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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고려시대사

고려의 오복친과 친족관계 법제

by 衍坡 2021. 9. 30.

노명호, 1981, 「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 『한국사연구』 33

 

정리일: 2021.09.30.

 

1. 서론

  • 고려의 친족관계가 어떤 구조였으며, 그것이 고려 사회에서 어떤 영역에 어떻게 기능했는가? 저자는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五服制를 비롯한 고려의 친족 관계 법제를 검토한다.
  • 저자는 선행연구에서 고려 사회의 일반적인 친족조직과 정치ㆍ사회단위를 성씨집단으로 전제해왔으나 정작 면밀히 논증된 적은 없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고려의 친족조직은 조선 후기와 달리 양측적 친속의 구조였다고 한다.
  • 저자에 의하면 고려는 당ㆍ송의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친족관계 법제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고려시대 친족조직의 구조가 중국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점에 주목한 저자는 고려시대 친족관계 법제의 특징을 분석해서 고려시대 친족조직의 구조를 규명하려 한다.

 

2. 오복친의 범위 검토

  • 선행연구에서는 고려 오복제를 喪禮라는 禮制의 측면에서만 다루었다. 그러나 오복제에서 규정한 등급별 친족 범위는 친족관계에 대한 법제에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오복제는 친족제도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 고려 오복제의 내용은 『고려사』 「예지」에 실렸다. 성종 4년(985)에 제정된 고려의 오복제는 대명률을 따르기 이전까지 부분적인 변화만 겪었을 뿐이고 대부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오복친의 전체 범위나 등급별 범위에서 고려 오복제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오복제와 차이가 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했다. ①고려가 받아들인 외래의 제도가 조선이 수용한 명의 제도와 달랐기 때문이다. ②고려가 외래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고려의 친족제도에 걸맞게 오복친의 등급별 친족 범위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가 중국의 어떤 오복제를 수용했으며,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 고려가 오복제를 도입하면서 가장 직접적으로 참고한 대상은 唐ㆍ宋의 오복제다. 오복제는 단순한 상례가 아니라 율령체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고려가 당ㆍ송의 율령을 많이 참고했다는 점에서 오복제 역시 당ㆍ송의 것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 당과 송의 제도 중에서 고려가 참고한 것은 唐制다. 오복제를 처음 도입할 당시에 송의 제도는 당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고려 오복제에서 本族에 관한 내용은 당제와 대부분 일치한다. 더구나 당대에 변경한 오복제의 내용이 고려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 고려 오복제에서 母와 祖母의 服에 관한 내용도 당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에서는 外族服의 범위와 비중이 훨씬 커졌다. ①외조부모의 正服을 조부모의 정복과 동등하게 다루었다. ②舅[외숙]와 姨[이모]의 복도 緦麻 3월에서 大功 5월로 강화했다. ③당의 오복친에서 제외되었던 堂舅와 堂姨를 緦麻親으로 포함했다.
  • 오복친의 범위를 확대하고 外族의 위상을 높였지만 당제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堂舅와 堂姨를 오복친에 포함하면서도 외증조부모ㆍ외백숙조부모ㆍ외조고 등은 有服親에서 제외되었는데, 袒免親을 同高祖의 방계 부계친에 한정한 당제를 따랐기 때문이다. 
  • 고려 오복제에서 부계 친족의 服은 당제와 일치하는 반면, 외족의 服은 고려 오복제에서 등급이 더 높다. 당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외족의 친연성이 컸던 고려 사회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이처럼 당의 오복제에 수정을 가한 것은 오복친의 범위가 고려의 실제 친족 관계와 온전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오복친
조선 초기의 오복친
당나라의 오복친

 

3. 오복친의 친족조직 유형

  • 선행연구는 고려 성종대의 오복제 도입을 고대의 7세대 친족공동체가 5세대 친족공동체로 변화한 기점으로 보았다.(김철준, 1973) 하지만 고려의 오복제는 집단적 친족관계가 아니므로 5세대 친족공동체와 연결할 수 없다.
  • 오복제가 宗法制 연구의 부수적인 주제로 다루어지면서 부계친족과 관련된 면만 부각되었다. 따라서 오복제는 개인(Ego)의 上下 5세대와 同高祖의 방계 친족이라는 범위 안에서 상례 등급을 규정한 제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종법적 친족
  • 조직이 공통의 조상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집단적인 친족조직인 반면, 오복친조직은 개인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개인-개인으로서의 친속이다. 양자는 작용방식과 기능 자체가 다르므로 한 사회에서 양립할 수 있다.
  • 중국의 오복친은 부계 외에도 모계 친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양측적 친속관계다. 고려가 중국의 오복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동질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唐宋]의 오복친은 상대적으로 모계 친족의 범위와 비중에 제약을 둔 ‘비대칭적 친속’이었다.
  • 고려의 친족조직은 양측적 친속으로 非父系的 친족관계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부계적인 친족조직이 정치적ㆍ사회적 단위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점을 보여주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사심관을 파견할 때 연고지를 고려하면서 內ㆍ外鄕 대등하게 고려했고, ②避諱를 할 때 外家나 祖母, 혹은 外祖母의 성을 따르는 등 개인(Ego)로부터 2세대를 소급하는 계보를 모두 중시했으며, ③친족 호칭에 개인 간의 계보상 원근관계를 나타나는 촌수가 사용되었다.
  • 다만 고려의 오복제는 외족의 비중이 커졌음에도 기본적으로 비대칭적 친속의 구조를 지녔다. 그것은 고려의 오복제가 당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비대칭적 친속 구조는 고려의 실제 친속구조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4. 오복친에 관계되는 법제

(1) 상피제

  • 오복친의 등급별 범위와 관계된 법제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상피제였다. 선종 9년(1092)에 정한 상피제는 唐ㆍ宋의 법제를 따른 것이다. 『고려사』에 실린 상피 규정은 실제로 熙寧 3년(1068), 元祐 5년(1090) 이후의 제도와 일치한다.
  •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상피제의 범위는 대부분 고려의 피친 범위와 일치한다. 오복제 등 예제와 관련된 조선 초의 규정은 고려의 제도와 달랐지만, 상피제처럼 실제 친족관계에 관한 법제는 거의 동질했다.
  • 당ㆍ송은 오복친과 실제 친족구조가 일치하여 상피제를 오복친 편성에 적용할 수 있었다. 고려는 宋制를 참고하여 상피제를 제정했지만, 당ㆍ송과는 다른 친족구조를 갖추었으므로 오복친의 적용 범위를 대폭 손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려에서는 일차적으로 被親의 대상을 개인(Ego)의 大功親과 그 처의 大功親 이상의 범위로 설정했다. 오복제의 등급이 상피제에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오복친 여부와 상피 범위를 비교해보면, 본족과 처족에서는 양자가 일치하지만 외족에서는 크게 어긋난다. 오복제의 등급이 상피제에 불완전하게 적용된 것이다. 그만큼 오복친의 구성이 실제 친족구조와 달랐던 것이다. 고려에서 오복친의 상당수가 피친 범위 밖에 있고 무복친의 상당수가 피친 범위에 포함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 고려와 송의 상피제 범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처족: 고려의 피친 범위와 元祐 5년의 송제가 일치하지만, 고려에서는 妻姑母夫가 포함되어 송제보다 약간 더 확대되었다.
  • 외족: 송에서는 외족의 유복친을 피친 범위로 포함하는 반면, 고려에서는 堂舅가 有服親인데도 피친 범위에서 제외되었다.(단, 송제에서 堂舅는 無服親이므로 상피에서 제외)
  • 본족: 송에서는 본족 유복친 전체가 피친 범위에 속하지만 고려에서는 大功親 이상으로 축소
  • 고려의 제도에서 본족과 외족의 피친 범위를 비교해보면 모계와 부계 친족의 범위가 거의 대칭을 이루는 양측적 친속 구조다. 즉, 오복친의 범위는 비대칭적 친속을 보이지만 상피제의 피친 범위에서는 거의 대칭을 이룬다. 오복친이 예제상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면, 상피제는 고려의 실제 친족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 오복제가 고려의 실제 친족구조와 불일치함
  • 고려의 相避親 범위는 부계친족집단의 존재보다는 양측적 친속의 유형을 보여준다. 따라서 귀족가문이나 5세대 친족공동체처럼 부계 성씨 단위의 친족집단이 정치세력의 단위로 기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개인은 부계와 모계의 친족과 개인 간의 관계로 결합하거나 분리될 수 있었으며, 공히 부계 세력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 있었다. 아울러 처족의 피친 범위가 본족ㆍ외족과 비등한 것은 처족과의 유대를 반영한 것이다. 처족과의 유대는 교혼을 억제하고 계급내혼의 경향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상피제 하의 친속

 

(2) 형률

  • 고려의 刑律에도 오복친의 등급별 범위가 적용되었다. 그것은 唐ㆍ宋의 법제를 따른 것이지만 고려의 오복친 전체 범위와 등급별 범위가 달랐으므로 형률의 적용 범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 오복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唐ㆍ宋의 제도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 사례로는 禁婚 범위에 관한 법제가 있다. 당ㆍ송에서는 同姓婚을 금지했고, 異姓 간의 혼인은 有服親이라고 해도 같은 세대라면 허용되었다. 반면, 고려에서는 공민왕 3년(1354)에 동성혼을 금지하기 전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이루어졌다.
  • 고려시대에 나온 近親婚 금지 법제의 공통점은 출사를 금지했을 뿐 적극적인 처벌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출사 금지도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문종 35년(1081)에 大功親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은 인물을 서용하는 등 법제 시행을 번복한 것은 그만큼 근친혼이 뿌리 깊은 관행이었음을 보여준다.
  • 고려에서 금친혼 금지 규정은 문종 12년(1058) 이후로 대공친 범위에서 점차 확대되었다. 오복제의 등급별 범위는 同姓 禁婚 범위에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오복친의 등급별 범위를 그대로 적용해서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오복친의 범위와 실제 친족구조가 달랐기 때문이다.
  • 고려의 금혼 범위 역시 부계 친족뿐 아니라 부계와 모계 친속 간에 대칭적인 형태를 이루며 확대되었다. 즉, 금혼 범위의 구조 역시 고려의 친족조직이 양측적 친속임을 보여준다.

고려 근친금혼 범위의 확대 과정

 

5. 맺음말

  • 五服親의 조직, 相避親의 범위, 禁婚 범위에 드러난 고려시대 친족조직의 구조는 양측적 친속이었다. 그것은 개인 대 개인의 쌍방관계로 기능하는 각 개인을 중심으로 한 부계와 모계의 대칭적인 범위 친족을 지니는 친족구조였다. 고려가 당과 송의 법제를 따르면서도 친족관계 법제만 근본적으로 다르게 제정한 것은 고려의 친족조직이 성씨집단이나 5세대 친족공동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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