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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by 衍坡 2020. 12. 10.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檜巖寺 妙嚴尊者 無學大師碑

 

 

▲현재 양주 회암사 북쪽에 위치한 무학의 부도와 탑비. 오른쪽은 처음 세운 비석의 받침석과 지붕이며, 왼쪽은 순조 때 중건한 비석이다.

 

 

 

  • 비석 소개

 

일반적으로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이하 ‘무학비’)이 처음 건립된 시점은 1410년(태종 10)이다. 이 비석을 세운 결정적인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유지遺志였다. 비문 찬술자 변계량의 진술에 따르면, 태종은 상왕에게 태조의 유지를 듣고는 비명을 찬술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때 건립된 비석은 줄곧 제자리를 지키다가 약 400여 년이 지난 1821년(순조 21)에 파괴되었다. 오늘날 회암사 북쪽에 서 있는 무학비는 1828년(순조 28)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무학비가 순조 때 파손된 경위는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구체적인 내용은 『일성록』에 담겨있다. (일성록순조 21(1821) 61) 이 기록에 의하면 비석을 파손한 이는 서울에 사는 이선준李宣峻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옹과 지공의 부도를 파괴하고 지공과 무학의 탑비를 훼손했을 뿐 아니라 사리와 사리함도 절취했다. 이런 행각을 벌인 이유는 부도가 있던 자리에 자기 부모의 산소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뒤에 이선준은 지관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그런 짓을 감행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면서 이런 식의 진술도 덧붙였다. ‘오래전에 도굴당한 무학의 부도는 이미 파손돼서 승려들이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았고, 지공과 나옹의 부도는 고려에서 세운 것이라 더 수월하게 파괴할 수 있었다. 무학비는 본래 편한 곳에 파묻어두려 했을 뿐이고 파괴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리를 비운 사이 어리석은 조대진이 부숴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조정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태종의 왕명으로 세운 무학비가 파손된 탓이었다. 조정은 결국 경기감영에 비석을 다시 세우도록 지시했고, 1828년(순조 28)에 새로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 뒤편에는 원래의 비석이 파괴된 이유와 새로 비를 중건한 경위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음기陰記에 의하면 무학비는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파손된 것은 아니라서 공부의 글씨를 모방해 다시 새겼다 한다. 현재 회암사 북쪽에는 순조 대에 세워진 탑비가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최초 비석의 받침석과 지붕이 남아있다.

 

 

 

  • 비문 및 번역문

 

朝鮮國 王師 大曹溪師[각주:1] 禪敎都摠攝[각주:2]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각주:3] 妙嚴尊者塔銘 幷序

조선국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탑명 병서

 


嘉善大夫 藝文館提學 同知經筵春秋館事 兼判內贍寺事 臣 卞季良[각주:4] 奉敎撰
嘉靖大夫 檢校 漢城判尹 寶文閣提學 臣 孔俯[각주:5] 奉敎書

가선대부 예문관제학 동지경연춘추관사 겸판내섬시사 신 변계량이 교敎를 받들어 찬술하고, 가정대부 검교 한성판윤 보문각제학 신 공부가 교敎를 받들어 썼다.

 


我太祖之元年冬十月, 師以召至松京. 太祖以是月十一日誕晨, 具法服若器, 封爲王師ㆍ大曹溪宗師ㆍ禪敎都摠攝ㆍ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각주:6] 弘利普濟 都大禪師ㆍ妙嚴尊者. 兩宗五敎諸山衲子皆在焉. 師升座, 拈香祝釐已, 豎起拂子[각주:7], 示大衆曰: “這箇是三世諸佛說不到, 歷代祖師傳不底, 大衆還會麽? 若以心思口舌, 計較說話者, 何有吾宗?”[각주:8]

우리 태조 원년(1392) 겨울 11월에 왕사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송경에 이르렀다. 태조께서는 이달 11일 탄신일에 법복法服과 기물[若器]을 갖추고 그를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변지무애辯智無碍 부종수교扶宗樹敎 홍리보제弘利普濟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妙嚴尊者’로 봉했다.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산승[山衲子]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왕사가 법좌法座에 올라 향을 태우고 복을 기원한 뒤에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워 대중大衆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삼세三世 부처님의 설법도 도달하지 못하고 역대 조사들이 전한 가르침도 이르지 못한 것인데 대중이 도리어 이해하겠는가? 만약 마음[心思]으로 계산하고 비교해서 입[口舌]으로 이야기하는 자라면 어찌 우리 종파에 있겠는가?”

 


復於上曰: “儒曰仁, 釋曰慈, 其用一也. 保民如赤子, 乃可爲民父母.[각주:9] 以至仁大慈莅邦國, 自然聖壽無疆, 金枝永茂, 社稷康寧矣. 今當開國之初, 陷於刑法者非一, 願殿下一視同仁,[각주:10] 悉皆宥之, 俾諸臣民共臻仁壽之域, 此我國家無疆之福也.” 上聞而嘉之, 卽宥中外罪囚. 時韓山牧隱李文靖公以詩贈師, 有聖主龍飛天, 王師佛出世之句.[각주:11]

임금에게는 이렇게 아뢰었다.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인仁이나 불가에서 말하는 자慈나 그 작용[用]은 같습니다. 마치 갓난아기[赤子]를 돌보듯이 백성을 보호한다면 백성의 부모가 될 만합니다. 지극한 인仁과 성대한 자비慈悲로 나라를 다스리신다면 자연히 성수聖壽가 끝이 없고 임금의 자손[金枝]은 영영 번성할 것이며, 사직社稷은 평안할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를 세운 초기에 이르러서 형벌에 걸려든 자가 한둘이 아닌데, 전하께서 모든 이들을 구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셔서 다 용서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민臣民이 함께 인수仁壽의 영역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 없는 복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서 즉시 중외中外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이때 한산군韓山君 목은牧隱 이李 문정공文靖公[李穡]이 왕사에게 시를 보냈는데, “성스러운 군주는 하늘을 나는 용이요, 왕사는 이 세상에 나온 부처라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上以檜巖寺懶翁所居大道塲, 命師入焉. 丁丑秋, 命造塔于寺之北崖, 師師指空浮屠所在也.[각주:12] 戊寅秋, 以老辭歸, 居于龍門. 壬午五月, 今我主上殿下又命入檜巖. 明年正月, 又辭入金剛山. 以乙酉九月十一日示寂, 越三年丁亥冬十有二月, 厝師骨于檜巖之塔.[각주:13] 又四年庚寅秋七月, 上王以太祖之志, 言於上, 上命臣季良名其塔, 且爲銘.

임금께서 회암사는 나옹懶翁이 머물던 대도량大道場이라는 이유로 왕사에게 그곳에 들어가도록 명하셨다. 정축년(1397, 태조 6) 가을에는 절의 북쪽 언덕에 탑을 세우게 하셨는데, 왕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가 있던 곳이었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는 왕사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 용문사龍門寺에 머물렀다. 임오년(1402, 태종 2) 5월에는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太宗]께서 왕사에게 회암사에 들어가도록 다시 명하셨다. 이듬해(1403, 태종 3) 정월에는 왕사가 또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을유년(1405, 태종 5) 9월 11일에 입적했다. 3년을 넘긴 정해년(1408, 태종 8) 겨울 12월에 왕사의 유골을 회암사 탑에 안치했다. 또다시 네 해가 바뀐 경인년(1410, 태종 10) 가을 7월에 상왕께서 태조의 유지遺志를 임금에게 말씀하시니 임금께서 신 변계량에게 그 탑에 이름을 정하고 명銘을 짓게 하셨다.

 

 

 

▲회암사 북쪽 기슭에 세워진 무학의 부도탑

 


臣季良謹按其弟子祖琳所撰行狀, 師諱自超, 號無學, 所居曰溪月軒. 壽七十九, 法臘六十一. 俗姓朴氏, 三岐郡人也[각주:14]. 考諱仁一, 贈崇政門下侍郞. 母固城蔡氏, 夢見初日射懷中, 遂有娠, 以泰定丁卯後九月二十日生. 始免襁褓, 便行掃除. 及就學, 人莫敢先. 年十八, 脫然有出世之志, 依慧鑑國師上足弟小止禪師, 薙髮具戒. 至龍門山, 咨法于慧明國師法藏.[각주:15] 國師示法已, 乃曰: “得正路者, 非汝而誰?” 遂令居浮屠菴. 一日, 菴中失火, 師獨靜坐, 如木偶人, 衆異之.

신 변계량이 삼가 왕사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왕사의 휘는 자초自超이고 호는 무학無學이다. 거처하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 부른다. 향년은 79세였고, 법랍은 61세였다. 속세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선친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郞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고성固城 채씨蔡氏다. 꿈에서 아침 햇살이 품속을 비추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 14) 9월 20일에 왕사를 낳았다.

왕사는 처음 강보에서 벗어나자 곧 쓸고 닦는 일[掃除]을 행했다. 배움에 나아갔을 때는 다른 이들 중에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18세가 되었을 때, 초연하게 속세를 벗어날 마음을 먹고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서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에게 법에 관해 물었다. 국사가 법을 교시하고는 말했다. “바른길을 얻은 자가 네가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그리고는 왕사를 부도암浮屠菴에 머물게 했다. 하루는 암자에 불이 났는데, 왕사만이 나무인형처럼 고요하게 앉아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丙戌冬, 因看楞嚴經有悟, 歸以告其師, 師加稱歎. 自是廢寢忘飡, 專於參究. 己丑秋, 抵鎭川吉祥寺居焉. 壬辰夏, 住妙香山金剛窟, 功益進. 或睡則若有擊鍾罄以警焉者. 是時釋然了悟, 汲汲有求師就質之意. 癸巳秋, 挺身走燕都, 參西天指空禮拜, 起云. “三千八百里, 親見和尙面目.” 空云: “高麗人都殺了.” 蓋許之也, 衆乃大驚.

병술년(1346, 충목왕 2) 겨울에는 『능엄경』을 읽고서 깨달은 것이 있어서 돌아가 자신의 스승에게 이야기했더니 스승이 감탄하면서 칭찬했다. 이때부터 왕사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참구參究하는 데 전념했다.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는 진천鎭川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다. 임진년(1352, 공민왕 1) 여름에는 묘향산에 있는 금강굴金剛窟에 머물렀는데, 공부는 더욱 진보했다. 혹시라도 잠이라도 들면 마치 종과 경을 쳐서 깨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이때 훤히 깨달음을 얻고서는 스승을 찾아서 나아가 질정하려는 마음이 절실했다.

계사년(1353, 공민왕 2) 가을에 떨쳐 일어나[挺身] 연도燕都에 갔다. 서천西天의 지공을 뵙고는 예를 갖추어 절하고 일어나 말했다. “3,800리를 와서 화상和尙의 얼굴[面目]을 직접 뵙습니다.” 지공이 대답하기를, “고려 사람들을 다 죽였구나”라고 했는데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이에 매우 놀랐다.

 


次年甲午正月, 到法泉寺,[각주:16] 參懶翁. 懶翁一見而深器之. 遊霧靈歷五臺, 再見懶翁於西山靈巖寺,[각주:17] 留數載.[각주:18] 其在定也, 至有當食而不知者, 翁見之曰: “汝卽死了耶?” 師笑而不答. 翁一日與師坐階上, 問曰: “昔趙州與首座看石橋, 問: ‘是甚麽人造?’ 首座答云: ‘李膺造.’ 州云: ‘向甚麽處先下手?’ 首座無對. 今有人問, 爾如何祇對?”[각주:19] 師卽以兩手握階石以示之, 翁便休去.

이듬해 갑오년(1354, 공민왕 3) 정월에 법천사法泉寺[법원사法源寺]에 이르러 나옹을 뵈었다. 나옹은 왕사를 한 번 보고서 그를 큰 인물이라 여겼다. 왕사는 무령산霧靈山과 오대산五臺山을 유람한 뒤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에서 나옹을 다시 뵙고 몇 년[數載]간 그곳에 머물렀다. [왕사가]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는 식사할 때가 되어도 알지 못했는데, 나옹이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죽었는가?” 왕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옹이 하루는 왕사와 섬돌 위에 앉아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돌다리를 보다가 ‘이것은 누가 만들었는가’하고 물었더니 수좌는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하고 대답했네. 조주가 ‘[다리를 만들 때] 어디부터 손을 댔겠는가?’하고 물었는데, 수좌는 대답하지 않았지. 지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본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왕사가 즉시 두 손으로 계단 돌을 잡고 그것을 보이자 나옹은 곧 그만두고 가버렸다.

 


其日夜分, 師入翁室. 翁云: “今日乃知吾不汝欺也.” 後謂師曰: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爾與我一家矣.” 又曰: “道之在人, 如象之牙, 雖欲藏之, 不可得也. 他時爾豈爲人前物乎!” 師之質其所得, 殆無可疑, 然而遊歷山川, 參訪師友之志, 蓋未已也. 將遊江浙, 適南方有變, 路梗乃止. 丙申夏,[각주:20] 欲東還告辭, 翁手書一紙送行曰: 「觀其日用全機[각주:21], 與世有異, 不思善惡聖邪, 不順人情義理. 出言吐氣, 如箭鋒相拄, 句意合機, 似水歸水. 一口呑却賓主句[각주:22], 將身透過佛祖關. 俄然告行, 予以偈送云: 已信囊中別有天, 東西一任用三玄. 有人問爾參訪意, 打到面門更莫言.」

그날 밤에 왕사가 나옹의 방에 들어가자 나옹이 말했다.
“오늘에야 내가 그대를 속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 뒤에 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해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나? 그대와 나는 일가一家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사람에게 도가 있으면 마치 상아象牙처럼 감추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다른 날에 그대는 아마 남들 앞에 나서는 사람이 되겠구나!”

왕사가 자신이 터득한 것을 질정質正함은 의심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산천山川을 유람하며 사우師友를 찾아가 만나려는 뜻을 그만두지 않았다. 왕사가 강소성江蘇省ㆍ절강성浙江省을 유람하려 했는데, 마침 남쪽 지방에서 변고가 생기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그만두었다.
병신년(1356, 공민왕 5) 여름에 우리나라로 돌아가려고[東還] 작별을 고했더니 나옹이 편지 한 통을 주며 전송했다.

「그의 일상생활을 전부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 선함과 악함[善惡], 성스러움과 삿됨[聖邪]을 생각하지 않고,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에 순응하지 않는다. 말을 할 때는 기운을 토해내는 것이 마치 화살촉이 맞부딪히는 것 같고, 말의 의미는 사리에 부합[合機]하는 것이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빈주구賓主句를 삼켰으니 앞으로 불조佛祖의 관문은 뚫고 지나갈 것이다. 갑작스레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偈를 지어 송별한다:

정말로 주머니 안에 세계가 따로 있으니
동쪽과 서쪽에 삼현三玄 쓰는 것을 일체 맡긴다
누군가 그대에게 참방參訪한 뜻을 묻거든
면전에서 쳐서 넘어뜨리고 다시 말하지 말게」

 


師旣還, 懶翁亦以指空三山兩水授記還國, 住天聖山元曉菴. 己亥夏, 師往見, 翁以拂子與之. 翁在神光寺, 師亦往焉. 翁之徒有忌師者, 師知而去之. 翁謂師曰: “衣鉢不如言句.” 以詩遺師云: “閒僧輩起人我心, 妄說是非甚不然也. 山僧以此四句之頌, 永斷後疑.” 「分衿別有商量處, 誰識其中意更玄. 任爾諸人皆不可, 我言透過劫空前.」 師入高達山卓菴自守.

왕사가 돌아온 뒤에 나옹도 지공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가지고 귀국해서 천성산天聖山의 원효암元曉菴에 머물렀다. 기해년(1359, 공민왕 8) 여름에 왕사가 찾아가 [나옹을] 뵈었는데, 나옹이 불자拂子를 주었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에 머물자 왕사도 그곳으로 갔다. 나옹의 문도門徒 중에는 왕사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왕사가 그것을 알고 떠나갔다.
나옹은 왕사에게 “[법을 전하는 데는] 말과 글귀가 가사[衣]와 바리때[鉢]보다 낫다”면서 왕사에게 시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가한 중들이 남과 나를 구별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망령되이 옳고 그름을 말하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다. 산승이 이 네 구절의 게송으로 뒷날의 의심을 영영 끊어버리겠네.”

「이별할 적에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그 속마음이 다시 현묘함을 누가 알겠는가
그대에게 맡기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안 된다고 해도
나의 말은 공겁空劫 이전을 뚫고 지나갔다.」

왕사는 고달산高達山의 탁암卓菴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辛亥冬, 前朝恭愍王封懶翁爲王師. 翁住松廣, 以衣鉢付師, 師以偈謝. 丙辰夏, 翁移錫檜巖, 大設落成會, 馳書召師, 以充首座. 師力辭, 翁曰: “多管不如多退. 臨濟ㆍ德山不做首座來.” 俾居便室.
신해년(1371, 공민왕 20) 겨울에 고려[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왕사로 책봉했다. 나옹이 송광사松廣寺의 주지가 되어 가사와 바리때를 왕사에게 보내자 왕사가 게송으로 사례했다. 병진년(1376, 우왕 2)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로 옮겨가[移錫] 낙성회落成會를 크게 열고 편지를 보내 왕사를 불러서 수좌首座를 채우게 했다. 왕사가 힘껏 사양하자 나옹이 말했다. “일을 많이 맡는 게 많이 물러나는 것만 못하다. 임제臨濟와 덕산德山도 수좌를 맡지 않았다.” 그리고는 왕사를 편실便室에 머물게 했다.

 

 

▲ 여주 신륵사 조사당에 봉안된 지공(가운데), 나옹(오른쪽), 무학(왼쪽)의 초상화



翁逝矣, 師遊諸山, 志在晦藏, 不欲人知. 前朝之季, 召以名利, 至欲封爲師, 師皆不至. 卒有壬申之遇, 師之去就, 豈偶然哉![각주:23] 癸酉, 太祖欲相土建都. 命師隨駕, 師辭, 太祖謂師曰: “古今相遇, 必有因緣. 世人所卜, 豈若道眼?” 巡幸鷄龍山及新都, 師皆扈從. 其年九月, 師以先師指空懶翁二塔名及掛懶翁眞事, 奉[旨刻]塔名於檜巖,[각주:24] 大設掛眞佛事於廣明寺.[각주:25] 自製眞贊云: 「指空千釖平山喝,[각주:26] 選擇工夫對御前. 最後神光留舍利, 三韓祖室萬年傳.」 十月, 國設轉藏佛事於演福寺, 命師主席.[각주:27]

나옹이 세상을 떠나자, 왕사는 여러 산을 유람하면서 자신을 감추는 데 뜻을 두었으며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고려 말에는 명예와 이익으로 왕사를 불러서 그가 이르면 왕사로 삼으려 했지만, 왕사는 모두 가지 않았다. 그러다 임신년(1392)에 [태조가 왕사로 삼는] 예우禮遇을 받았으니, 왕사의 거취去就가 우연이겠는가?

계유년(1393, 태조 2)에 태조께서 도읍 세울 땅을 택하려고 했다. 왕사에게 어가御駕를 호종하게 했는데, 왕사가 사양하자 태조께서 왕사에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 만나는 것은 틀림없이 인연因緣이 있기 때문이다. 속세의 사람들이 정한 곳이 도안道眼으로 정한 곳만 하겠는가?” 그리하여 태조가 계룡산鷄龍山과 새 도읍[新都]을 순행할 때 왕사가 모두 호종했다.
그해 9월에 왕사가 선사先師 지공과 나옹 두 사람의 탑에 이름을 짓는 일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 왕지王旨를 받고 회암사에서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서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열었다. 그리고 스스로 진찬眞贊을 지었다.

「지공의 천검千釖과 평산平山의 할喝을 받고
어전御前에서 승려의 공부를 시험했네
최후에 신령스럽게 빛나는 사리를 남기셨으니
삼한의 조실祖室로 만세토록 전해지리라」

10월에는 나라에서 연복사에 전장불사轉藏佛事를 설행했는데, 왕사에게 법석을 주관하도록 했다.

 


師自戊寅辭退之後, 倦於待衆, 雖以上命復住檜巖, 旋入金剛山眞佛菴. 乙酉春, 有微疾. 侍者欲進醫藥, 師郤之曰: “八十有疾, 何用藥爲?” 夏四月, 移于金藏菴[각주:28], 師其示寂處也. 八月, 義安大君致書, 師答書: 「有山居邈, 亦會謁無期. 他時異日, 佛會[각주:29]相逢語.」 謂大衆曰: “不久吾逝矣.” 已而果然.

왕사가 무인년(1398, 태조 7)에 사직하고 물러난 뒤로는 대중大衆을 대하는 데 싫증이 나서, 비록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회암사에 머무르긴 했지만 얼마 뒤에 금강산 진불암으로 들어갔다.
을유년(1405, 태종 5) 봄에는 가벼운 병을 앓았다. 시자侍者가 약을 올리려 했는데, 왕사가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든 살에 병이 들었는데 약을 써서 무엇을 하겠는가?” 여름인 4월에는 금장암金藏菴으로 옮겨갔는데, 왕사가 입적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왕사가 답서를 보냈다. “산속에 거처하여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만나 뵈올 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다른 날에 불회佛會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합시다.” 대중에게는 “머지않아 나는 떠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얼마 후에 정말로 그랬다.

 


始師疾革, 僧問: “四大[각주:30]各離, 向甚處去?” 師云: “不知.” 又問, 師厲聲云: “不知!” 又僧問: “和尙病中還有不病者也無?” 師以手指傍僧. 又問: “色身[각주:31]是地水火風, 摠歸磨滅, 那箇是眞法身?”[각주:32] 師以兩臂相柱云: “這箇是箇.” 答已, 寂然而逝, 夜半也. 時華嚴釋贊奇在松京法王寺, 夢見師立空中佛頂蓮花之上, 佛與蓮花, 其大彌天. 覺而心異之, 與寺中說其夢, 聞者疑其非常. 未幾訃至, 卽其夢時也.

앞서 왕사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 중들이 왕사에게 질문했다. “사대四大는 각기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왕사가 답했다. “모른다.” 중들이 또다시 질문하자 왕사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다!” 중들은 또 이렇게 물었다. “화상和尙께서 병을 앓고 계시는 중에 병들지 않은 자는 없습니까?” 왕사는 손으로 곁에 있던 중을 가리켰다. 중들은 또 물었다. “육신[色身]은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지는데 결국은 모두 닳아 없어집니다. 어떤 것이 참된 법신法身입니까?” 왕사가 [앉아서] 두 팔로 버티면서 말했다. “이것이 이것이다.” 대답을 마치고 왕사는 고요히 떠나셨는데, 한밤중[夜半]이었다.

이때 송경松京의 법왕사法王寺에 있던 화엄종의 승려 찬기贊奇는 왕사가 공중에서 부처 정수리의 연꽃 위에 서 있는 것을 꿈에서 보았는데, 부처와 연꽃은 그 크기가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그는 잠에서 깨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절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더니 듣는 사람들이 그 범상치 않음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고가 도착했는데, [왕사가 입적한 시간이] 곧 그가 꿈을 꾼 때였다.

 

 

師所著曰印空唫, 文靖公序其端. 印成大藏, 安于龍門, 文靖公跋其尾.

왕사가 저술한 책으로는 『인공음印空唫』이 있다. 문정공[李穡]이 그 앞머리에 서문을 썼다. 인성印成한 대장경은 용문사에 봉안되었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跋文을 썼다.

 


師性尙質, 不喜文飾. 自奉甚菲, 餘輒施捨. 嘗自言曰: “八萬行中, 嬰兒行[각주:33]爲第一.” 凡所施爲, 無不相若者. 且接人之恭, 愛物之誠, 出於至心, 非有所勉, 蓋其天性然也. 臣季良謹拜稽首, 而名其塔曰慈智洪融, 且系以銘.

왕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숭상했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봉양하는 것은 매우 박하게 했고, 나머지는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었다. 그는 예전에 “8만 가지의 행行에서 영아행嬰兒行이 제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모든 행동거지도 그와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접대하는 공손함과 사물을 아끼는 정성은 지극한 마음에서 나왔으며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그의 천성天性이 그랬던 것 같다. 신 변계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의 탑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이름 짓고 이어서 명銘을 붙인다.

 


銘曰: 「師之道卓[각주:34], 匪夷所思, 禪覺之嫡, 祖聖之師. 師在平居, 嬰兒之如, 具眼之遇, 箭鋒相柱. 一鉢一衣, 謙謙自卑, 尊崇無對, 若固有之. 或去或就, 先見不苟. 天錫佛壽, 七旬有九. 來也何從? 日射懷中. 去也何向? 蓮花之上. 處處其徒, 圖表厥跡, 兩間之堅, 無久惟石, 刻此銘章, 垂示罔極.」

명銘은 이렇다.
「왕사의 도는 탁월해서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바가 아니니
선각禪覺의 적통이요, 성조聖祖[太祖]의 스승이네.
왕사는 평상시에는 어린아이와 같다가도
식견 갖춘 이를 만나면 화살촉이 서로 부딪치듯 했네
바리때 하나와 가사 한 벌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었지만
비할 수 없을 만큼 존숭받았는데도 마치 본래 그러한 듯 자연스러웠네
떠날 때나 나아갈 때나 미리 내다보고 구차스럽게 굴지 않았네
천불天佛이 내린 수명은 일흔아홉이었으니
어디에서 오셨는가 하면 햇살이 비친 품속이라네
어디로 가셨는가 하면 부처의 정수리 연꽃 위였네
곳곳에 있는 그의 문도들은 그의 행적 드러내기를 도모하니
천지天地 사이에 견고하기로는 돌보다 오래가는 것이 없어서
이 명문銘文을 새겨 무궁한 후세에 보인다」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각주:35]
숭정 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1828) 5월 일에 세움

 

 


附無學王師碑陰記
무학왕사비에 붙이는 음기

 

 

東國三祖師指空ㆍ懶翁ㆍ無學浮圖及事蹟碑, 在楊州天寶山檜巖寺之北崖. 指空ㆍ懶翁兩碑, 牧穩李文靖撰, 韓脩ㆍ權仲和書, 麗季所竪也. 無學碑, 卽我太宗踐祚之十年庚寅, 奉 上王命, 命詞臣卞季良製, 孔俯書, 幷竪于兩師碑塔之下, 寺近廢而碑獨存今.

우리나라의 세 조사 지공ㆍ나옹ㆍ무학의 부도와 사적비는 양주 천보산 회암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공과 나옹 두 선사의 비는 목은 이 문정공이 짓고 한수와 권중화가 글씨를 써서 고려 말엽에 세운 것이다. 무학의 비는 우리 태종께서 즉위[踐祚]하신 지 10년이 되는 경인년에 상왕上王의 명으로 사신詞臣인 변계량에게 글을 짓게 하고 공부孔俯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두 선사의 비와 탑 아래에 함께 세웠는데, 절은 거의 폐허가 되고 비석만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上二十一年辛巳, 有李膺峻者, 與術人趙大鎭, 毀浮圖而瘞其親, 指空無學二碑俱被撞碎. 道臣聞于朝, 上震駭, 李與趙幷命島配掘其瘞. 仍敎曰: “所碎之碑, 國初所命, 至今日而不能保存者, 亦甚怵然. 分付畿營更爲竪建. 如是處分豈爲釋敎, 而然一則爲國初所重也, 一則爲國綱也.” 於是自度支, 劃錢三千兩出付僧德俊等, 使之重建, 而畿營主其事. 指空碑, 屬文靖後孫牧使義玄改書, 無學碑碎不甚, 模舊刻孔俯書刻之. 戊子秋, 工始就, 竪于舊址.

임금[純祖]께서 재위하신 지 21년째 되는 신사년(1821)에 이응준李膺峻이라는 자가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부도를 허물고 자기 부모를 매장해서 지공과 무학 두 선사의 탑비가 모두 파괴되었다. 관찰사[道臣]가 조정에 보고하자 임금께서 깜짝 놀라서 이응준과 조대진을 모두 섬으로 유배 보내고 그 묘를 파내도록 명령하셨다. 이어서 이렇게 하교하셨다. “파괴된 비는 국초國初에 왕명을 받아 세운 것인데 오늘날에 이르러서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몹시 두렵다. 경기감영에 분부해서 비석을 다시 세우게 하라. 이와 같은 처분이 불교[釋敎]를 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한편으로는 국초의 귀중한 고적古蹟을 위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나라의 기강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이에 호조[度支]에서 전 3,000냥을 중 덕준德俊 등에게 획급劃給하여 탑과 비를 중건하게 하고 경기감영에 그 일을 주관토록 했다. 지공의 비는 문정공 이색의 후손인 목사孫牧 이의현李義玄에게 다시 쓰게 했고, 무학비는 훼손이 심하지는 않았으므로 옛날에 새긴 공부의 글씨를 모방해서 새기게 했다. 무자년(1828, 순조 28)에 공역이 그제야 끝나서 비석이 옛터에 세워졌다.

 


盖指空ㆍ懶翁自中國來, 演釋敎於麗季, 無學師其道, 在我國初定鼎時, 其功多有可紀者, 檜巖寺之同竪三碑, 良以此也. 于今四百餘年之後, 忽遭破毀, 抑亦佛家之一刧, 而乃我聖上惕然感懷, 爰命有司, 一擧而重新之, 使湮晦之古蹟, 賴而復顯, 其傳益遠, 豈不有光於 大聖人追舊紀功之盛典歟? 茲具顚末記之石右.

지공과 나옹은 고려 말에 중국에서 와 부처의 가르침을 펼쳤고, 무학은 그들의 도道를 배웠으며 우리 왕조 초기에 도읍을 정할 때 기록할 만한 공로가 많았다. 회암사에 세 비석을 같이 세운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400여 년이 흐른 뒤에 갑자기 파괴되었으니 불가에서 말하는 일겁一劫이리라. 그리고 우리 성상께서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느끼시고 유사有司에 명령을 내려 일거에 [탑과 비석을] 다시 새롭게 세우셨다. 퇴색[湮晦]된 고적이 이에 힘입어서 다시 드러나 더욱 멀리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대성인大聖人이 옛사람을 추념하여 그 공로를 기록하던 성대한 은전[盛典]에 빛나지 않겠는가? 이에 전말을 갖추어 비석 뒤편에 기록한다.

 


崇祿大夫 行龍驤衛 上護軍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原任   奎章閣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 金履喬追記
嘉善大夫 京畿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水原府留守 開城府留守 江華府留守 廣州府留守 巡察使 金鐮書

숭정대부 행용양위 상호군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원임규장각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빈객 김이교金履喬가 추기追記하고, 가선대부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순찰사 김겸金鐮이 썼다.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

숭정 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 5월 일에 세운다.

 


主事都監董 仁峯堂 德俊    奉恩寺 首禪宗判事 釋會善   城庵堂 永哲
副看役 奇庵堂 義寬    前判事 喚虛堂 等還
物力次知 嘉善 熙行    奉先寺 首敎宗判事 平松堂 普蔡
南漢都摠攝 翠峯堂 寬活    公員 嘉善 釋最仁
中軍 嘉義 釋義察    道庵堂 聖麒
北漢都摠攝 嘉義 釋性黙    影漳堂 玉印
中軍 嘉義 釋道聞    秋潭堂 三學
龍珠寺都摠攝 諸方大法師 肯俊    印城堂 宜賢
中軍 嘉善 釋正愚    山人信瓊
刻手 朴枝春
石手 朴宗錫 文守兆

주사도감동 인봉당 덕준    봉은사 수선종판사 중 회선   성암당 영철
부간역 기암당 의관    전판사 환허당 등환
물력物力담당 가선대부 희행    봉선사 수교종판사 평송당 보채
남한도총섭 취봉당 관활    공원 가선대부 중 최인
중군 가의대부 중 의찰    도암당 성기
북한도총섭 가의대부 중 성묵    영장당 옥인
중군 가의대부 중 도문    추담당 삼학
용주사도총섭 제방대법사 긍준    인성당 의현
중군 가선대부 중 정우    산인신경
각수 박지춘
석수 박종석 문수조

 

  1. 현재 회암사에 있는 무학비의 비면의 비제에는 “대조계사大曹溪師”로만 새겨졌다. 정작 조선 태조가 무학을 왕사로 책봉하며 내린 직책은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라고 새겼다. [본문으로]
  2. 도총섭[都摠攝]: 나라에서 승려에게 내리는 승직僧職 중에 가장 높은 직책이라 한다. 이 직책이 언제부터 수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고려 말에 나옹도 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건국 이전부터 존재하던 직책이었음은 분명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3. 도대선사[都大禪師]: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선종의 법계 가운데 하나”인데, “선종의 법계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왕사의 아래, 대선사의 위”라고 한다. [본문으로]
  4. 변계량卞季良(1369~1430): 여말선초의 문신이다. 실록에 기술된 그의 졸기에 따르면, 변계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살에 고시대귀古詩對句를 외고 6살에 벌써 글귀를 지었다. 14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살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살에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조선 초기에 문형文衡을 관장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춘정집』 초간본의 서문에 따르면,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정몽주와 이숭인, 권근 등 이색의 문인들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춘정집』, 舊序) [본문으로]
  5. 공부孔俯(?∼1416):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당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시詩를 잘하고 더욱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공교하여 그 필적筆蹟을 얻는 자는 보화寶貨로 여겼다.” 1416년(태종 16)에 명나라에 하천추사賀千秋使로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본문으로]
  6.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동문선』과 『춘정집』에는 이 부분의 글자 배열이 서로 다르다. 『동문선』에는 이 부분을 “辯智扶無礙宗樹敎”“”이라 표기했지만, 『춘정집』에는 “辯智無碍扶宗樹敎”이라 기록되었다. 순조 대에 다시 건립된 비에는 『춘정집』과 마찬가지로 “辯智無碍扶宗樹敎”로 새겨졌다. [본문으로]
  7. 불자[拂子]: 불진佛塵이라고도 불리는 이 물건은 먼지를 털어내거나 모기를 쫓는 데 사용하던 것이지만, 선종 불교에서는 예불 등의 행사를 주관하는 이가 사용하는 법구法具로 활용된다. [본문으로]
  8. 『태조실록』에서 전하는 설법 당시의 분위기는 비문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 “왕사 자초에게 선禪을 설법해달라 청했다. (…) 자초가 종지宗旨를 해설하지 못하니 승도僧徒 중에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請王師自超說禪, (…) 自超未能解說宗旨, 僧徒有嘆者。] (태조 1년 10월 11일 己未) 실록의 기사가 대체로 무학에게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만 무학이 왕사가 되어 가장 높은 승직을 받고 임금 앞에서 설법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승려들이 한편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9. 유가의 개념과 불교의 개념을 유비하는 말하기 방식은 유교와 불교의 정치적 위상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인 인정仁政을 지향했던 조선 건국세력은 군주의 덕으로 특히 인仁을 강조했는데,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맥락을 고려하면 무학이 유학의 인仁을 가장 먼저 거론한 점이나 “保民如赤子”, “爲民父母” 같은 유학의 레토릭을 구사한 것은 우연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무학이 불교의 입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유교의 레토릭을 차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치적 영역에서 불교의 입지가 축소되고 유교의 위상이 높아진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 대목이 변계량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승려의 비문에서 승려의 입을 통해 유교적인 레토릭을 구사하는 방식의 서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10. 일시동인[一視同仁]: 당대唐代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였던 한유가 지은 「원인原人」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聖人 一視而同仁 篤近而擧遠” [본문으로]
  11. 이 대목에서 굳이 이색을 거론한 것은 전략적인 서술이다. 이색을 거론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불교계에서 이색이 차지한 위상과 그가 나옹 문도와 맺은 인맥 등이 고려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고려 말에 이색이 불교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남동신, 2006, 「목은 이색과 불교 승려의 시문(詩文) 교유」, 『역사와 현실』 62, 143~152면에 자세하다. 다른 이유로는 변계량이 이색의 학문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거론할 수 있다. 이색의 입을 통해 “성스러운 군주”를 운운한 데는 그에게 결코 조선 건국에 반대할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겼을 개연성이 있다. [본문으로]
  12. 이때 세운 탑은 무학의 부도를 가리킨다. 태조는 경기도의 백성을 징발해서 미리 무학의 부도를 세우게 했다. “徵畿民 預造王師自超浮屠於檜巖之北” (『태조실록』 태조 6년 7월 22일 辛未) [본문으로]
  13. 『태종실록』에 따르면, 무학의 유골을 회암사 북쪽 부도에 안치하도록 명령한 것은 1405년 9월 20일이지만, 이 비문은 유골이 실제로 안치된 시점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임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14. 삼기군三岐郡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 지역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15. ① 이 대목을 읽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춘정집』은 “咨法于慧明國師法藏國師示法已”라는 문장을 “咨法于慧明國師法藏”과 “國師示法已”로 끊어 읽는다. 따라서 혜명국사와 법장은 동일한 인물이 된다. 반면 같은 기관에서 제공하는 『동문선』 번역본은 똑같은 문장을 “咨法于慧明國師法藏國師”와 “示法已”로 끊고는 “혜명국사와 법장국사에게 법을 물었다”고 번역한다. 이 경우에는 혜명과 법장은 서로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국사가 두 사람이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으므로 『동문선』 번역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② 혜명국사 법장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황인규는 권근이 지은 「달공수좌법어서達空首座問答法語序」에 언급된 “용문장공龍文藏公”을 혜명국사 법장으로 보았다. 무학과 달공이 모두 그에게서 사사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황인규, 2019, 「나옹문도의 양평 용문산 불교 중흥」, 『불교학보』 87, 95~96면) 하지만 이런 견해는 자료를 오독한 것이다. 해당 자료에서 달공이 용문장공을 사사한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무학이 같은 사람에게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달공수좌법어서」의 용문장공과 「묘엄존자탑비명」의 혜명국사 법장을 동일인물로 보려면 근거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본문으로]
  16. 법천사는 대도에 있던 법원사法源寺를 잘못 기재한 것이다. [본문으로]
  17. 무령산霧靈山은 오늘날의 허베이성에, 오대산五臺山은 지금의 산시성에 있다. 무학이 나옹을 만났다는 서산西山은 베이징 서쪽에 위치한 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문으로]
  18. 문맥상 이 문장은 무학이 나옹과 영암사에서 수년간 머물렀다는 의미다. 만약 그렇다면 서술이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선각왕사비에 따르면 나옹은 을미년(1355, 공민왕 4) 가을에 몽골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고 대도大都의 광제사廣濟寺에서 주지를 지냈다. 만일 무학이 나옹과 영암사에 머무른 것이 사실이라면, 나옹과 무학이 함께 영원사에 머무른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1355년 가을까지다. 무학이 나옹을 처음 만났다는 1354년 정월부터 계산해도 나옹과 머문 시기는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19. 이 이야기는 『조주화상어록趙州和尚語錄』 하권에 실려있다. 「스님이 수좌首座와 함께 돌다리를 보다가 곧 수좌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수좌가 대답했다.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만들 때 어디부터 손을 댔겠는가?” 수좌가 대답하지 않자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평상시에 돌다리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디부터 손을 댔는지 물으니 알지 못하네.”」 師與首座看石橋, 乃問首座: ‘是什麼人造?’ 云: “李膺造.” 師云: “造時向什麼處下手?” 無對, 師云: “尋常說石橋, 問著下手處也, 不知.” [본문으로]
  20. 변계량의 문집인 『춘정집』에는 이 부분이 “丙辰夏”로 기록되었지만, 명백한 오류다. 『동문선』과 비명碑銘에는 모두 “丙申夏”로 기재되었고, 문맥상으로 보아도 갑오甲午 다음으로 병신丙申이 이어지는 편이 자연스럽다. [본문으로]
  21. 전기[全機]: 생활 전체의 일을 가리킴. [본문으로]
  22. 당나라의 선승 임제가 제시한 네 가지의 빈주賓主 관계를 가리킨다 한다. 즉, 선을 지도하는 스승과 배우는 학인의 관계를 네 유형으로 제시한 것이다. 『시공불교사전』에 의하면, 이 네 가지 관계로는 “학인이 뛰어나 스승의 기량을 간파하는 객관주客看主, 스승이 학인의 기량을 간파하는 주간객主看客, 스승과 학인의 기량이 모두 뛰어난 주간주主看主, 스승과 학인의 기량이 모두 열등한 객간객客看客”이 있다. [본문으로]
  23. 『고려사』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두 달쯤 전에 공양왕과 그의 왕비가 자초를 만났다고 한다. (『고려사』 권46, 세가 46, 공양왕 4년 5월) 이런 기록이 비문에 반영되지 않은 것은 물론 의도적이다. 아마도 공양왕이 자초를 만난 것은 이성계와 자초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흥미로운 건 정작 비문에 조선 건국 이전에 무학과 이성계의 관계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성계와 무학이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본문으로]
  24. 비문과 『춘정집』에는 “旨刻”이라는 두 글자가 빠져 “奉塔名於檜巖”이라고만 기록되어 문장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다만 『동문선』에는 해당 문장이 “奉旨刻塔名於檜巖”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문장에 근거해서 이 부분을 풀이했다. [본문으로]
  25. 광명사廣明寺에 나옹의 진영을 걸고 불사를 연 것은 나옹과 광명사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선각왕사비에 의하면, 경술년(1370, 공민왕 19) 가을에 나옹은 광명사에서 공민왕이 보는 앞에 공부선功夫選을 행했다. [본문으로]
  26. 이 부분은 나옹이 지공과 평산에게서 인가받은 사실을 가리키는데, “지공의 천검”과 “평산의 할”이라는 표현은 선각왕사비에 기술된 일화를 가리킨다. 「평산이 그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보았느냐고 묻자, 서천의 지공이 날마다 일천 검(劍)을 쓰고 있더라고 대답하였는데, 평산이 다시 “지공의 일천 검은 우선 놔두고 너의 검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자, 스님이 좌구(坐具)를 가지고 평산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에 평산이 선상(禪牀)에 엎어지면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자, 스님이 “나의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는, 평산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평산이 설암 조흠(雪巖祖欽)으로부터 전해 받은 급암 종신(及菴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스님에게 주어 인가(認可)하는 뜻을 표하였다.」 [본문으로]
  27. “연복사演福寺에서 중을 공양하고 대장경大藏經을 펼쳐 독송하게 했는데, 왕사 자초에게 강설을 주관하게 했다. 이보다 앞서서 [연복사에] 5층탑을 조영하고 대장경을 보관하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낙성落成했다.” 飯僧于演福寺, 披讀大藏經, 以王師自超主講. 先是, 營五層塔, 藏大藏經, 至是落之. (『태조실록』 태조 2년 10월 17일) [본문으로]
  28. 무학이 이때 옮겨간 금장암金藏菴은 금강산에 있었다. [본문으로]
  29. 불회[佛會]: “부처가 설법하는 모임, 또는 그 자리.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자리.” (곽철환, 2003, 『시공불교사전』, 시공사) [본문으로]
  30. 사대[四大]: 불교에서 사물의 구성요소로 든 네 가지, 즉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을 가리킨다. 지대地大의 성질은 견고함, 수대水大의 성질은 축축함, 화대火大의 성질은 따뜻함이다. 풍대風大는 움직이는 것을 성질로 갖는다. 불교는 사람의 몸도 이 네 가지고 구성된다고 보았다. 즉, 사대가 흩어진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사람의 출생과 죽음을 기氣의 이합집산으로 본다는 점에서 불교와는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31. 색신[色身]: 『시공불교사전』에 의하면 이 용어는 형상을 인지할 수 있는 육신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대상을 분별하고 구분하는 지각 능력을 갖춘 인식 주체라는 의미도 깃들어있다. [본문으로]
  32. 법신[法身]: 『시공불교사전』에 의하면 법신은 “모든 분별이 끊어진 지혜를 체득”해서 “있는 그대로 대상을 직관하는 주체”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3. 영아행[嬰兒行]: 불교의 오행五行 중 하나로 “지혜가 얕은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이 행하는 작은 선행善行을 같이 행하는 보살의 수행”을 가리킨다. 오행은 “보살이 자기의 해탈과 다른 이들의 교화를 위하여 닦는 다섯 가지 수행”을 의미한다.(곽철환, 2003, 『시공불교사전』, 시공사) [본문으로]
  34. 비문과 『춘정집』에는 이 부분이 “師之道卓”인데, 『동문선』에는 해당 문장이 “師道之卓”으로 실렸다. [본문으로]
  35. 이 부분은 1828년(순조 28)에 비를 다시 건립할 때 새겨넣은 부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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