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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68

「고려시대의 曆法과 曆書」를 읽고 전용훈, 2014, 「고려시대의 曆法과 曆書」, 『한국중세사연구』 39 2021.09.23. ● 전용훈의 연구는 고려의 역법과 역서 간행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전용훈은 고려의 역법을 宣明曆과 授時曆 두 가지로만 설명하는 『高麗史』 「曆志」의 서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고려는 외교 관계를 맺었던 중원의 여러 나라로부터 역법과 역법에 관한 지식을 수용하면서도 나름대로 自國曆를 간행했다. ②11세기 중반 이후로 고려의 역법이 송의 역법과 친연성을 보이면서도 선명력을 채택한 일본의 역법과 차이를 보였다는 점에서 12~13세기 고려의 역법은 선명력과 달랐다. ③고려는 원의 역법을 활용해 자국의 역서를 처음으로 간행했고, 피책.. 2021. 9. 23.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최수천(崔壽天)의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최수천의 공인문기 [원문] 乾隆十五年 庚午 十一月 二十五日。 崔壽天前明文。 右明文事段。 要用所致以。 安世徽處。 自己買 得爲在。 長興庫湖西六月令。 供上紙半 封貢物。 同人前。 價折正銀子貳佰伍兩。 依數 交易捧上爲遣。 本文記貳度幷以。 永永放 賣爲去乎。 日後良中。 子孫族屬中。 若有 雜談。 則此文卞正事。 財主 韓興瑞 [手決] 訂人 尹佑商 [手決] 筆執 李繼興 [手決] [번역문] 건륭 15년(1750) 경오년 11월 25일 최수천崔壽天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은 요긴하게 쓸 까닭으로 안세휘에게 본인이 매득한 장흥고에 호서에서 6월경에 올리는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1) 이 사람[최수천]에게 값은 정은자正銀子 205냥으로 정하여 액수에 따라 바꾸어 받아들이고 본 문기文記 두 장을2) .. 2021. 2. 27.
[공인문기] 건륭 15년(1750) 한흥서(韓興瑞)의 공인문기 1750년 한흥서韓興瑞의 공인문기 [원문] 乾隆十五年 庚午 四月 二十二日。 韓興瑞前明文。 右明文事段。 要用所致以。 金時達處。 自己買 得爲在。 長興庫湖西六月令。 供上紙半封貢 物。 同人前。 價折銀子貳佰伍兩。 依數交易捧上 爲遣。 買得文記壹度幷以。 明年受價米爲 始。 永永放賣爲去乎。 日後良中。子孫族屬中。 若 有雜談。 則此文卞正事。 財主 安世徽 [手決] 訂人 外孫 高漢喆 [手決] 筆執 李繼興 [手決] [번역문] 건륭 15년(1750) 경오년 4월 22일 한흥서韓興瑞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은 요긴히 쓸 까닭으로 김시달金時達에게서 본인이 매득했던 장흥고의 호서 6월경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1) 이 사람2)에게 값은 은자 205냥으로 정하여 액수에 따라 교환하여 받아들이고 매득문기 한 장3)을 아울러서 내.. 2021. 2. 27.
[공인문기] 강희 36년(1697) 안세휘(安世徽)의 공인문기 강희 36년(1697) 안세휘의 공인문기 [원문] 康熙三十六年 丁丑 正月 初九日 安世徽前明文 右明文爲臥乎事段。 要用所致以。 祖上傳來。 長興庫所答湖西六月領所封供上紙。 半令貢物。 同人處。 價折銀子壹百柒拾兩。 依數交易捧上爲遣。 戊寅條爲始。 永永放賣爲去乎。 後此良中。 同生子孫族類中。 若有雜談是去等。 將此文記。 告官卞正事。 財主 金時達 [手決]證人 張漢傑 [手決] 朴震興 [手決]筆執 全永建[手決] [번역문] 강희 36년(1697) 정축년 정월 초아흐레 안세휘에게 밝히는 글 이 글을 밝히는 일인즉, 요긴하게 쓸 까닭으로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장흥고에 보내는 호서에서 6월경에 바치는 공상지供上紙 절반의 공물을[공물을 상납할 권리를] 이 사람[안세휘]에게 값은 은자 170냥으로 정하여 그 액수에 따라 교환하여 받아들이.. 2021. 2. 27.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조선 후기 교화의 ‘경계’와 정절의 현실 2020.12.21 1. 서론 통설에 따르면 성리학적인 윤리 규범과 사회질서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 시점은 17세기 이후였다. 이때가 되면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양측적 친속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고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국가와 사족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그간의 여성사 연구는 대체로 이런 통설을 전제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그들의 대응을 탐색했다. 조선 사회를 지배한 유교적 규범과 그에 걸맞게 마련된 제도는 여성에게 어떻게 정절을 강요했는가. ‘유교 가부장제’[각주:1]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하락했는가. 조선시대의 여성에게는 어떤 폭력과 차별이 가해졌는가... 2020. 12. 31.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대사비 檜巖寺 妙嚴尊者 無學大師碑 ▲현재 양주 회암사 북쪽에 위치한 무학의 부도와 탑비. 오른쪽은 처음 세운 비석의 받침석과 지붕이며, 왼쪽은 순조 때 중건한 비석이다. 비석 소개 일반적으로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이하 ‘무학비’)이 처음 건립된 시점은 1410년(태종 10)이다. 이 비석을 세운 결정적인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유지遺志였다. 비문 찬술자 변계량의 진술에 따르면, 태종은 상왕에게 태조의 유지를 듣고는 비명을 찬술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때 건립된 비석은 줄곧 제자리를 지키다가 약 400여 년이 지난 1821년(순조 21)에 파괴되었다. 오늘날 회암사 북쪽에 서 있는 무학비는 1828년(순조 28)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무학비가 순조 때 파손된.. 2020. 12. 10.
[간찰]무신년(1848) 김학성 답위장 무신년(1848) 김학성 답위장 戊申年(1848) 金學性 答慰狀 2020.10.19. 1. 문서의 개요 백부상伯父喪을 당한 김학성金學性이 조문 편지를 보낸 강원도 관찰사 박용수朴容壽에게 보낸 답위장答慰狀이다. 답위장은 이름 그대로 위문하는 편지, 즉 위장慰狀에 대한 답서를 의미한다. 김학성의 백부는 헌종 대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청녕군淸寧君 김동건金東健이다. 『청풍 김씨 세보』에 따르면, 김동건은 1848년(헌종 14) 11월 18일에 사망했다. 김학성은 김동건이 사망한 지 약 보름 뒤에 이 편지를 작성한 것이다. 김학성은 백부상을 당한 슬픔과 강원감사의 위문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2. 정서 答狀上 東營 巡節座前[각주:1] 省禮[각주:2] 家門不幸[각주:3] 伯父棄背 酸 苦摧裂[각주:4] 無以.. 2020. 10. 20.
[입안]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 1480년 김효지 처 황씨 계후입안 1480年 金孝之 妻 黃氏 繼後立案 2020.09.21. 1. 정서 ⦁문서에서 결락된 부분은 ‘(…)’으로 표기한다. ⦁이두는 밑줄을 긋고 각주를 달아 의미를 풀이한다. ⦁결락된 부분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에는 결락 표기 옆에 [ ]를 입력하고 유추한 글자를 표기한다. 成化拾陸年(…) [捌]月 初貳 禮曹立案 右立案(…)[爲繼後事] 曺 啓目節[각주:1]呈 慶尙道禮(…)[安縣 故金孝之妻黃氏] 所志內 家翁亦[각주:2]嫡妾俱無子爲白乎等用良[각주:3] 生前始叱[각주:4] 三寸姪金淮次子孝盧矣身[각주:5](…)[乙繼後] 爲良結[각주:6]說噵爲如可[각주:7] 未及繼後身故爲如乎在亦[각주:8] 節家翁願意導良[각주:9] 同孝盧矣身乙[각주:10] 繼後令是白良[각주:11](…)[結望].. 2020. 10. 11.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를 읽고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를 읽고 (권태억, 2014,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문명화(1904~1919)』, 서울대 출판부) 2020.08.31 1. 이 책의 일차적인 목표는 일제가 내세운 문명화론의 성격과 1910년대 무렵 식민통치의 성격, 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과 대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의 근본적인 의도는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대규모 운동의 발생 원인을 문명화론과 식민통치의 성격과 연결 지어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문명화론을 검토하면서 그 하한을 1919년까지로 한정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2.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근대적인 문물제도의 이식과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화에 큰 의미를 둔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일제가 주도한 ‘문명.. 2020. 9. 11.
『개발 없는 개발』을 읽고 『개발 없는 개발』을 읽고 (허수열, 2011, 『개발 없는 개발』(개정판), 은행나무) 2020.08.31 1. 저자는 이 책에서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응해서 20세기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경제 동향과 추이를 실증적으로 검토한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반대편에 있다. 물론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가 부분적으로나마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저자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수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데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그의 견해는 ‘식민지 수탈론’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식민지 수탈론’을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보완한, 즉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연구라 할 수 있다. 2.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통계 자료에 대.. 2020.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