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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한국 고대사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by 衍坡 2020. 3. 20.

최병헌, 1972,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 –최치원의 四山碑銘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7




2020.03.18.







서언


최치원이 작성한 ‘四山碑銘’은 신라 하대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자료라 한다. 저자는 이 글에서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검토하여 신라 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밝히려 한다.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신라 하대의 선종사를 검토하기 때문에 저자는 검토 범위의 하한을 진성여왕 대로 설정했다.




1. 선종 성립 이전의 신라 불교


최치원은 불교가 백제ㆍ고구려ㆍ신라 순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신라의 불교 수용이 율령 반포 이후 8년 만에 이루어졌음을 특기했다. 당시 신라인들은 율령 반포를 전후한 법흥왕 대의 정치적 변혁을 대단히 중시했을 뿐 아니라 그 정치적 변혁을 불교의 전래와 결부시켜 이해했던 것이다. 아울러 최치원의 서술은 신라에 전해진 불교가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에 유입된 대승불교가 王卽佛 사상에 입각하여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


최치원의 서술에 의하면,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화엄학 중심의 교학이 성행했다. 화엄은 圓融思想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 사회적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필요로 했다. 절대적 왕권이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던 신라 중대에 화엄학이 성행했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왕실ㆍ귀족 중심의 화엄교학은 점차 空論으로 빠져들어 민간과 유리되었고, 신라 하대에 왕권이 약해지면서 사회적 기반도 잃고 말았다. 禪宗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출현했다. 선종은 사상적으로 교학불교에 대한 도전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절대왕권을 부정하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선사들은 대부분 처음에 화엄학을 공부했지만, 곧 그 한계를 깨닫고 선종을 받아들였다. 신라인들이 당시 사회의 사회적ㆍ사상적인 문제점을 자각하고 인식한 결과였다. 이것은 그만큼 그만큼 신라 불교의 수준이 당면한 모순을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2. 선종의 초기 수입


선종은 간헐적으로나마 일찍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었지만, 헌덕왕 대 이전까지 독립적인 종파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왕실과 귀족을 사회적 기반으로 한 화엄불교가 당시의 불교계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신라 헌덕왕 대에 선종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神行이다. 그는 중국에서 北宗禪을 수용해서 귀국했다. 그렇지만 교학불교와 남종선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북종선은 중국에서 남종선이 발달하며 곧 소멸했다. 자연스레 신라에서도 북종선의 유입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행 계통은 지증대사 都憲에게 부분적으로 계승되어 曦陽山派로 흡수되었다.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선사들이 불우했던 데 비해서 귀국하지 않고 당에 머물며 이름을 떨치던 선사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淨衆寺의 無相은 중국 선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뿐 아니라 신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선종은 중국에서 성립된 직후부터 신라에 유입되었고 신라의 선사들이 중국 선종의 발전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禪師들은 단순히 중국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불교계와도 연결되어 신라 선종이 성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 선종구산파의 성립


① 승려 道義는 馬祖道一의 제자 西堂智藏에게 남종선을 수용하고 돌아와 선종을 설파했지만 교학 중심의 불교계에게 배착당하고 설악산에 은거했다. 그렇지만 그의 법통은 결국 普照禪師 體澄에게 이어져 迦智山派를 이루었다.


② 서당지장의 문하에서 도의와 함께 수학한 洪陟은 도의보다 뒤늦게 귀국해 實相寺를 창건하고 實相寺派를 이루었다. 홍척은 처음으로 왕실로부터 歸依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간 불교계에서 간헐적으로 논의되던 선종이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중요한 계기였다.


③ 전라도 곡성 泰安寺의 慧哲은 桐裏山派를 이루었다. 그는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당으로 가서 서당지장에게 수학하고 돌아와 문성왕의 귀의를 받았다.


④ 圓鑑國師 玄昱의 제자 審希는 경상도 창원에 봉림사를 세우고 鳳林山派를 이루었다.


⑤ 澈鑒禪師 道允의 제자 折中이 강원도 원주의 사자산을 중심으로 師子山派를 이루었다.


⑥ 항주 鹽官齊安의 가르침을 받은 梵日은 강원도 강릉 崛山寺를 중심으로 闍崛山派를 이루었다.


⑦ 麻谷寶徹의 가르침을 받은 朗慧和尙 無染은 충청도 웅천에서 聖住山派를 이루었다. 당시 성주산파를 禪門九山 중에서도 가장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⑧ 智證大師 道憲은 道義와 함께 당에 유학한 慧昭를 제1조로 추존하여 曦陽山派를 이루었다. 도헌은 다른 선사들과 달리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禪門을 이루었다. 이것은 지금껏 중국의 선종을 수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중국 선종의 각 종파를 종합ㆍ절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⑨ 利巖은 황해도 해주에서 廣照寺를 중심으로 須彌山派를 이루었다.


선종구산문





4. 선사들의 신분과 사회경제적 기반


최치원의 비명에 의하면 慧昭ㆍ無染ㆍ道憲 세 선사는 왕실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다른 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경향은 단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선사들의 사회적 기반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선사들은 대체로 몰락한 진골귀족이었거나 6두품 이하 출신자들이었고, 가세도 한미했다. 그들은 주로 같은 신분의 지방세력을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선종사원을 창건했다. 신라 하대에 성립되는 선종구산파는 그 창시자들이 모두 비진골족인 6두품 이하의 신분이었고, 그 사회적 기반 또한 왕실이나 중앙 귀족이 아닌 지방세력이었던 것이다. 선종 승려들은 같은 신분의 지방세력을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각처에 지방사원의 장원을 형성해 가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결어


신라 하대에 등장한 선종은 종래의 교학불교에 도전했다. 당시 활발하게 활동한 선사들은 주로 진골족 몰락자거나 6두품 이하 출신자였고, 그들은 왕실ㆍ귀족 대신 같은 출신의 지방세력을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선종 구산파를 성립시켰다. 선사들은 경전 중심의 불교 연구를 비판하면서도 유학사상과 노장사상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선사들이 단순히 불교의 승려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으로서의 성격도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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