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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

[입안]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

by 衍坡 2020. 10. 11.

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

1480年 金孝之 妻 黃氏 繼後立案

 

2020.09.21.




 


1. 정서

⦁문서에서 결락된 부분은 ‘(…)’으로 표기한다. 

⦁이두는 밑줄을 긋고 각주를 달아 의미를 풀이한다.

⦁결락된 부분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에는 결락 표기 옆에 [ ]를 입력하고 유추한 글자를 표기한다.

 

成化拾陸年(…) [捌]月 初貳 禮曹立案

右立案(…)[爲繼後事] 曺 啓目[각주:1]呈 慶尙道禮(…)[安縣 故金孝之妻黃氏]

所志內 家翁[각주:2]嫡妾俱無子爲白乎等用良[각주:3] 生前始叱[각주:4] 三寸姪金淮次子孝盧矣身[각주:5](…)[繼後]

爲良結[각주:6]說噵爲如可[각주:7] 未及繼後身故爲如乎在亦[각주:8] 家翁願意導良[각주:9] 同孝盧矣身乙[각주:10] 繼後令是白良[각주:11](…)[結望]

良白去乎[각주:12] 行下向事[각주:13] 所志是白齊[각주:14] 故金淮(…)[妻]盧氏所志內 家翁同姓三寸叔金孝之 嫡妾俱(…)[無子]

白乎等用良 生前始叱矣身茂火[각주:15] 汝矣[각주:16]次子孝盧乙 繼後爲良結說噵爲如可 未及繼後早死爲白良在乙[각주:17](…)

孝之妻黃氏家翁願意[각주:18]繼後令是良結墾說乙仍于[각주:19]次子孝盧(…)[身乙出]後令爲白去乎[각주:20] 依他例(…)[下向]

所志爲白乎等(…)[用良] 行移推考 慶尙道觀察使關連次安東都護府使朴始亨名牒呈內 推考(…)
五月二十三日 故別侍衛金孝之妻黃氏公緘答通內 家翁之嫡妾俱無子爲白乎等用良 得病臨終時 女矣身茂(…)[四寸]

孫孝盧矣身乙 繼後爲良結說噵爲如可 繼後不得身故爲白良厼[각주:21] 家翁願意皃如[각주:22] 同孝盧矣身乙 繼後爲白良結 禮曹呈所(…)[志爲白]

乎味[각주:23]答通爲白齊[각주:24] 故別監金淮妻盧氏公緘答通內 家翁同姓三寸叔金孝之妻黃氏矣身茂火說噵爲乎(…)

得病臨終時 嫡妾俱無子爲昆[각주:25] 四寸孫孝盧 繼後爲良結說噵爲如可 未及繼後爲白乎等用良 向前[각주:26]孝盧家翁繼後(…)

乙仍于次子孝盧矣身乙 出後令爲白良結 禮曹呈所志爲白乎味答通是白齊 爲等如[각주:27]所志及公緘答通牒呈爲白有[각주:28](…)

爲白乎矣[각주:29] 大典立後條 嫡妾俱無子者 告官立同宗支子爲後 註兩家父同命立之 父沒則母告官亦爲白置有良厼[각주:30] 向前(…)

金孝之繼後何如 成化拾陸年 參月 貳拾伍日 右副承旨 臣盧公弼次知[각주:31] 啓依允敎事[각주:32] 爲去有良厼受[각주:33]

(…)內皃如 繼後令爲遣[각주:34] 合行立案者

行正郎 行佐郞(押)
判書(押) 參判(押) 參議(押) 行正郎(押) 佐郞
行正郎 佐郞(押)

 

2. 번역

 
성화 16년(1480, 성종 11) 8월 초이튿날 예조 입안
 
이 입안은 (계후繼後에 관한 것이다.) 예조의 절목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올라온 경상도 (예안현에 사는 고 김효지 처 황씨의) 소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家翁]이 적처嫡妻와 첩妾에게 모두 아들이 없어서 살아있을 적부터 3촌 조카 김회金淮의 둘째 아들 김효로를 계후자繼後子로 삼으려 한다고 이야기 하다가 계후하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이번에 남편의 바람대로 효로를 계후시키기를 바라오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소지였습니다.
 
고故 김회의 처 노씨盧氏의 소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의 동성 3촌 숙부 김효지가 적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어서) 살아있을 적부터 저더러 ‘자네의 둘째 아들 효로를 계후시키려 한다’고 이야기하다가 계후하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는데, 김효지의 처 황씨가 남편의 바람대로 계후시키려 한다고 간절히 말하기에 저의 둘째 아들 김효로를 계후로 내보내고자 하오니 다른 예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분부해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소지였습니다.
 
공문을 보내 추고推考해보니 경상도 관찰사의 관문關文이 다음과 같이 올라왔습니다.
 
「첨부한 안동도호부사 박시형朴始亨 명의의 첩정牒呈 내용은 이렇습니다. [추고하니 (결락) 5월 23일 고故 별시위別侍衛 김효지의 처 황씨가 공함公緘을 보내 회답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은 적처와 첩실에게 모두 아들이 없어서 병에 걸려 임종할 무렵에 저더러 (4촌) 손자 효로를 계후하려 한다고 말했는데, 계후하지 못하고 사망했기에 남편의 바람대로 효로를 계후하고자 예조에 소지를 올렸습니다.’ 이런 취지의 회답이었습니다. 고故 별감別監 김회의 처 노씨가 공함을 보내 회답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의 동성 3촌 숙부인 김효지의 처 황씨가 제게 이야기하기를, (김효지가) 병에 걸려 임종할 무렵에 적처와 첩실에게 모두 아들이 없어서 4촌 손자인 효로를 계후하고자 한다고 했다가 미처 계후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효로를 남편의 계후자로 삼게 해달라고 청하기에 저의 둘째 아들 효로를 계후자로 보내고자 예조에 소지를 올렸습니다.’ 이런 취지의 회답이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소지所志와 공함답통公緘答通입니다.] 이런 내용의 첩정이었습니다.」
 
상고하오되 《경국대전》 입후조立後條에 “적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관官에 알리고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후사로 세운다”고 했고, 주註에는 “양가兩家의 아버지가 함께 명해서 세우되 아버지가 사망한 경우에는 어머니가 관에 알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앞의 김효지가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화 16년 3월 25일에 우부승지 신 노공필盧公弼이 담당하여 아뢰니 계문대로 윤허한다고 하셨다. 수교受敎의 내용대로 계후시키고 이에 입안立案할 것.
 
 
                                                                   행정랑             행좌랑(수결)
판서(수결)     참판(수결)     참의(수결)     행정랑(수결)     좌랑
                                                                  행정랑             좌랑(수결)

 

3. 몇 가지 문제들

(1) 계후입안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어떤 사실을 증빙 받을 필요가 있을 때 관官에 청원을 올렸다. 그리하면 관은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에 그것을 공증하는 문서를 발급했다. 바로 이 문서가 입안立案이다. 입안은 때로 누군가가 재산을 매매하거나 양도한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했고, 송사訟事의 결과를 확인해주기도 했다. 입후立後 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이 없어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는 사람들은 친족親族 중에서 후사를 들여 대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후사를 들이는 과정에서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경우에는 관으로부터 입안을 발급받았다. 그렇게 발행된 문서가 곧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김효로를 입양하려고 청원을 올린 김효지의 처 황씨가 1480년에 발급받은 문서도 바로 이 계후입안이다.

(2) 조선 전기 입후 절차

 

「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은 15세기 입후 절차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료를 살펴보면, 입후 절차가 개시되는 첫 번째 조건은 계후繼後를 들이려는 측의 청원이었다. 예조 계목의 첫 머리에 황씨의 소지가 거론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계후를 맞이하는 측의 청원만으로는 입후 절차가 진행될 수 없었다. 『경국대전』은 후사를 들이는 집과 보내는 집 양쪽의 아버지가 함께 명해야만 입후가 성사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각주:35] 그런 점에서 황씨의 소지뿐만 아니라 김회의 처이자 김효로의 어머니인 노씨의 소지가 함께 기재됐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황씨와 노씨는 “양가의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사망한 경우에는 어머니가 관에 보고한다”는 규정에 따라 소지를 올릴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입후 절차가 계후를 받는 쪽과 보내는 쪽의 동의만으로 성사될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허락이었고, 그것은 조선시대 입후 절차의 특징 중 하나였다. 황씨와 노씨의 소지를 접수한 예조의 반응은 그런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조는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공문을 내려보내서 담당자인 안동도호부사에게 황씨와 노씨를 추고하도록 지시했다. 안동도호부사 박시형은 김효로를 김효지의 계후로 보내는 것이 적절한지 조사하기 위해 황씨와 노씨에게 공함公緘을 보냈다. 일종의 서면질의를 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 굳이 공함을 보낸 이유는 조사 대상이 사대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황씨와 노씨는 소지를 올리게 된 동기와 자신들의 요구를 적어 회신했고, 안동도호부사는 이것을 다시 예조로 올려보냈다. 예조는 소지와 공함답통, 첩정을 모두 모아 검토하고는 황씨의 요구가 『경국대전』의 규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김효지의 계후를 허락했다. 이런 사실들은 예조가 입후 절차에 매우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사족의 입후 문제를 국가의 차원에서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입후에 대한 허락이 국왕의 명의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문서를 보면 예조가 동부승지를 통해서 입후 문제를 국왕에게 보고하고 윤허를 얻어내는 것이 입후 절차의 최종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예조가 계목 끄트머리에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과 국왕이 “아뢴대로 윤허한다”[依允]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입후를 허가하는 핵심주체는 예조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왕의 명의로 김효지의 계후를 허가했다는 사실은 입후 문제가 그만큼 당시에 매우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15세기의 입후는 ①계후를 받는 쪽과 보내는 쪽의 청원, ②양쪽 청원인에 대한 예조의 추고, ③예조의 검토와 보고, ④국왕의 윤허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입후 문제에 관이 매우 강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입후를 중앙 정부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15세기에 유교적 가계계승형태 정착이라는 과제를 정부 주도로 끌고 나가고자 했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기도 했다.[각주:36

 

(3) 조선 전기 입후의 특징


「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은 15세기 당시에 『경국대전』 「입후조」의 규정이 비교적 충실하게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은 “적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관官에 고하여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 후사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황씨와 노씨가 소지와 공함답통에서 “적처와 첩실에게 모두 아들이 없었”던 김효지의 처지를 누차 강조했던 것도 이런 규정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즉, 김효로를 김효지의 계후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효로는 김효지의 동성 친족이었고, 김회의 지자支子였다. 김효지와는 존속尊屬도, 형제兄弟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김효로는 김효지의 후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다. 김효지와 그의 처 황씨가 굳이 김효로를 계후 대상으로 고려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만큼 『경국대전』의 입후 규정이 충실하게 이행되었던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전 시기만 하더라도 윤회봉사나 외손봉사가 일상적이었던 만큼 양자를 맞이해 가계를 계승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다. 이성異姓 양자녀를 입양하는 경우도 매우 빈번했다.[각주:37] 그런 사례와 비교해보면, 김효지와 그의 처는 부계 혈연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김효로 집안 가계도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김효지와 적처 황씨가 후사로 받아들이려는 김효로가 김효지의 4촌 ‘손자’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경국대전』은 존속과 형제만이 아니라 손자의 입양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료를 읽어보면 김효지와 김회, 황씨와 노씨 그 누구도 김효로가 김효지의 4촌 ‘손자’라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노씨는 김효로를 김효지의 계후로 보내면서 ‘다른 사례처럼 분부를 내려달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손자뻘의 동성 친족을 계후로 삼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경국대전』의 규정이 이때까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황씨가 김효로를 입양한 시점이 1480년(성종 11)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가에서 손자 항렬의 입후를 금지한 시점은 이듬해 1481년(성종 12)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이 『경국대전』에 공식적으로 반영한 것은 1484년(성종 15)의 일이다.[각주:38] 손자 항렬의 입후가 소목昭穆을 어지럽힌다는 문제의식이 점차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손자 항렬의 계후는 결국 금지되고 말았던 것이다.[각주:39] 하지만 그 이전까지 손자 항렬의 입후는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었다. 이 문서에서는 그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광신김씨세보]에서 김효로와 김효지의 관계를 기술한 부분


하지만 조선 후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광산김씨족보』에서 그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족보에는 김효로가 김효지의 양자가 아닌 김회의 아들로 표기되어 있다. 반면, 김효지는 대가 끊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김효지와 김효로의 관계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 현상이 단순한 착오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김효지와 김효로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조선 후기 사람들이 어느 시점엔가 자신들의 상식과 원칙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김효지와 김효로의 관계를 족보상에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는 소목을 뛰어넘는 입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1. 節[디위]: 때. 번. 이때. 이번. [본문으로]
  2. 亦[이여/여]: 주격조사(~이. ~가.) [본문으로]
  3. 爲白乎等用良[하온들쓰아]: ~하옵신 줄로써. ~하옵신 바로써. [본문으로]
  4. 始叱[비롯]: 비로소. 처음으로. ~부터. [본문으로]
  5. 衣身[의몸]: 나. 본인. 저. 제몸. [본문으로]
  6. 爲良結[ᄒᆞ야감/ᄒᆞ야져]: ~하고자. [본문으로]
  7. 爲如可[ᄒᆞ다가]: ~하다가. [본문으로]
  8. 爲如乎在亦[ᄒᆞ다온견이여]: ~하다는 것이어요.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본문으로]
  9. 導良[드듸야/드듸여]: 드디어. 따라서. [본문으로]
  10. 乙[을/를]: 목적격조사(~을. ~를.) [본문으로]
  11. 令是白良[시기ᄉᆞᆯ아]: 시키사와. 시키셔서. [본문으로]
  12. 爲白良結望良白去乎[ᄒᆞᄉᆞᆸ아져바라올거온]: ~하고자 바랐사오므로. ~하고자 바랐으므로. [본문으로]
  13. 行下向事[행하안일]: 행할 일. 명령할 일. [본문으로]
  14. 是白齊[이ᄉᆞᆲ져]: ~이옵니다. ~이올시다. [본문으로]
  15. 茂火[더부러]: 더불어. ~더러. [본문으로]
  16. 汝矣[너의]: 너의~. [본문으로]
  17. 爲白良在乙[하ᄉᆞᆸ아겨늘]: ~하옵시거늘. [본문으로]
  18. 以[로/으로]: ~로. ~으로. [본문으로]
  19. 乙仍于[을지즈로]: ~을 말미암아. ~을 따라. [본문으로]
  20. 爲白去乎[하삷거온]: ~하사오므로. ~하옵기에. ~하사오니. ~하옵시니. [본문으로]
  21. 爲白良厼[하아금]: ~하옵시니만큼. ~하옵기로 [본문으로]
  22. 皃如/貌如[가로혀/즛다히]: ~같이. ~처럼. ~대로. [본문으로]
  23. 爲白乎味[하ᄉᆞ온맛]: ~하사온 뜻. ~하옵신 취지. [본문으로]
  24. 爲白齊[하ᄉᆞᆲ져]: ~하옵니다. ~하옵소서. [본문으로]
  25. 爲昆[ᄒᆞ곤]: ~하기에. [본문으로]
  26. 向前[안젼]: 전번에. 앞의. [본문으로]
  27. 爲等如[하드러/하트러]: 통틀어. 합하여. 모두. 다. [본문으로]
  28. 爲白有置[하삷잇두]: ~하였사옵니다. [본문으로]
  29. 爲白乎矣[하사오되]: ~하옵시되. [본문으로]
  30. 爲白置有良厼[하두이시아곰]: ~하옵기도 하니만큼. ~하옵기도 하였으므로. [본문으로]
  31. 次知[ᄎᆞ지]: 담당. 담당자. [본문으로]
  32. 敎事[이샨일]: ~하옵신 일. ~하옵실 일. [본문으로]
  33. 爲去有良厼[거이시아곰]: ~한 것이었으므로. ~한 것이기에. [본문으로]
  34. 爲遣[ᄒᆞ고]: ~하고. [본문으로]
  35. 『經國大典』, 「禮典」, 立後條. “兩家父同命立之, 父歿, 則母告官。” [본문으로]
  36. 박경, 2006, 「15세기 입후법(立後法)의 운용과 계후입안(繼後立案)」, 『역사와 현실』 59. [본문으로]
  37. 박경, 2006, 「15세기 입후법(立後法)의 운용과 계후입안(繼後立案)」, 『역사와 현실』 59. [본문으로]
  38. 박경, 2006, 「15세기 입후법(立後法)의 운용과 계후입안(繼後立案)」, 『역사와 현실』 59. [본문으로]
  39. 1481년(성종 12)에 손자 항렬의 계후가 금지되면서 가장 문제가 된 이슈는 그 이전에 손자 항렬을 입적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이전까지 소급해서 손자 항렬의 계후를 무효화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사례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것인가? 1480년에 김효지의 양자로 들어간 김효로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국가는 김효로의 입적을 무효화했지만, 김효로는 소지를 올려 자신이 김효지의 양자로 입적한 것이 정당함을 역설하면서 그대로 인정해줄 것을 호소했다. 결국 김효로는 다시 김효지의 양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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