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

[간찰]무신년(1848) 김학성 답위장

by 衍坡 2020. 10. 20.

무신년(1848) 김학성 답위장

戊申年(1848) 金學性 答慰狀

 

2020.10.19.








1. 문서의 개요

백부상伯父喪을 당한 김학성金學性이 조문 편지를 보낸 강원도 관찰사 박용수朴容壽에게 보낸 답위장答慰狀이다. 답위장은 이름 그대로 위문하는 편지, 즉 위장慰狀에 대한 답서를 의미한다. 김학성의 백부는 헌종 대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청녕군淸寧君 김동건金東健이다. 『청풍 김씨 세보』에 따르면, 김동건은 1848년(헌종 14) 11월 18일에 사망했다. 김학성은 김동건이 사망한 지 약 보름 뒤에 이 편지를 작성한 것이다. 김학성은 백부상을 당한 슬픔과 강원감사의 위문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2. 정서

 

答狀上

  東營 巡節座前[각주:1]

 

省禮[각주:2] 家門不幸[각주:3] 伯父棄背 酸

苦摧裂[각주:4] 無以堪忍 卽伏蒙[각주:5]

俯賜慰問[각주:6] 不勝悲感之至 仍謹審

冬候暄過

旬體事万晏[각주:7] 伏慰區區[각주:8] 世下生降功服人

慟廓無時可已 而親候衰境
疚瘁自多受損 煎迫煎迫
府惠諸種 謹領盛眷 銘感

無已 餘悲撓姑不備[각주:9] 伏惟

台下照[각주:10] 謹狀上

戊申年 十二月 初四日

世下生[각주:11] 降功服人[각주:12]

金學性狀上

 

 

3. 역주

 

답장을 올림

동영東營 순사巡使께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가문에 불행이 닥쳐 백부께서 세상을 등지시니 괴롭고 찢어지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관찰사께서] 굽어살피셔서 위문해주시니 지극한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편지를 받아보니 겨울 날씨가 따뜻하게 지나가는 가운데 관찰사의 체후體候가 아주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저[世下生降功服人]의 애통한 마음은 그칠 날이 없고, 아버님의 기체氣體는 노쇠하신 데다 병까지 드는 바람에 초췌해지셔서 몸이 많이 축났으니[受損] 몹시도 애가 탑니다.

[관찰사께서] 굽어살펴주셔서 은혜로이 여러 물건을 보내주셨으니 성대한 보살핌을 삼가 잘 받았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겨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슬프고 번잡한 일이 많아 우선 남겨둡니다. 격식을 갖추지 못합니다.

대감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무신년(1848, 헌종 14) 12월 초나흗날

세하생世下生 상복을 한 등급 낮춰 공복을 입는 사람[降功服人]

김학성이 편지를 올립니다.

 


4. 살펴보기


김학성이 이 간찰을 작성하면서 철저하게 형식과 규범에 따랐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답위장을 『상례비요』나 『상변통고』의 예문과 비교해보면, 실제로 구체적인 표현만 다를 뿐 서식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김학성은 왜 굳이 간찰의 형식과 규범에 따라 이 답위장을 작성했는가? 그가 예禮라는 규범이 중요한 세상에서 살았고, 자신도 예를 중요한 삶의 가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김학성이 간찰을 작성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학성은 간찰을 작성하면서 두 가지 관계를 의식했다. 하나는 발신자인 본인과 수신자의 관계고, 다른 하나는 본인과 사망한 숙부의 관계다. 일단 김학성과 간찰 수신자의 관계를 살펴보자. 김학성 답위장의 수신자는 “동영東營 순절좌전巡節座前”이다. 다시 말해서 김학성은 이 편지를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냈다. 수신자가 관찰사라는 점은 본문의 “旬體候”와 “台下照”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순체후’가 관찰사의 기체후를 묻는 표현이라면, ‘台’는 ‘대감’이라는 뜻으로 종2품 이상의 관원을 지칭한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1848년 12월 당시의 강원도 관찰사는 박용수朴容壽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김학성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였다. 김학성의 백부 김동건이 1788년생(정조 12), 친부 김동헌은 1791년생(정조 15), 박용수는 1793년생(정조 17)이었다. 다시 말해서 김학성에게 박용수는 친부와 비슷한 연배의 존장尊長이었던 것이다. 김학성이 답위장에서 아버지의 안부를 전한다는 점이나, 서간 말미에 ‘세하생世下生’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박용수와 김학성의 친부는 평소부터 잘 알고 지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학성은 이 편지에서 어김없이 박용수를 존대했다. 예를 들어 ‘俯賜’나 ‘世下生’ 같은 표현은 주로 존장尊長에게 사용하는 용어였다. 특히 편지 말미의 “不備”라는 표현은 이 편지의 수신자인 박용수가 발신자인 김학성보다 존장이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에는 이 표현을 주로 존장에게 구사했고, 비교적 대등한 관계의 인물이나 아랫사람에게는 ‘不備’ 대신 ‘不宣’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연히 ‘不宣’이라는 표현은 존장에게는 사용하지 않았다. 요컨대, 김학성은 대대로 교분을 쌓은 집안의 어른에게 간찰을 보내며 적절한 존칭과 표현을 구사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한편, 김학성은 간찰 안에서 백부와 자신의 관계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家門凶禍” 대신 “家門不幸”을, “痛苦摧裂” 대신 “酸苦摧裂”을 쓴 것은 고인故人이 본인의 직계 혈족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간찰 말미에 본인을 “강공복인降功服人”이라 칭한 것도 고인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래의 혈연관계를 살펴보면, 김동건은 김학성의 백숙伯叔이므로 김학성은 김동건의 상사에서 복상服喪 기간이 1년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김동건이 자신의 백부인 김세연金世淵의 계후자로 입양되었으므로 김학성과 김동건의 실질적인 관계는 5촌 당숙질간이었다. 따라서 상복도 본래 입어야 하는 기년복에서 한 등급 낮추어 복상 기간이 9개월인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했다. “강공복인”은 바로 이런 복잡한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김학성이 굳이 이런 표현으로 자신을 수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학성의 관점에서 보면, 본인과 백부의 관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그 관계에 걸맞는 언행을 구사하는 건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학성은 답위장 안에서 자신과 백부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에 걸맞는 수사들을 구사하려 노력했다.


편지 한 통을 쓰며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적절한 형식과 표현을 담아내려 했던 김학성의 모습은 예의 실천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건 김학성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게 간찰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라 예를 실천하는 장이기도 했다.




  1. 『한국고전용어사전』에 의하면, 동영東營에는 ①강원도 감영, ②훈련도감의 分營, ③어영청의 分營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巡節座前”이라 기재되었으므로 동영이 강원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의 “旬體事”라는 표현도 그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1848년 12월 당시 강원감사는 朴容壽라는 인물이었다. [본문으로]
  2. 생례省禮는 “상중喪中에 있을 때 인사말을 생략하고 대신 쓰는 말”을 의미한다. (하영휘 외 편저, 2011, 『옛편지 낱말사전』, 돌베개, 268면) 여기서는 김학성이 백부상을 치르는 중이었으므로 인사말을 생략한 것이다. [본문으로]
  3. 고인故人이 김학성의 백숙이기 때문에 “家門不幸”이라 표기한 것이다. 『상례비요』에 따르면, 백숙부모伯叔父母나 고모, 혹은 형제자매가 사망한 경우에는 “家門不幸”으로, 조부모가 사망한 경우에는 “家門凶禍”로, 처妻가 사망했다면 “私家不幸”이라 쓴다. 아들이나 손자, 조카가 사망한 경우에는 “私門不幸”이라 한다. [본문으로]
  4. “酸苦摧裂”이라는 표현은 고인과 발신자 김학성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상례비요』에 의하면 조부모상을 당한 사람이 답장을 쓸 경우에는 “痛苦摧裂”라는 표현을 쓴다. 만일 백숙부모ㆍ고ㆍ형ㆍ자ㆍ제ㆍ매의 상일 경우에는 “摧痛酸苦”라는 표현을 쓰는데, 김학성이 통고痛苦 대신 산고酸苦라는 표현을 쓴 것은 백부의 상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여기서 '卽'은 '곧' 혹은 '즉시'라는 의미인데, 편지를 받은 당일에 답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6. ‘俯賜’는 상대방이 물품 등을 보낸 사실을 높여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대목에서 행을 바꾼 것[改行]도 상대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旬體事’나 ‘俯惠’, ‘台下照’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이 편지의 수신자는 김학성이 존대해야 하는 존장尊長임을 알 수 있다. (김효경, 2005, 『조선시대 간찰 서식 연구』, 한중연 박사논문) [본문으로]
  7. ‘體事’는 안부 또는 건강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旬’자를 붙인 것은 편지의 수신자가 관찰사이기 때문이다. 즉, ‘旬體’나 ‘旬體事’는 관찰사의 안부를 물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하영휘 외 편저, 2011, 『옛편지 낱말사전』, 돌베개, 550면) 그리고 '萬安' 또는 '萬晏'은 아주 평안하다는 뜻으로 “안부를 물을 때 쓰는 상투적 표현”이다. (하영휘 외 편저, 2011, 『옛편지 낱말사전』, 돌베개, 170면) [본문으로]
  8. ‘區區’는 “자신을 겸손하게 지칭하는 1인칭 대명사”를 가리킨다. (하영휘 외 편저, 2011, 『옛편지 낱말사전』, 돌베개, 170면) [본문으로]
  9. 이 구절의 기본형은 ‘餘不備’ 혹은 ‘餘姑不備’인데, 일반적으로 “나머지는 갖추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한다. 박대현은 이 문장이 ‘餘萬姑留’와 ‘書儀不備’가 합쳐진 것으로 보아 ‘餘姑不備’를 “나머지 여러 이야기는 우선 남겨 둡니다”와 “서찰의 격식을 갖추지 못합니다”라는 두 문장으로 나누어 해석했다. 여기서는 이 해석을 따랐다. [본문으로]
  10. 伏惟□下照: 伏惟는 ‘삼가 ~하기를 바라다’라는 의미이고, □下照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간찰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는 의미다. 즉, ‘伏惟□下照’는 ‘삼가 이 편지의 내용을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로 간찰 결미에 격식으로 삽입된 문구이다□은 상대에 따라서 표현이 달라진다. 예컨대, 종2품 이상의 관원에게는 ‘대감’이라는 의미의 ‘台’를 기입해 “台下照”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그 이하 당상관에게는 ‘영감’이라는 의미의 ‘令’을 써서 “令下照”라고 기재한다. [본문으로]
  11.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의 尊長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다. (김효경, 2005, 『조선시대 간찰 서식 연구』, 한중연 박사논문) [본문으로]
  12. 상복의 등급을 낮추어 공복을 입었다는 의미다. 「본종오복지도」에 의하면, 백숙부모의 상에는 본래 1년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지만 김동건이 백부(김학성에게는 백조부伯祖父)의 계후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김학성은 상복의 등급을 낮추어 종백숙의 상에 해당하는 소공복小功服을 입었다.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