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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이첨, "「삼국도」 뒤에 붙이는 서문" 「삼국도」 뒤에 붙이는 서문三國圖後序 (『東文選』 92) 이 첨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총도' [원문] 皇明啓統, 奄有四海, 尺地寸天, 皆入版籍. 輿圖之廣, 幅員之脩, 其必有職之者矣. 在昔成周, 大司徒掌天下土地之圖, 以周知幅員之數, 而職方氏之圖加詳焉. 迨漢滅秦, 蕭何先收其圖書, 始具知天下阨塞, 戶口多小之差. 光武皇帝披輿地圖, 指示鄧禹曰: “天下郡縣如是, 今始得一.” 則地之有圖, 尙矣. 本朝郡縣, 載於圖籍者, 略而不詳, 無以考驗也. 統合以後, 始有高麗圖, 未知出於誰手也. 觀其山, 自白頭迤邐, 至鐵嶺突起而爲楓岳, 重複而爲大小伯, 爲竹嶺, 爲雞立, 爲三河嶺. 趨陽山而中臺, 亘雲峯而地理, 地軸至此, 更不過海而南. 淸淑之氣, 於焉蘊蓄, 故山極高峻, 他山莫能兩大也. 其脊以西之水, 則曰薩.. 2020. 6. 2.
[삼봉집] 어휘 표덕설을 지어 올리는 전문 어휘표덕설을 지어 올리는 전문(1392)撰進御諱表德說 정도전 ① 臣言. 今月十日, 伏蒙都承旨臣閔汝翼傳奉王旨, 令臣撰到表德投進. 臣聞唐帝以堯爲名, 其號曰放勳. 虞舜之重華, 夏禹之文命, 皆其號也. 至周文盛, 有名則有字. 天子諸侯皆字之曰某甫, 卿大夫以下亦然. 由是觀之, 幼則名之, 冠則字之, 所以別長幼而責成人之道也. 恭惟殿下卽位之初, 更名某, 告于天子則天子受之, 告于宗廟則宗廟饗之. 名之所在, 實必從之, 今人謂字曰表德, 德其實也.② 盛德如天之日, 非小臣所能摸擬, 然靑天白日, 有目者所共覩, 臣敢竭愚慮, 請以君晉爲獻. 臣謹按, 從日從一, 日出之始也. 晉, 明升之義. 天日之升, 其明廣照而陰翳消釋, 萬象昭然, 卽人君初政之淸明, 而群邪屛息, 萬法俱新也. 天日旣升, 其明漸進, 卽人君始自踐阼, 傳于千萬世也. 詩曰如日之升, 是.. 2020. 5. 25.
[삼봉집] 남양에 도착해서 임금께 사례하는 전문 남양에 도착해서 임금께 사례하는 전문(1385)到南陽謝上箋 정도전 ① 道傳蒙恩除南陽府使, 已於今月十七日到任上訖. 祇承綸命, 出守海鄕, 愧感交騈, 罔知所措.② 竊念以臣之微, 本無寸長, 蒙先王之知, 擢從臣之列. 當逆旽伏罪, 告謝太室, 俾臣考校鐘律, 肄習祭儀, 比及卒事, 禮無愆違, 先王稱之曰能, 禮曹學官, 命臣兼之. 仍尙符寶, 視草誥院, 恩至渥也. 及先王棄群臣, 臣於是時, 以禮儀郞職掌禮務, 承命廟堂, 糾合百官, 以定大業.③ 殿下初卽位, 庶政俱新. 除臣成均司藝, 藝文應敎,知製敎. 蒙恩召入書筵, 講大學書, 至穆穆文王, 於緝煕敬止, 其於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父止於慈, 爲人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懇懇辨論, 以致丁寧, 殿下納之. 臣感知遇之恩, 言無避諱, 觸忤時宰, 斥去南荒, 間關炎瘴, 濱於死者幾至三年. .. 2020. 5. 25.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오세현, 2017,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사학연구 127 2020.04.29. 머리말 17세기의 송시열은 주희의 견해를 일부 부정한 윤휴와 박세당을 ‘斯文亂賊’이라 비판했다. 그에게는 오직 주희의 학문만이 ‘斯文’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송시열과 달리 그들은 도학뿐 아니라 문장도 사문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인품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도덕과 함께 문장력을 거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사문에 관한 인식이 엄격해진 것은 사문의 다양한 구성 요소 중에서 道學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를 배제한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사문에서 근본적인 위상을 지닌 도학뿐 아니라 현실적 가치를 지닌 문장의 위상과 역.. 2020. 5. 3.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이민우, 2015,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규장각』 47 2020.04.13. 1. 머리말 위화도회군으로 국정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은 사전을 혁파해서 고려의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제정했다. 고려 말 토지제도 개혁의 성과는 조선의 토지제도로 계승되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고려 말의 토지제도 개혁은 수조권이 쇠퇴하고 소유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건국이라는 큰 정치적 변화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토지제도 개혁의 결과인 과전법은 여전히 수조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고려의 토지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 말 사람들의 인식이 기존 연구의 논점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 2020. 4. 23.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이익주, 2006, 고려 말 정도전의 정치세력 형성 과정 연구, 『동방학지』 134 정리: 2020.04.12. 1. 머리말 그간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정치세력 내부의 구성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저자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과 조준을 비교해서 조선건국세력 내부의 구성과 다양한 정치운영론을 규명하려 한다. 저자는 이전에 『삼봉집』의 시문을 분석해서 정도전이 이색 문하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유한 반면 조준 계열의 인물들과는 소원했음을 밝혔다. (이익주, 2004) 저자는 그것이 정도전의 인간적인 교유에 국한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 글에서는 이전 연구의 연장선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관계’를 분석하려 했다. 즉, 정도전이 고려 말.. 2020. 4. 14.
[삼봉집] 공양왕에게 올리는 상소(정도전의 '척불상소') 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정도전 書)[上恭讓王疏, 이른바 '척불상소'] * 관련 자료: 공양왕의 구언교서 政堂文學臣鄭道傳伏讀敎書。 上以謹天文之變。 下以求臣庶之言。 而以八事自責。 臣讀之再三。 不勝感歎。 殿下以天之譴告。 引而歸之於己。 開廣言路。 冀聞過失。 雖古哲王。 未之或過也。 臣待罪宰相。 無所匡輔。 以貽君父之憂。 至煩敎諭之丁寧。 臣實赧焉。 嘗謂君爲元首。 臣爲股肱。 比之人身。 實一體也。 故君倡則臣和。 臣言則君聽。 或曰可。 或曰不可。 期於致治而已。 然則天之譴告。 由臣所致也。 古者有災異。 三公策免。 爲大臣者亦避位而讓之。 請免臣職。 以弭災異。 然念古之大臣。 當請退之時。 必有陳戒之辭況今獲奉敎書。 安敢不效一得之愚。 仰備採擇之萬一。 정당문학 신 정도전은 교서를 받들어 읽어보았습니다. 위로는 천문(天文)의 변화를 보고 스.. 2020. 4. 11.
공양왕의 구언교서 공양왕(恭讓王)의 구언교서(求言敎書) ▲공양왕의 능침 출전: 『고려사』 공양왕 3년(1391) 4월 癸未。 下敎求言曰。 弭灾之道。 莫如修德。 爲政之要。 惟在求言。 昔宋景一言之善。 致熒惑三舍之退, 天人之際。 感應斯速。 予以眇躬。 荷祖宗之靈。 託臣民之上。 憂勤夙夜。 期底豊平。 而智能不逮。 學問不明。 其於政敎。 動昧施爲。 若涉大川。 罔知攸濟。 계미일. 왕이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렸다. “재이(災異)를 멈추는 방법은 덕(德)을 기르는 것보다 좋은 방도가 없고, 정치를 펴는 핵심은 오로지 바른말을 구하는 데 있다. 옛날에 송 경공(景公)은 한 마디 좋은 말로 형혹성이 3사를 물러나게 했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다. 보잘것없는 내가 조종(祖宗)의 영령에게 은혜를 입고 신민(臣民)의 윗.. 2020. 4. 9.
선종구산문과 선문예참문의 문제점 허흥식, 1983, 「선종구산문과 선문예참문의 문제점」, 『역사교육논집』 5 2020.03.18.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는 나말여초에 선종이 성행하여 구산문(九山門)이 성립했다고 설명해왔다. 허흥식의 이 논문은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을 분석해서 신라 말에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이 성립했다는 종래의 설명 틀을 재검토하려는 글이다. 저자는 선종 조사에 대한 배례 의식을 수록한 『선문조사예참문』이 다른 저술에 비해서 “고려시대의 선종을 개괄해서 법맥(法脈)을 유추”하기에 훨씬 더 유용한 저작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에는 중국의 선종 조사 서른세 명뿐만 아니라 한국 측의 조사 열 사람에 대한 예참문도 실려있다. 이 열 명 중 아홉 사람은 나말여초에 활동했던 조사고, 나머지 한 사람.. 2020. 3. 20.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최병헌, 1972,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최치원의 四山碑銘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7 2020.03.18. 서언 최치원이 작성한 ‘四山碑銘’은 신라 하대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자료라 한다. 저자는 이 글에서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검토하여 신라 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밝히려 한다.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신라 하대의 선종사를 검토하기 때문에 저자는 검토 범위의 하한을 진성여왕 대로 설정했다. 1. 선종 성립 이전의 신라 불교 최치원은 불교가 백제ㆍ고구려ㆍ신라 순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신라의 불교 수용이 율령 반포 이후 8년 만에 이루어졌음을 특기했다. 당시 신라인들은 율령 반포를 전후한 법흥왕 대의 정치적 변혁을 대단히 중시했을 뿐 아니라 .. 2020. 3. 20.
보편문화와 고려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고려 관제 보편문화와 고려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고려 관제 - 김대식, 2007, 『고려전기 중앙관제의 성립』, 경인문화사 - 2020.02.23 고려는 자국의 정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당의 관제(官制)를 받아들였다. 그 핵심은 바로 ‘3성 6부제’다. 고려는 이 제도를 자국의 실정에 맞게 조정해서 2성 6부 형태의 중앙관제를 마련했다. 중국의 제도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런 설명은 지금껏 고려의 정치제도에 관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전통적인 관제와는 매우 이질적인 당의 관제가 어떻게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도입될 수 있었을까? 정작 율령제에 기초한 3성 6부제가 당의 정치제도로 기능한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면 고려가 받아들인 3성 6부의 실체는.. 2020. 3. 19.
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 한정수, 2007,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혜안 - 2020.02.14. 이른바 ‘나말여초’(羅末麗初)라 불리는 시기의 농업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을까? 당시의 농업생산량은 증가하는 중이었을까? 과연 새롭게 등장한 지배층은 어떤 존재인가? 큰 폭의 사회변동 속에서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그런 변화 속에서 건국된 고려의 역사적 위상은 무엇일까? 대개 이런 질문들은 한국사의 ‘발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 발전에 관한 생각과 별개로, 이 문제들이 9~10세기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한정수의 저서 『한국.. 2020.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