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도」 뒤에 붙이는 서문
三國圖後序 (『東文選』 92)
이 첨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총도'
[원문]
皇明啓統, 奄有四海, 尺地寸天, 皆入版籍. 輿圖之廣, 幅員之脩, 其必有職之者矣. 在昔成周, 大司徒掌天下土地之圖, 以周知幅員之數, 而職方氏之圖加詳焉. 迨漢滅秦, 蕭何先收其圖書, 始具知天下阨塞, 戶口多小之差. 光武皇帝披輿地圖, 指示鄧禹曰: “天下郡縣如是, 今始得一.” 則地之有圖, 尙矣. 本朝郡縣, 載於圖籍者, 略而不詳, 無以考驗也. 統合以後, 始有高麗圖, 未知出於誰手也. 觀其山, 自白頭迤邐, 至鐵嶺突起而爲楓岳, 重複而爲大小伯, 爲竹嶺, 爲雞立, 爲三河嶺. 趨陽山而中臺, 亘雲峯而地理, 地軸至此, 更不過海而南. 淸淑之氣, 於焉蘊蓄, 故山極高峻, 他山莫能兩大也. 其脊以西之水, 則曰薩水, 曰浿江, 曰碧瀾, 曰臨津, 曰漢江, 曰熊津, 皆達于西海. 脊以東, 獨伽耶津南流耳. 元氣融結, 山川限帶. 其風氣之區域, 郡縣之疆場, 披圖可見已. 自三朝鮮以後, 率瓜分幅裂以據之, 未有定于一者. 王氏始祖躬擐甲冑, 火攻水戰, 克成統合之功. 至于季葉, 頹靡已甚, 祖宗舊物, 不能保有, 天命人心, 復有所歸. 今我主上殿下, 以聦明英斷之資, 當五百興王之運, 應天順人, 肇造東夏, 復朝鮮之舊號, 定新都于漢陽. 按圖考驗, 此其時也. 歲丙子, 寓居新都, 讀三國史, 苦其繁多, 猥以管見, 妄加刪述, 約之爲三卷. 且按本朝地圖, 釐而爲三, 各冠篇首. 凡郡縣, 皆以舊名載之, 注以今名. 惟朔庭以北, 平壤以西, 地志所不載者, 則直以今名載之耳. 夫地圖之離合, 抑有說矣. 一與二, 天地生成之數也, 爲奇爲偶, 以生萬物, 三亦生數也. 一之未必合, 三之未爲離, 見其三則可以知統合之難, 見其一則可以知守成之不易, 亦不爲無補於王敎也.
[번역문]
명나라가 황통(皇統)을 세우자 바로 온 세상을 차지하여 한 자의 땅과 한 마디의 하늘조차 모두 명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그 넓은 지도와 광대한 강토에 관해서는 틀림없이 관장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옛날 주나라 때에는 대사도(大司徒)가 온 세상의 땅에 관한 지도를 관장해서 땅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두루 알았고, 직방씨(職方氏)가 관장한 지도는 더욱 상세했다. 한(漢)이 진(秦)을 멸망시켰을 때, 소하(蕭何)는 먼저 그들의 지도와 호적을 접수하여 비로소 천하의 요충지와 호구의 많고 적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광무제(光武帝)는 여지도(輿地圖)를 펼쳐놓고 등우(鄧禹)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의 군현이 이와 같은데, 지금에야 한 곳을 얻었다.” 그렇다면 지도가 존재한 지는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本朝]의 군현이 지도와 호적에 기재된 것은 간략해서 자세하지 않으므로 살펴서 증명할 길이 없다. 나라가 통합된 뒤에야 처음으로 「고려도」(高麗圖)가 만들어졌지만,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지도에 그려진 산을 살펴보면 백두산에서부터 굽이굽이 이어지다가 철령에서 우뚝 솟아 풍악산(楓嶽山)이 되고, 겹겹이 이어져서 태백산(太白山)ㆍ소백산(小白山)ㆍ죽령(竹嶺)ㆍ계립령(鷄立嶺)ㆍ삼하령(三河嶺)이 된다. 양산(陽山)으로 내달려 중대산(中臺山)이 되고 운봉(雲峯)으로 뻗어 지리산이 되는데, 지축(地軸)이 여기에 다다르면 다시는 바다를 넘어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맑고 깨끗한 기운이 그곳에 쌓여서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니, 다른 산 중에는 그만큼 큰 것이 없다. 그 등마루 서쪽의 물줄기는 살수(薩水)와 패강(浿江), 벽란(碧瀾)과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과 웅진(熊津)인데, 모두 서해(西海)로 흘러 들어간다. 등마루 동쪽으로는 가야진(伽耶津)만이 남쪽으로 흐를 뿐이다. 원기(元氣)가 조화를 이루어 뭉쳐있기 때문에 산줄기가 끝나는 곳을 강물이 둘러싼다. 그 풍기(風氣)가 나뉘는 영역과 군현의 경계는 지도를 펼치면 볼 수 있다.
세 조선 이후로는 나라가 오이 나뉘듯이 쪼개지고 천이 찢어지듯이 갈라져서 각자 땅을 차지했으므로 나라를 하나로 안정시킨 자가 없었다. 왕씨(王氏)의 시조[王建]가 몸소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화공과 수전을 겪은 뒤에야 마침내 나라를 통합하는 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왕조 말엽에 너무나도 쇠퇴해서 조종(祖宗)의 문물제도가 보존될 수 없었고, 천명과 인심이 떠나서 새로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과감한 자질로 500년 만에 왕도(王道)를 부흥하게 하는 운수를 만나 천명에 부응하고 인심에 순응해서 처음으로 동방의 중화[東夏]를 세우고는, 조선이라는 옛 국호를 회복하고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셨다. 이 지도를 살펴서 증험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병자년(1396)에 새 도읍에 머무르면서 『삼국사』(三國史)를 읽었는데 그 책의 번잡함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외람되게도 나의 좁은 소견으로 마음대로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면서 서술하고 간추려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또 우리나라의 지도를 살펴서 정리하고 세 개로 만들어서 각각 책머리의 가장 앞부분에 두었다. 모든 군현은 옛 지명으로 기재하되 오늘날의 지명으로 주를 달았다. 삭정(朔庭)의 북쪽 지역과 평양의 서쪽 지역 중에서 지지(地志)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저 오늘날의 지명만을 적었다. 무릇 지도가 흩어지고 합해지는 것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설이 있다. 1과 2는 하늘과 땅이 생성(生成)하는 수로 하나는 홀수[奇數]가 되고 다른 하나는 짝수[偶數]가 되어서 만물을 낳으니, 3도 생수(生數)다. 1이 되면 꼭 합해지지는 않는 것이고 3이 되면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3이 나온다면 나라를 통합하는 어려움을 알 수 있고, 1이 나온다면 이루어놓은 사람을 지켜나가는 어려움을 알 수 있으니 왕의 교화에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해설]
「삼국도후서」는 어떤 글인가?
「삼국도후서」는 여말선초의 지식인이자 문신이었던 이첨(李詹, 1345~1405)의 글이다. 이 글이 저술된 시점은 1396년(태조 5)부터 1398년(태조 7) 사이다. 이첨은 1396년에 한양에 머물면서 『삼국사기』를 읽었는데, 책의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도 중복되는 곳이 많아 읽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삼국사기』를 간추리고 정리해서 세 권의 역사서로 만들었고, 각 책머리에는 삼국의 지도를 나누어 붙였다. 「삼국도후서」는 지도 뒤에 붙인 서문이다.
「삼국도후서」가 작성된 시점은 글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 의하면 이첨은 병자년 당시 한양에 머물렀는데, 이때의 병자년은 곧 1396년이다. 이첨은 고려 말에 정몽주와 조선 건국을 반대했고, 그런 탓에 조선이 개창된 뒤로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1394년(태조 3)에 사면된 뒤로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지방에 머물렀던 그는 1396년(태조 5)에야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한양에 머물던 병자년이 바로 이때를 가리킨다. 하지만 「삼국도후서」가 1396년에 지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가 『삼국사』를 편수한 시점은 1396년이지만 작업을 완료한 시점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성계를 “우리 주상전하”라고 지칭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늦어도 1398년 이전에 「삼국도후서」가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도후서」의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본문을 살펴보면, 글의 서두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사례를 활용해 지도의 연원과 중요성을 밝혔다. 그다음으로는 고려의 지도를 살펴서 한반도의 산천(山川)을 설명했고, 이어서 한반도의 역사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서술했다. 마지막으로는 『삼국사』를 편집한 동기와 범례, 책을 굳이 세 권으로 만든 이유를 소개했다.
중국의 지도와 이첨의 명분론적 관점
이첨은 글의 서두에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며 지도의 연원과 그 필요성을 밝혔다. 여기에는 명나라와 주나라의 사례, 소하와 한무제의 고사가 실렸다. 이첨의 논점은 이런 것이다. ‘온 세상을 차지한 명나라는 엄청나게 광대한 땅을 통치해야 하고, 그 넓은 영역을 다스리려면 지도가 필요하다. 명나라에는 틀림없이 땅과 지도를 관장하는 직책이 있을 것이다. 땅과 지도를 관장하는 직책은 이미 주나라 때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대사도와 직방씨가 바로 그런 관직이었다.’ 이 대목에서 이첨은 틀림없이 『주례』(周禮)를 참조했을 것이다.
『주례』에 의하면, 대사도(大司徒)는 국토와 인구에 관한 정보가 담긴 지도와 호적을 관장했다. 그의 업무는 “구주(九州)의 지역과 그 넓이를 두루 알아서 산림과 천택, 구릉과 평지, 벌판과 습지의 명칭과 산물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직방씨(職方氏)의 소임은 더더욱 실무적이었다. 그는 “천하 지도에 관한 직무를 맡아서 온 세상의 땅을 관장”했다고 한다. 천하 각지에 관한 정보와 이민족들의 재정ㆍ곡식ㆍ가축 수요 등을 세세하게 살펴서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1그들에게 지도와 호적은 필수품이었다. 지도가 이토록 중요했기 때문에 한고조 유방의 참모였던 소하도 멸망한 진나라의 궁궐에 들어서자마자 지도와 호적을 먼저 접수한 것이다. 2 광무제가 등우와 천하를 도모하면서 굳이 지도를 펼쳐놓은 것도 지도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3 4
글의 서두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이첨이 명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명나라가 황통(皇統)을 세우자 바로 온 세상을 차지하여 한 자의 땅과 한 마디의 하늘조차 모두 명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이첨이 글의 첫머리에서 명나라의 번영을 거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부터 명나라가 정통성을 갖춘 중화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양왕 대에는 경연에 참석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켜왔습니다. (…) 원(元) 말기에 이르러서는 북쪽의 상도(上都)로 도읍을 옮겼지만, 달려가 문안을 한 것은 더욱 공손했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로서의 절의를 굳게 지켜온 것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당당한 천조(天朝)가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라도 신하로서의 절의를 위배할 수 있겠습니까?” 5
이첨은 오랫동안 신하로서의 절의를 지켜온 자국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꼈다. 더구나 명나라를 ‘천조’(天朝)라 부르며 신하로서의 절의를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삼국도후서」의 첫머리에서 그가 명을 칭송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이첨만의 독특한 면모는 아니었다. 명과 북원 중에서 어느 쪽에 사대할지를 두고 조정의 의견이 갈리자 정몽주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동방(東方)은 바다 밖의 한 모퉁이에서 우리 태조가 당나라 말엽에 일어났을 때부터 중국을 예로 섬겨왔습니다. 그들을 섬길 적에는 과연 천하의 의로운 주인[義主]인지를 살폈을 뿐입니다.” 정몽주의 시각도 이첨의 명분론적인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6
물론 이첨과 정몽주는 원ㆍ명 교체기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속에서 명분만이 아니라 중원의 형세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려가 중원 왕조에 신하의 절의를 지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첨의 모습은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몽골 복속기를 거치는 동안 고려에서는 중원 왕조에 제후국의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보편적 가치로 떠올랐다고 한다. 고려는 몽골 이전의 중원 왕조들과 책봉-조공을 맺고 그들의 ‘제후국’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지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 복속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 국왕은 단순히 ‘외국의 군주’가 아니라 고려의 국왕이자 부마였고, 또 정동행중서성 승상이었다. 이런 위상 변화와 함께 몽골 황제의 영향력이 고려 경내에까지 직접적으로 미치기 시작했다. 이제 고려는 명실상부한 몽골제국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고려에서 제후국으로서의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나타난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물론 이런 변화는 조선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 7 이첨의 명분론적 인식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8
「고려도」의 산줄기와 이첨의 산천인식
중국의 고사를 검토하던 이첨의 관심은 「고려도」라는 지도 한 장으로 옮아간다. 이 지도는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첨의 서술을 통해서 「고려도」에 그려진 산천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고려의 산줄기는 금강산을 지나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다시 죽령과 계립령을 거쳐 삼하령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계립령(鷄立嶺)은 오늘날의 충청북도 충주와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자리한 고개를 가리킨다. 삼하령(三河嶺)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산줄기는 이곳에서 다시 양산(陽山)과 운봉(雲峯)으로 나뉘어 중대산(中臺山)과 지리산(智異山)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의 지명으로 보면 양산은 영동 일대를, 운동은 남원 외곽 지역을 가리킨다. 오늘날 ‘백두대간’이라 불리는 산줄기가 이미 고려 시대의 지도에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줄기의 서쪽으로는 청천강ㆍ대동강ㆍ예성강ㆍ임진강ㆍ금강이 서해로 흘러가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남쪽으로 흘러간다고 이첨은 설명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려진 한반도의 산줄기 (왼쪽은 충청도 지도, 오른쪽은 전라도 지도의 일부다.)
「고려도」를 살펴본 이첨은 특히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산줄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삼국도후서」에 한반도의 산줄기가 그토록 자세히 서술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첨의 태도가 유별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고려도」에 한반도의 산줄기가 강조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 사람들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고려 후기의 도참서도 자국의 영역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공민왕 초기에 사천소감을 지낸 우필흥의 발언은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옥룡기玉龍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땅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해서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난다. 그 형세를 보면, 수(水)가 뿌리이고 목(木)이 줄기가 되는 땅이다. 또한 흑(黑)을 부모로, 청(靑)을 몸으로 삼고 있으니 풍속(風俗)이 토(土)에 순응하면 나라가 창성하고, 거역하면 나라에 재변이 일어날 것이다.’” 이첨이 자국의 산세에 관심을 보인 것도 당시의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9 10
그렇지만 이첨이 단순히 한반도의 지세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첨에게는 지세(地勢)만큼이나 지기(地氣)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가 보기에 지리산이 높고 험준한 것은 그곳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온축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줄기가 끝나는 지역을 강물이 휘감은 것도 원기(元氣)가 조화를 이루면서 뭉친 덕분이었다. 이첨은 자국 산천의 특징을 지기와 연결 지어 설명하려 한 것이다.
지세와 지기에 관한 이첨의 서술은 곧 조선 건국의 정당성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첨이 보기에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고려가 쇠퇴해 왕조를 보존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영웅의 자질을 갖춘 이성계가 왕도를 부흥할 시운(時運)을 얻어 천명과 인심에 부응한 결과였다. 이첨은 그렇게 건국된 조선을 “동하”(東夏), 즉 ‘동방의 중화’라고 일컫고는 짧은 말을 덧붙였다. “이 지도를 살펴서 증험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어느 연구가 지적한 것처럼, 이첨은 “이 지도에서 지기와 풍기와 산천의 관계,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과 조선이 ‘동하’가 되는 이유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첨의 의도는 산천과 지기의 관계를 살피는 데서 더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과 자국이 ‘동방의 중화’인 이유를 지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11 12
- 『周禮』, 「地官司徒」. 大司徒之職, 掌建邦之土地之圖, 與其人民之數, 佐王安擾邦國. 以天下土地之圖, 周知九州之地域廣輪之數, 辨其山林ㆍ川澤ㆍ丘陵ㆍ墳衍ㆍ原隰之名物, 而辨其邦國都鄙之數, 制其畿疆而溝封之. [본문으로]
- 『周禮』, 「夏官司馬」. 職方氏, 掌天下之圖, 以掌天下之地. 辨其邦國ㆍ都鄙ㆍ四夷ㆍ八蠻ㆍ七閩ㆍ九貉ㆍ五戎ㆍ六狄之人民, 與其財用ㆍ九穀ㆍ六畜之數要, 周知其利害. [본문으로]
- 『史記』, 世家, 「蕭相國世家」. 及高祖起爲沛公, 何常爲丞督事。沛公至咸陽, 諸將皆爭走金帛財物之府分之, 何獨先入收秦丞相御史律令圖書藏之. 沛公爲漢王, 以何爲丞相. 項王與諸侯屠燒咸陽而去, 漢王所以具知天下阸塞, 戶口多少, 彊弱之處, 民所疾苦者, 以何具得秦圖書也. [본문으로]
- 『後漢書』, 「鄧禹傳」. 王郎起兵, (…) 從至廣阿, 光武舍城樓上, 披輿地圖,指示禹曰: “天下郡國如是, 今始乃得其一. 子前言以吾慮天下不足定, 何也?” 禹曰: “方今海內殽亂, 人思明君, 猶赤子之慕慈母. 古之興者, 在德薄厚, 不以大小.” [본문으로]
- 『고려사절요』 권 35, 공양왕 3년(1391) 10월. 御經筵, 講貞觀政要. 至唐太宗欲重討高麗, 房玄齡上表諫之之語, 左代言李詹白王曰: “我國自古能守臣節. 昔梁武帝爲侯景所逼, 而我遣使往朝, 至則市朝鞠爲茂草, 使者見而泣. 侯景執之以問, 答曰, ‘不如古昔盛時, 是以泣.’ 侯景義而釋之. 唐玄宗被祿山之禍, 西幸蜀道, 而我使往蜀, 玄宗喜, 親製詩, 賜之. 此皆載在簡編, 昭然可觀. 至若元末, 北遷上都, 而奔問猶謹, 此臣等所親見也. 故固守臣節, 他國莫及. 況今堂堂天朝, 安敢稍違臣節.” [본문으로]
- 『고려사』 권 117, 열전 30, 鄭夢周傳. 念吾東方, 僻在海外, 自我太祖, 起於唐季, 禮事中國, 其事之也, 視天下之義主而已. 頃者, 元氏自取播遷, 大明龍興, 奄有四海. 我上昇王, 灼知天命, 奉表稱臣, 皇帝嘉之, 封以王爵, 錫貢相望者, 六年于玆矣. [본문으로]
- 김순자, 2001, 「원명 교체와 여말선초의 화이론」, 『한국중세사연구』 10. [본문으로]
- 최종석, 2017, 「고려후기 `자신을 이(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민족문화연구』 74. [본문으로]
- 『고려사』 권 39, 세가 39, 공민왕 6년(1357) 윤 9월. 司天少監于必興上書言: “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其勢, 水根木幹之地. 以黑爲父母 以靑爲身, 若風俗順土則昌, 逆土則灾.’ 風俗者, 君臣衣服冠盖樂調禮器是也, 自今文武百官, 黑衣靑笠, 僧服黑巾大冠, 女服黑羅, 又於諸山, 裁松茂密, 凡器用鍮銅瓦器, 以順土風.” 從之. [본문으로]
- 이첨의 산천인식이 고려의 국토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조선 후기 지식인의 지리인식과 비교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의 학자 우하영(禹夏永, 1741~1812)도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조선의 산줄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조선의 산천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선의 산천이 중국의 산천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증명하는 것이 우하영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하영에게는 중국과 조선의 지세와 지역적 특징이 서로 대칭을 이룬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배우성, 2012, 「조선후기 中華 인식의 지리적 맥락」, 『한국사연구』 158, 170~171면) 하지만 이첨에게 중요한 것은 고려의 산천 그 자체였다. 중원의 지리적 특징은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런 모습은 “요동(遼東)에 따로 하나의 천하[乾坤]가 있었다”는 고려 후기의 지리인식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배우성, 2014, 『조선과 중화』, 돌베개, 101면. [본문으로]
- 고려 후기의 도참서 『옥룡기』가 고려의 산줄기와 나라의 흥망을 연결 지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산천과 지기와 정치를 유기적으로 연결 짓는 이첨의 발상은 고려 후기의 사유 방식으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이첨의 발상이 의 ‘자국 중심 천하관’이나 ‘다원적 천하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전기의 천하관은 화이론적 천하관와 자국 중심의 천하관, 다원적 천하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 전ㆍ중기의 주류가 주로 다원적 천하관이었다면, 고려 후기로 갈수록 화이론적 천하관이 다른 천하관을 압도했다고 한다. (노명호, 1999,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 『한국사연구』 105) 하지만 이첨의 글 속에서는 화이론적 천하관과 자국 중심적 천하관, 다원적 천하관이 모두 묻어난다. 그런 점에서 고려 전기 천하관의 지형이 고려 후기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또 그 변화한 천하관이 어떤 형태로 조선에 계승되는지는 여전히 더 밝혀질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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