁파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개혁론은 고려 말기에야 등장했다. 조준은 1388년에 토지제도 개혁론을 내세우며 사전을 토지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것을 혁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 사전혁파론자들이 제시한 개혁안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개혁론자들과 달랐다. ①모든 폐단이 사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내세웠고, ②토지제도의 폐단을 도덕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적 과제와 연결 지었다. 실제로 조준은 토지제도가 仁政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마음[不忍仁之心]에서 찾았다.
  • 사전혁파론자들이 보기에 사전에서 숱한 폐단이 생겨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토지제도의 본질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祖宗立法의 취지에 어긋난 사전이 토지제도를 문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인륜과 풍속의 파괴로 이어져 사회의 붕괴를 초래한다고 본 것이다.
  • 사전혁파론자들은 고대 성인이 인간의 본성에 적합하게 구상한 토지제도, 혹은 그것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 조종입법의 취지로 돌아가자고 요구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종입법의 취지는 국가의 모든 토지를 ‘公田’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간주하는 것이 고려 초 조종입법의 취지라는 사전혁파론자의 관점은 고려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고려에서는 왕실과 국가기구에 속한 토지를 ‘공전’으로, 개인에게 분급한 토지를 ‘사전’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 사전혁파론자들이 공전을 이상적인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에서 수용한 학문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唐 말기부터 고대의 제도를 바탕으로 현실 제도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고대의 이상을 현실에 복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송대 이후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제도 개혁을 연계해서 일관된 체제로 확립하려 했다.
  •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실현하려는 중국의 학문 경향은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에도 유입되었다. 다만 토지제도의 문제에 한정해서 보면 사전혁파론자들은 이제현ㆍ이색 같은 앞 세대보다 고대로 돌아가려는 지향을 훨씬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추구했다.
  • 고대 중국과 고려 초기의 토지제도에 관한 사전혁파론자들의 인식은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현실과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이해하는 고대 중국과 고려 초의 토지제도는 객관적 사실과 별개로 그들의 구체적인 개혁 목표와 같은 것이었다.
  • 요컨대, 사전혁파론자들은 인간 본성과 토지제도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근거로 사전을 비판했다. 그들에게 사전은 인간의 본성과 토지제도의 본질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고, 고려 말 토지문제의 근본 원인이었다. 대신 그들은 고대의 토지제도에서 공전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고려 사회에서 통용되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재개념화했다. 사전혁파론자들에게 국가의 모든 토지는 공전이었으며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초였다.





3. 사전 혁파론의 제도적 귀결


  • 사전혁파론자들은 公田과 私田을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양전을 실시할 것, 양전으로 파악된 토지를 국가의 재정 소요처와 국역 담당자에게 재분배할 것, 새로운 양전과 토지 재분배가 완료되기 이전에 한시적인 조치로 국가가 기존의 사전을 公收할 것 등을 요구했다. 전제개혁을 요구한 조준은 특히 양전 문제와 관련해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 첫 번째 원칙은 양전 과정에서 田丁을 작성할 때 공ㆍ사전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래 고려에서는 사전의 양전을 田主에게 맡기고 국가는 사전의 전체적 규모만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가 공ㆍ사전을 구분하지 않고 전국의 모든 토지를 양전한 것은 사전혁파 과정에서 처음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사전을 부정하고 국가가 모든 토지를 일괄적으로 파악하는 조치였다.
  • 두 번째 원칙은 전정의 크기를 일정한 규모의 단위로 통일해서 20결ㆍ15결ㆍ5결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사전으로 지급한 전정을 지급 규모에 따라 일정하게 파악했으나 자연적인 경지구획 때문에 전정의 실제 규모는 그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보면 전정의 크기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조치는 공ㆍ사전 구분 없이 모든 토지를 양전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가는 이 조치를 통해 전정의 실제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 세 번째 원칙은 전정의 丁號를 사람의 성명으로 달지 않고 천자문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 원칙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고려는 전정의 정호에 사람 이름을 기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성명이 정호로 기재된 그 토지가 바로 사전이며, 그 私田主가 정호에 기재된 것이다. 새로 양전한 토지에 사람 이름 대신 천자문으로 정호를 표기한 것은 사전에 대한 전주의 권리를 부정하는 조치였다.
  • 조준이 제시한 원칙은 사전혁파를 전제로 하여 토지를 둘러싼 제도적 관계를 재편하는 작업이었다. 그 원칙에 따라 국가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실질적인 공전으로 파악했다. 실제로 조준은 고려 말에 국가 전체의 토지를 단일한 재정의 원천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배분하도록 건의했다. 국가가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파악했기에 가능한 요구였다.
  • 한편으로 국가는 사전주의 권리를 부정하고 경작민을 직접 파악해서 토지의 권리 주체로 세우려 했다. 국가는 토지의 경작자를 佃客으로,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를 所耕田으로 규정하고는 전주와 무관하게 소경전에 대한 전객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했다. 전국의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땅을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 요컨대, 고려의 사전은 국가가 직역에 따라 토지를 일정한 단위로 조직한 田丁을 개인에게 분급한 것이었다. 사전혁파는 국가 직역자(사전주)의 특권적 토지 소유를 부정하고 토지에 관한 경작자의 권리를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良人을 국가의 公民으로 파악해서 그들을 육성하려 했던 조선 건국자들의 의도가 경제적 측면에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토지제도 개혁구상에서 과전법의 위상


  • 사전혁파론자들은 국가의 공전으로 재편성된 토지를 국가의 각정 재정 소요처와 국역 담당자에게 재분배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 재분배 작업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과전법이었다. 한 마디로 과전법은 사전혁파의 성과에 기초해서 전국의 토지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재분배하는 규정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 중요한 것은 사전혁파의 성과를 바탕으로 마련된 과전법에도 여전히 私田이 설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과전법에 따라 사대부에게 지급된 과전은 여타의 토지와 달리 사전으로 분급된 것이다. 그래서 기존 연구들은 사전혁파라는 고려 말 전제개혁의 목표가 완전하게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과전법은 토지제도 개혁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사전혁파에 따른 후속조치로 보아야 한다.
  • 고려시대의 사전은 단순한 사유지가 아니라 호구제도ㆍ부세제도ㆍ군사제도ㆍ재정제도ㆍ지방제도 등과 긴밀하게 연계된 국가운영의 기초였다. 따라서 사전을 혁파하면 토지제도뿐 아니라 국가의 여러 부문에서 제도적 변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사전혁파론이 제기된 1388년부터 과전법이 제정되는 1391년까지 호구ㆍ군사ㆍ부세ㆍ진휼 등 여러 부문의 개혁 조치가 이루어졌다.
  • 과전법은 사전혁파에 따른 후속 조치 중에서 관직자에게 주는 祿科田과 국가 재정 소요처에 대한 토지 분배를 규정한다. 고려 말 국가 재정 운영의 구조와 사전에 대한 관직자층의 경제적 의존을 고려하면 과전법 제정은 꼭 필요한 조치였지만, 과전법 자체가 토지제도 개혁의 최종 결과물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 건국 이후에 국가 재정 운영의 구조와 양반 관료층의 경제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과전법의 사회적 비중도 줄어들었다.
  • 과전법의 사전과 고려시대의 사전은 토지제도 상의 위상과 성격이 매우 달랐다. 고려시대의 사전과 과전법의 사전이 같다고 보기도 어렵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상대적으로 희박했고, 공전은 주로 왕실과 국가기관에 속한 토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과전법의 사전은 사전혁파 이후 새로 설정된 토지였고, 국가의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규정하는 인식을 전제하고 그중 일부를 예외적으로 지급한 것이었다. 고려의 사전이 국가의 각종 제도와 결합된 국정운영의 기초였다면, 과전법의 사전은 사대부에 대한 예우라는 기능만을 담당했던 것이다.
  • 과전법 단계에서는 가족관계 내부에서 사전이 승계되는 것도 엄격히 금지했다. 국가는 과전법 제정 당시에 지급한 토지 이외에는 새로 과전을 지급하지 않았다. 과전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자격을 상실한 다른 사람의 토지를 遞受하는 방식으로만 과전을 받을 수 있었다. 과전 지급이 관직자 본인 당대에 한정되고 세습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田丁連立으로 사전의 승계를 적극적으로 보장했던 고려와는 다른 점이었다.
  • 요컨대, 과전법은 사전혁파 이후에 새로 편성된 토지를 국가 필요에 따라 재분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과전은 여전히 ‘사전’으로 지급되었지만 토지제도 상에서 그 위상과 성격은 고려시대의 사전과 매우 달랐다. 그런 점에서 과전법은 사전혁파 이후에 마련된 예외적이고 임시적인 조치였다.





5. 맺음말


  • 고려 말의 사전혁파론자들은 사전이야말로 고려의 토지제도가 엉망이 된 원인으로 보았고, 사전을 혁파해서 仁政의 기초가 되는 토지제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고대의 제도를 회복하려는 학문적ㆍ정치적 경향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의 핵심은 고려시대 토지제도의 근간인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토지를 국가의 公田이자 民의 所耕田으로 편성하는 데 있었다. 고려 말의 토지제도 개혁을 통해 전객의 소경전에 기초하는 토지제도가 확립되었다.
  • 사대부에게 사전을 지급하는 科田法의 제정은 사전혁파를 전제로 한 예외적이고 임시적인 후속 조치였다. 과전법에 따라 지급된 사전은 수조권 지급이라는 측면에서 고려 사전과 연속적이었지만, 과전법의 사전은 토지제도 안에서 고려시대의 사전과는 서로 다른 위상과 성격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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