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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고대사

선종구산문과 선문예참문의 문제점

by 衍坡 2020. 3. 20.

허흥식, 1983, 「선종구산문과 선문예참문의 문제점」, 『역사교육논집』 5


2020.03.18.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는 나말여초에 선종이 성행하여 구산문(九山門)이 성립했다고 설명해왔다. 허흥식의 이 논문은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을 분석해서 신라 말에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이 성립했다는 종래의 설명 틀을 재검토하려는 글이다.


저자는 선종 조사에 대한 배례 의식을 수록한 『선문조사예참문』이 다른 저술에 비해서 “고려시대의 선종을 개괄해서 법맥(法脈)을 유추”하기에 훨씬 더 유용한 저작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에는 중국의 선종 조사 서른세 명뿐만 아니라 한국 측의 조사 열 사람에 대한 예참문도 실려있다. 이 열 명 중 아홉 사람은 나말여초에 활동했던 조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무신집권기에 활동했던 보조국사 지눌이다. 저자는 이 책이야말로 이른바 ‘선종구산문설’의 근거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그가 굳이 『선문조사예참문』을 분석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초기의 불교사학자들은 이 책을 굳이 전거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의 입장에 서면, 그 이유는 『선문조사예참문』의 내용이 초기 불교사학자들에게 너무나도 자명하고 보편적인 사실이었기에 굳이 전거로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문조사예참문』이 별책으로 현존하는 판본 중에 간기(刊記)가 존재하는 것은 ‘갑사본’(岬寺本)과 ‘부인사본’(夫人寺本)으로 나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책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간행된 것이다. 다만 이 책이 기존의 간행본을 복간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저자는 한국 선사 10인 중에 지눌이 포함된 사실에 주목한다. 그의 논점은 이렇다. ‘고려 후기에 보우가 승정(僧政)을 장악하면서 모든 선종계가 그의 문하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고려 말 이래로 선종의 계보에서 보우의 법맥이 강조되고 구산의 조사와 지눌은 방계로 취급되었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구산 조사와 지눌의 법맥이 강조된 것을 보면 이 책이 고려 말 이후에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선문조사예참문』은 지눌과 보우가 활동했던 시기 사이에 간행되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즉, ‘갑사본’과 ‘부인사본’은 지눌 활동기와 보우 활동기 사이에 간행된 판본을 복간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눌의 법맥을 강조하는 불교 계통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어야 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저자는 누구인가? 저자는 “보조(普照) 이후 태고(태고(太古) 이전”의 저술연대에 해당하는 글을 조사한 뒤, 『선문조사예참문』과 명칭이 비슷한 「조사예참의문겸발원문」(祖師禮懺兼發願文)을 쓴 석복암(釋宓菴)을 저자로 추정했다. 수선사를 계승하여 중창한 그의 이력도 그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선문조사예참문』이 고려 후기에 지어진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신라 말에 구산선문이 성립했다는 설명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문조사예참문』에 근거한 선종구산문설이 “본서가 서술될 당시를 반영한다면 그 이전에는 구산문의 확정도 없을 수 있고, 본서의 구산설은 고려 후기에 성립됨으로써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계를 설명하는 데에 부적당”하다. 저자는 고려 초기 선종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고달원(高達院)ㆍ도봉원(道峯院) 등은 구산문에서 도외시된 점을 그 추론의 근거로 내놓았다. 즉, 선종9산문이 나말여초 선종계를 충분히 망라하지 못하는 개념임을 생각하면 그것은 고려 초기보다 고려 후기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결국은 이 글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선문예참문의 구산조사와 구산문은 신라말ㆍ고려초의 선종계를 체계화하기는 부적당한 저술이며, 고려 후기의 선종계를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데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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