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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정리/조선시대사38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오세현, 2017, 문장의 역할을 통해 본 15세기 斯文의 성격, 사학연구 127 2020.04.29. 머리말 17세기의 송시열은 주희의 견해를 일부 부정한 윤휴와 박세당을 ‘斯文亂賊’이라 비판했다. 그에게는 오직 주희의 학문만이 ‘斯文’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송시열과 달리 그들은 도학뿐 아니라 문장도 사문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인품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도덕과 함께 문장력을 거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사문에 관한 인식이 엄격해진 것은 사문의 다양한 구성 요소 중에서 道學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를 배제한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사문에서 근본적인 위상을 지닌 도학뿐 아니라 현실적 가치를 지닌 문장의 위상과 역.. 2020. 5. 3.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2019.12.09 1. 여말선초 성리학 연구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 고려 말 성리학 수용은 사상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수용과정에 관해 많은 논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랜 연구에 비해 여말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일차적인 원인은 자료 부족에 있지만, 여말선초 성리학을 보는 연구자들의 기존 시각에도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 시각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①여말선초 성리학과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②고려 말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의 정.. 2019. 12. 9.
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미야지마 히로시, 1996, 『양반: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강 2019.11.06. 서론: 현대에 살아 있는 유교적 전통 한국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공적을 현창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실제로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대상은 고조 이하의 부계 조상과 그 배우자다. 이런 관습에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제사와 조상 현창은 단순히 조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를 顯示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여전히 조상 숭배 관념 등 유교적 전통이 이어지는 건 이런 현실적 의의 덕분이다. 유교는 본래 중국에서 발생하여 한국ㆍ일본ㆍ베트남 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유교 수용의 양상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불교의 영향이.. 2019. 11. 7.
조선의 건국과 유교문화의 확대 도현철, 2004, 「조선의 건국과 유교문화의 확대」, 『동방학지』 124 2016.12.16 1. 머리말 저자에 따르면, 고려 말에 등장한 사대부는 고려의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들은 위화도 회군, 전제개혁, 조선왕조 개창 등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를 모델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경영을 지향했다. 이러한 지향 속에서 성리학을 개혁사상으로 하여 정치체제 개혁을 도모했지만 현실의 이해관계가 얽혀 쉽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상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고,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도교와 불교에 기초하여 운영되던 향촌 사회를 재편하는 것도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사대부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불교를.. 2019. 10. 19.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 송웅섭, 「지배 세력의 변동과 유교화」,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2019.10.19. 1. 향촌 사회의 유교화 여정 저자는 논의에 앞서 조선시대의 유교화 과정을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18세기에 鄭𣲚이라는 사람이 안정복에게 禮法을 자문했다. 그는 숙부 첩의 侍養子가 숙부의 상에 상복을 입어야하는지, 입어야 한다면 어떤 상복을 입어야하는지를 물었다. 안정복은 시양자가 숙부와는 친속관계가 아니므로 상복을 입어선 안 된다고 답했다.(『순암집』 권8, 答鄭都事𣲚問) 저자는 이 사례를 18세기 조선의 유교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들었다. 16세기 조선의 모습은 18세기와는 사뭇 달랐다. 연안 사람 李同은 아버지와 식사를 하다가 말다툼을 벌이고 홧김에 밥그릇을 던져 아버지에게 상해를.. 2019. 10. 19.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김건태, 2011, 「19세기 어느 성리학자의 家作과 그 지향」, 『한국문화』 55 2019.08.06. 1.서론 19세기 농촌 사회에는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 다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그런 현상이 빚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농업에 관한 개인의 관심이 재산 규모에 차이를 빚어내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 후기에 들어 농업에 적극적으로 종사했던 농민을 두 부류로 범주화했다. 借地를 활용해 부를 축적한 經營型富農과 자신의 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부를 늘린 經營地主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들이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입장에 회의적이다. 근대의 지표로 발굴된 경영지주와 경영형 부농이 사실은 농업에 관심을 가졌.. 2019. 8. 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2019.08.05. 1. 근대로의 관점 저자는 이 글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재검토하고 ‘소농사회론’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타당성을 따져보기 위한 비교사적 준거로 서유럽(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지표를 제시한다. ①농촌경제에서 보조적 위치에 있던 가내수공업(특히 衣類공업)이 사회적 분업의 일환으로 농업에서 분리되었다. ②신분제와 결합된 중층의 토지소유가 해체되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 ③보편주의적 세계와 중세의 공동체적 질서로부터 ‘합리적인 개인’이 등장했다. ④자율적인 시장경제가 경제의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시장과 국가가 서로 분리되었다. ⑤세계시장ㆍ세계체제를 전제로 지.. 2019. 8. 5.
청의 조선사행 인선과 ‘대청제국체제’ 구범진, 2008, 「淸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인문논총』 59 2019.08.02. 1. 서론 그동안 조선이 명ㆍ청에 파견한 使行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명ㆍ청이 조선에 파견한 勅使에 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책봉-조공체제’였다면 ‘조공’의 측면 뿐 아니라 ‘책봉’의 측면에서도 양국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 人選 문제를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 저자는 『同文彙考』 「詔勅錄」에 기록된 조선사행 칙사의 관직과 이름을 검토했다. 그 결과 청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을 선발할 때 줄곧 漢人 배제의 원칙을 준수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논문은.. 2019. 8. 3.
『대의각미록』과 조선 후기 화이론 김홍백, 2011, 「『大義覺迷錄』과 조선 후기 華夷論」, 『한국문화』 56 2019.08.02. 1. 서론: 중세 동아시아 비한인계 지식인의 화이론 저자는 曾靜역모사건(1728)으로 드러난 한족 지식인의 華夷論과 그것을 비판한 옹정제의 『大義覺迷錄』이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살펴보고 그 사상사적 의미를 검토했다. 이 글에서 저자가 탐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박지원 등 북학파 지식인에게 ‘華’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이렇다. ①『대의각미록』에서 한족 화이론을 비판하는 쟁점을 검토한다. ②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대의각미록』을 어떻게 수용하고 논평했는지를 살펴본다. ③『대의각미록』에 관한 조선 후기 지식인의 논평과 입장의 의미를 小中華主義ㆍ北學論라는 측면에서 검토한.. 2019. 8. 2.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배우성, 2003,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아카넷 2019.07.31. 1. 머리말 17세기 조선에서 富國과 安民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다양한 사회경제정책론이 쏟아진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의 사회경제정책론을 검토한 연구들은 학문적 차이 혹은 정치세력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사회경제정책론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17세기 사회경제정책의 차이를 일관되게 학문적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다. 각 학파=정파의 차이는 예론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경제정책론은 예론과 같은 차원으로 보기에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다. 학파=정파간 정책론의 차이는 오히려 반세.. 2019.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