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저 정리/고려시대사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by 衍坡 2020. 4. 14.

이익주, 2006,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동방학지』 134


정리: 2020.04.12.




고려





1. 머리말

  • 그간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정치세력 내부의 구성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저자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과 조준을 비교해서 조선건국세력 내부의 구성과 다양한 정치운영론을 규명하려 한다.
  • 저자는 이전에 『삼봉집』의 시문을 분석해서 정도전이 이색 문하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유한 반면 조준 계열의 인물들과는 소원했음을 밝혔다. (이익주, 2004) 저자는 그것이 정도전의 인간적인 교유에 국한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 글에서는 이전 연구의 연장선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관계’를 분석하려 했다. 즉, 정도전이 고려 말에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조선건국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는 과정을 검토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다.





2. 위화도회군 이후 정도전의 정치활동


1) 전제개혁과 정도전의 역할

  • 위화도회군(1388) 직후에 이성계의 천거로 鄭道傳은 성균관 대사성에, 趙浚은 사헌부 대사헌에, 趙仁沃은 전법판서에, 尹紹宗은 우사의대부에 임명되었다. 이성계 세력이 臺諫과 法司, 成均館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향후 구세력과의 정쟁에서 전위 역할을 담당한다.
  • 공민왕 대 이래로 성균관은 신흥유신의 거점이었고, 정도전은 바로 그런 성균관의 대사성직에 올랐다. 성리학자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흐름 속에서 정도전이 그 중심적 위치에 설 기회를 일단은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조준이 주도한 전제개혁이 핵심적인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존재는 부각되지 못했다.
  •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국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건 전제개혁을 주도한 조준이었다. 그는 1388년 7월에 전제개혁을 제기한 뒤로 줄곧 사전 혁파 논의를 주도했다. 조준 일파로 채워졌던 사헌부ㆍ판도사ㆍ전법사 등의 기관도 조준의 주장에 호응하며 전제개혁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준은 자연스럽게 전제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 전제개혁 국면에서 이성계의 반대세력을 탄핵한 것도 조준을 중심으로 한 대간이었다. 이성계가 정국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었던 조민수와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문익점은 조준에게 탄핵을 당했고, 이색과 그 문하의 이숭인ㆍ권근 등도 오사충 등의 간관에게 탄핵을 당했다. 하지만 당시에 정도전의 존재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 전제개혁 국면에서 정도전이 소외된 이유는 그의 전제개혁론과 관련이 있다. 당시 수조권 정비를 통해 土地兼并의 폐해를 해소하려 했던 조준과 달리, 정도전은 토지 소유권 자체를 재분배해서 자영농을 창출하려 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구상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던 만큼 개혁파 내부에서조차 지지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정국은 수조권 조정을 골자로 하는 조준의 전제개혁안과 이색의 반대론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 전제개혁 당시 정도전의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데는 그가 대간의 경력을 거치지 못한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도전은 臺諫과 政曹의 직임을 맡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간을 중심으로 진행된 개혁 논의에서 소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 고려말 정도전의 교유관계

  • 일반적으로 정도전과 조준이 위화도회군 즈음에 동지적 관계로 결합했다고 여기지만, 두 사람이 직접 교유한 흔적은 『고려사』나 각종 문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 『삼봉집』의 시문을 검토하면 정도전의 교유관계는 공양왕 3년(1391)까지도 이색과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이후에도 조준보다는 스승 이색, 함께 수학한 정몽주ㆍ이숭인ㆍ권근 등과 가까이 지냈다. 여전히 정도전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이색의 문하라는 점에서 찾았던 것이다.
  • 위화도회군 이후에도 이색의 문인과 계속 교유했다면 그들과 함께 사사했던 스승 이색과도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봉집』에는 정도전과 이색이 개인적으로 교유한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목은시고』에는 이색과 정도전이 교유한 흔적이 보인다. 우왕 대에 정도전은 이색과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사제관계는 그런대로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 정도전이 조준 계열의 인물과 교유한 흔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조준 계열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정도전과 교유한 것은 윤소종이었다. 조준의 문집인 『송당집』에도 정도전과 조준이 교유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이색의 『목은시고』에도 조준 계열의 인물과 교유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 요컨대, 고려 말에는 이색 계열과 조준 계열이 교유관계에서 뚜렷이 구분되었다. 정도전ㆍ정몽주ㆍ이숭인ㆍ하륜ㆍ권근 등이 성리학 전수를 매개로 이색을 중심으로 결집했다면, 조준ㆍ허금ㆍ조인옥ㆍ유원정ㆍ정지ㆍ백군녕 등은 우왕 대에 왕실 부흥의 뜻을 공유하며 결집했던 집단이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관계를 토대로 맺어진 사적인 교유관계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 세력이 정책ㆍ이념보다 친인척 관계나 좌주-문생 관계 같은 사적 관계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했으므로 사적인 교유관계가 반드시 정치활동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 정도전은 전제개혁 국면에서 이색ㆍ권근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그들과 개인적인 교유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이렇게 정치적 입장과 개인적 교유관계의 괴리가 용납되었던 것은 당시 그가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정도전이 위화도회군 이후로도 이색 계열의 인물들과 교유관계를 이어갔다면 정도전과 조준이 위화도회군 즈음에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고 단순화할 수 없다. 오히려 전제개혁을 조준이 주도하고 정도전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사실은 두 사람이 정치적 경쟁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정도전과 조준은 각기 이성계와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결합했던 만큼 정치운영론이나 정치사상이 반드시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3. 척불운동과 정도전의 정치적 부상


1) 공양왕대 정도전의 정치활동

  • 1389년에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한 아홉 사람이 공신으로 책봉됐다. 이성계ㆍ심덕부ㆍ지용기ㆍ정몽주ㆍ설장수ㆍ성석린ㆍ조준ㆍ박위ㆍ정도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정도전의 역할과 위상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런 변화는 공양왕 옹립 이후에 개혁파 신흥유신이 분열된 데서 비롯한 것이었고, 그 분열의 원인은 정몽주의 행적과도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 옹립 이후로도 이색 등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이어갔다. 특히 尹彝ㆍ李初 사건은 그들이 이색ㆍ우현보 일파를 공격하는 중요한 빌미가 되었다. 그렇지만 윤이ㆍ이초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헌부와 낭사가 입장을 달리하며 충돌했다. 이미 개혁파 신흥유신이 대간을 장악한 뒤였으므로 사헌부와 낭사의 갈등은 개혁파 신흥유신 내부의 분열을 의미한다.
  • 정몽주는 조준의 전제개혁에 반대하지 않았고, 공양왕 옹립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윤이ㆍ이초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색과 권근을 옹호하면서 反이성계 세력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대사헌 김사형은 이색ㆍ권근을 옹호한 정몽주를 탄핵하려 했지만, 간관들은 도리어 정몽주를 지지하며 갈등을 빚었다. 공양왕은 이 기회에 정몽주를 守門下侍中ㆍ判尙瑞司事에 임명해서 인사권을 장악하게 하고 구세력을 사면했지만, 이성계 일파의 반격으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옹립한 9공신 중 심덕부ㆍ지용기ㆍ박위 등을 유배보내며 정몽주를 견제하려 했다.
  • 공양왕 대 사헌부와 낭사의 대립, 정몽주의 부상, 공양왕을 옹립한 9공신의 분열은 공양왕 옹립까지 일치된 행보를 보였던 개혁파 신흥유신이 분기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분기는 전제개혁 이후의 개혁 방향에 관한 견해 차이와 관련이 있었다.
  • 전제개혁의 성공적 완수에 만족했던 조준은 공양왕 즉위 이후로는 정치적 주장을 제기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정몽주는 전제개혁과 공양왕 옹립에는 동의하면서도 국왕권 회복과 왕조의 중흥을 추구했다. 정도전은 소유권의 재분배를 주장하고 고려 말의 전제개혁을 제한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조준과 달랐고, 이성계의 권력 장악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몽주와는 대척점에 섰다.
  • 정도전은 윤이ㆍ이초 사건 이후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 무렵부터 이색과 우현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쟁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도전이 공양왕은 물론이고 구세력인 이색ㆍ우현보 일파와도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바로 이 시점에서 이색 및 이색의 문인들과 결별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 변화는 척불운동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2) 척불운동의 정치적 의미

  • 윤이ㆍ이초 사건 이후로 공양왕과 이성계 세력의 갈등이 이어졌다. 공양왕은 그런 상황에서 구언교서를 내렸고, 斥佛疎가 잇달아 올라왔다. 이 상소들은 공통적으로 공양왕의 好佛을 비판하고 그의 연복사탑 공사 중지를 요청했으며, 불교 배척을 요구했다. 한 연구의 지적처럼, 이 척불운동은 정도전이 주도한 것으로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내포한 것이었다. (이정주, 2001)
  • 성균생원 朴礎는 자신의 척불 상소에서 정도전이 ‘闢異端’에 앞장섰음을 강조했다. 계속해서 불교계와 인연을 이어가던 이색과 정도전을 대비시키면서 정도전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처럼 이색의 권위가 부정되는 상황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직접 글을 올려 이색을 극형에 처하려 했다.
  • 정도전이 단순히 정치적 입장에서만 척불운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평소부터 불교 등 이단을 배척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것은 공양왕이 정도전에게 내린 공신책봉교서나 『삼봉집』에 붙은 권근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도전의 척불운동은 단순한 정치공세가 아니라 평소에 숭상하던 성리학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도전은 척불운동으로 자신의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해서 성리학자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 성균관을 중심으로 척불운동이 진행되는 도중에 성균관에서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유불 간의 사상 대립이 아니었다. 모두가 척불의 명분에는 동의했으나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 달라 일어난 갈등이었다. 이때 중요한 건 성리학적 명분과 정치적인 명분을 과연 일치시켜야 하는지, 일치시켜야 한다면 누가 과연 양자를 일치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 점에서 정도전은 척불운동의 최대 수혜자였다.
  • 정도전은 이색 등과의 私情을 끊어내면서 公義와 성리학적 명분론에 충실하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자 내부의 지지를 얻어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아울러 척불 이슈로 이색과 정몽주를 효율적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 요컨대, 정도전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시점은 위화도 회군 직후가 아니라 공양왕 3년의 척불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때부터 역성혁명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여 조선건국을 주도하고 건국 초기의 정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정도전이 정치적 차원에서 척불론을 이용한 것은 그가 추구하는 개혁 방향과 관련이 있었다. 고려 말의 전제개혁이 과전법 제정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 이후에 추진될 개혁의 동력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정도전은 바로 이 시점에서 척불운동을 제기하여 성리학적 가치를 공유하는 개혁주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성리학자들이 정도전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조선을 건국했던 것이다.





4. 맺음말

  • 고려 말의 조준과 정도전의 정치적 동향을 보면 공양왕 3년(1391)을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는 조준의 활동이, 그 뒤로는 정도전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조준이 전제개혁을 주도했다면, 정도전은 척불운동을 주도했다.
  • 정도전과 조준 사이에는 고려 말까지 서로 교유한 흔적이 없다. 정도전이 주로 이색 문하의 인물들과 교유했다면, 조준은 우왕 대에 함께 왕실 회복을 결의했던 이들과 주로 교유했다. 비단 정도전과 조준 개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몸담은 두 계열의 인물들 사이에도 교유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 그동안의 연구들은 줄곧 정도전과 조준을 정치적 협력관계로 간주했지만, 두 사람이 경쟁관계였다고 가정하면 고려 말의 정치상황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위화도회군 이후 조준은 전제개혁을 주도했고, 전제개혁의 방향에서 조준과 생각이 달랐던 정도전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정도전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는 시점은 공양왕 대에 척불운동이 벌어지면서부터였다.
  • 공양왕 옹립 이후 개혁파 신흥유신 내부에 분열이 나타나고 정몽주가 반이성계 세력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공양왕도 이틈을 타서 이색 등 구세력을 비호하며 이성계를 견제했다. 정도전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척불운동을 주도하여 이색의 권위를 부정하고 정몽주를 정치적 입장과 성리학적 명분론 사이의 딜레마에 빠뜨렸다.
  • 정도전은 척불운동을 통해 이성계 세력 내부에서 정치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이성계 세력 내부에서 조준보다 정치적 우위에 섰고, 그 결과로 조선의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정도전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 정도전의 척불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에게 척불운동은 전제개혁에 이은 또 다른 개혁의 출발이었다. 그 개혁은 단순히 중소지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구현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도전은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구현을 명분으로 하는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고, 그 결과 조선건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