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논저 정리/한국 고대사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by 衍坡 2018. 5. 8.

이성시,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1. 
머리말

최근 십수 년 사이 발해사 연구는, 대체로 각 민족, 국가에 속하는 연구자의 특색 있는 문제 의식이 뚜렷하게 보이며 저마다 중요한 논점이 드러나 있다. 이에 1절에서는 연구들의 개요와 발해서 연구의 현상과 주요 논점을 거론하겠다. 2절에서는 박시형, 이우성 두 사람에 의해 제기된 ‘남북국 시대’론을 검토하고 한국사 체계 자체의 개편 기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3절에서는 남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 논점을 정리하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비판 ․ 검토하며, 4절에서는 ‘남북국 시대’론의 틀이 가진 문제점을 민족 ․ 국가관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 발해사 연구의 여러 양상


① 태평양전쟁 패전 전의 일본

태평양전쟁 패전 전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발해사가 연구되었다. 도야마 군지에 따르면 발해사 연구의 발단은 러일전쟁 후 일본 학계의 관심이 만주로 향해진 결과이며, 일본의 대륙 진출이 발해사 연구의 진전에 큰 요인이 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가 일본의 만주 침략 정당화와 그 학문적 뒷받침으로서 연구되고 이용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패전 전 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를 만주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가로서 취급하면서도 그 국가 및 문화의 독자성이나 만주 ․ 시베리아 지역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즉 패전 전 일본의 발해사 연구의 근저(根底)에는 “말갈족이 일으킨 (발해라는) 나라는 ‘문화국’의 대극에 있는 미개 야만이며, 이른바 당 ․ 고구려의 두 문화에 종속하는 문화적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이 존재했던 것이다.


②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에서는 고고학상의 발굴 조사를 발해사 연구의 기초로 삼아 거둔 성과가 다방면에 걸쳐 속속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발해를 “당대 흑룡강 지구의 지방 봉건 정권”, “소수 민족이 건립한 하나의 지방 정권”, 또는 “당 왕조 할속의 소수족 지방 정권”, “당조 통할하의 지방 민족 정권”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은 발해의 민족문제에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일절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견해를 전개해가고 있다. 이는 발해를 중국사에 자리 매김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명확하게 표명되며, 현재 중국의 민족 정책이 짙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③ 구소련

구소련의 발해사 연구에서 주목할 것은 중국에서의 발해사 연구를 ‘아시아 중심주의’로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의 “한 민족의 인종적 우월을 인정하고 다른 민족의 능력을 불충분하다고 보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구소련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시베리아 여러 민족 ․ 종족의 형성 ․ 발전사 속에 자리 매김되고 있어, 발해를 극동 지방 여러 종족의 역사에서 그들이 세운 최초의 국가로 간주한다. 그리고 발해의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발해는 말갈족의 국가이며, 말갈인은 기원도 달리하고 언어도 달리하는 여러 종족이 수천 년에 걸친 형성과정을 통해 단일 민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국제적 관점에서 극동 여러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 문화적 독자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연구된 것이다.



3. ‘남북국 시대’론과 한국사 체계


북한에서는 최초의 본격적 통사로 『조선통사』(1956)가 간행되었다. 이 책에서는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조선 준민족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조선 민족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종족(부족) - 나로드노스치(준민족) - 나치아(민족)’으로 구분하는 스탈린의 민족 이론에 따른 것이며, 이를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박시형의 눈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에 의해 일변하게 된다.

박시형의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조선사의 일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여 발해사를 한국사 자리 매김 하고 이로써 한 국가 체계 자체의 개편까지 기도하고 초래하였다. 이는 『조선통사』의 개정판에 반영되어 “지난날의 삼국정립은 남북 이국에 의해 재현 되었고”, “발해와 신라의 양립은 그 후 2백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으며”라고 서술됨으로써 발해와 신라를 완전히 대등한 지위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한편, 나로드노스치의 역사적 형성에 대한 발상이 후퇴함으로써 새로운 민족관이 형성되었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종래의 민족관이 후퇴하고 새로운 민족관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민족관에서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고려라고 보면서 삼국 시대 이전에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과 동일성이 이미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박시형은 이러한 민족관을 토대로 ‘발해가 민족적으로도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신라와 발해가 서로 ‘동족’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박시형의 주장은 단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평가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토대로 한국사 체계 자체를 개편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시형과 이우성의 견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뚜렷한 차이점이 존제하는데, 박시형은 발해와 신라가 상존해있던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북국’은 결국 전통적인 ‘남북조’라는 발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중국 및 일본에서의 남북조는 남북조 시대 이전에 남조와 북조 모두가 정통성을 인정하는 하나의 국가나 왕실 계보가 존재했다는 전제 위에 성립된다. 하지만 박시형의 민족관에 따르면 한반도의 경우는 전통적 남북조의 성격과는 차이가 있다.

박시형의 민족관에 따르면, 비록 삼국 시대 이전부터 한민족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는 고려이다. 하지만 발해와 신라가 병존해 있던 시기는 고려보다 앞선 시기였으며, 그 이전 시기에 발해와 신라 모두가 정통성을 인정할만한 통일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남북조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가 병존해 있던 시기를 두고 ‘남북국 시대’라는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상으로도 인정하기 어렵다. 북한에서 이 시대를 ‘발해 및 후기신라사’라고 병기하는 데 그친 것은 위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병립해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규정하여 서술해야한다는 주장이 거듭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움직임도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수막새

▲고구려의 수막새(좌)와 발해의 수막새(우). 두 수막새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근거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논리라고 보기 어렵다.


4. 남북국 시대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 편입하는 논거는 민족 ․ 종족 문제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움직일 수 없는 인식상의 전제는 발해의 영역에 그 전사(前史)로 있었던 고구려가 한국사의 불가결한 일부이며 고구려인은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 편입하려고 할 때, 발해의 민족 ․ 종족상의 고구려 계승관계를 논증하는 것이 그 중심 과제가 된다. 

여기에 대해 발해사 연구는 발해와 신라의 동족관계 증명, 발해의 고구려 계승과 민족적 계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논점들을 정리하면 ①건국자 및 건국 집단의 출자 문제 ②발해 국내의 민족적 구성과 지배 집단의 역할 ③발해 왕실 및 지배자 집단의 고구려 계승 의식 ④발해와 신라 상호간의 동족 의식 ⑤발해 유민의 귀추와 귀속의식 ⑥고구려 문화의 영향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건국자나 지배집단의 민족적 계보를 통해 바로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 관계를 밝힐 수 없고 ㉡발해의 통치가 고구려 시대와 같은 일방적 지배-종속 관계만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고 ㉢국서의 글귀와 발해왕의 ‘고려 국왕’ 자칭을 고구려 계승으로 보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게 해석한 것이고 ㉣발해를 ‘북국’으로 칭한 것만으로 동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고 ㉤고려가 망명한 발해인을 이역민(異域民)으로 대우하였고, ‘고려’라는 국호 채용이나 발해 망명인 수용은 고려가 자기 정권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며 ㉥유적-유물에서 고구려의 영향만을 찾아내려는 것은 객관적 고찰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5. 남북국 시대론의 민족 ․ 국가관


남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 성립 이전에 한민족이 단일 민족으로서 형성되어 있었다’는 전제 위에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존재라는 관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후에 생긴 ‘민족’이라는 개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 시대의 그것에 주저 없이 곧바로 투영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몽골 고원, 북아시아 및 중국 동북부는 예부터 유목 수렵 민족의 국가들이 흥망해왔다. 따라서 그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민족 구성은 복잡하므로 오늘날 왕실을 중심으로 한 지배자 집단의 민족을 따져서 그 국가들에 대해 특정 민족의 역사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러한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상호 관계가 불일정하고 유동적이며 불안정하다. 따라서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후 발생한 민족 개념으로 발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문제에 있어서도 발해와 신라의 외교 관계를 근대 국민 국가 간의 국제 관계에 유추하여 해석하고 있지만, 국민 국가를 행동 주체로 해서 그 상호 관계를 국제 관계로서 파악하고자 생겨난 국제 관계론으로는 국민 국가 성립 이전 시기 국가 간의 독자적인 관계성 파악이 불가능할 것이다. 



6. 맺음말


어떤 연구자라도 시대와 사회의 사상이나 통념에 얽매이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민족’ 개념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고, 나아가 이를 역사적으로도 상대화해 볼 필요가 있다. 또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발해 강역의 인문적 ․ 자연적 조건에 대한 관심 위에서 수렵 ․ 어로 ․ 유목 ․ 농경 등 다양한 생산 활동을 가진 여러 종족이 이 지역 풍토에 뿌리 내리며 독자적인 민족 및 국가를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엇보다 가장 요긴한 것은 오늘날의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즉, 발해 국가 성립 이전에 북방지역에서 이미 여러 종족의 융합이 있었음을 인식하고, 훗날의 여진족까지 포함하여 여러 말갈 부족을 한민족 형성사 속에 자리 매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