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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

정도전의 정치사상과 ‘心’

by 衍坡 2020. 7. 7.

정도전의 정치사상과 ‘心’


2020.05.08




그동안 정도전은 이른바 ‘신권중심론자’의 상징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기존 한국사 연구에 따르면, 정도전은 왕권보다는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국가체제를 상정했다고 한다. 혈연에 따라 왕위가 세습되는 사회에서 국정은 국왕 개인의 인격과 역량에 따라 잘 다스려질 수도,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정도전은 그런 정치적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 재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도전에게 국왕은 재상과 한두 가지 나랏일을 의논하는 도덕적 상징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송재혁은 이런 견해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송재혁의 주장은 매우 명확하다. 그는 기존 한국사 연구자들이 정도전의 정치질서 구상을 의원내각제 혹은 입헌군주제에 유비해 왔다고 지적한 뒤, 그런 설명이 정도전이 활동했던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송재혁에 따르면, 국왕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고 권신이 전횡을 일삼는 상황이야말로 고려 말의 정치 현실이었다. 정도전의 개혁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구체화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의도가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재상의 권한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다. 오히려 정도전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서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정치 질서를 추구했다고 한다.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제시된 저작이다.


군주권 제한과 재상권의 확립을 골자로 정도전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이른바 ‘재상주의론’에 대한 송재혁의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기존 한국사 연구는 고려 말 정치적ㆍ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이른바 ‘권문세족’의 존재에서 찾았고, 고려 말의 국왕은 당시의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 못하는 처지였다고 간주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도전이 왜 굳이 국왕권을 제한하려 했는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서 송재혁의 견해는 당대의 역사적인 조건과 맥락에 훨씬 더 부합하는 설명이라 생각한다.


한편, 송재혁의 연구는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이 예와 제도를 정비하는 데 매우 주력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정도전은 새 왕조의 정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정도전은 “군주의 절대적 위상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예제를 중시했는데, 이 ‘禮’는 법의 근본이기도 했다. 송재혁은 정도전의 이런 생각이 순자의 발상과 부합한다고 지적한다. (41~45면) 확실히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해야 했던 정도전으로서는 예와 제도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송재혁의 견해는 일면 타당하다.


다만 송재혁은 예ㆍ법ㆍ제도ㆍ질서의 측면에만 집중한 나머지 군주의 정치권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여말선초에 이르면 군주의 정치권위는 ‘도덕’을 통해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민우가 지적한 것처럼, 고려 말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私田이 혁파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 즉 도덕적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이런 점을 고려하면 군주의 정치권위 역시 도덕적 측면에서 정당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도덕적인 정치권위가 중시되면서 ‘군주의 마음’이 특별히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각주:2] 장지연에 따르면, 군주의 ‘正心’을 강조하는 것은 여말선초 지식인들의 공통적인 면모였다고 한다. 물론 송재혁도 이 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여말선초 지식인들이 강조한 ‘心’의 개념이 결코 단일한 의미가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장지연에 의하면, 여말선초에는 “풍수 술사도, 불교 승려도 들먹이던 것이 ‘정심’이었다.” 그런 맥락을 고려하면, “相業之大 以格君心爲本” 같은 정도전의 서술은 단순히 군주의 사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차원의 글귀라고 보기 어렵다.[각주:3] 오히려 군주가 ‘유학적인 마음’을 가지고 유학의 이상적인 정치를 펴도록 보좌할 의무가 재상에게 있음을 강조한 문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도전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학술의 차원이 아니라 군주의 정치권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이며 어떤 정치를 이룩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다양한 사상과 경합을 벌이는 정치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정도전이 ‘正心’의 내용을 두고 불교나 도교와 경쟁을 벌였다면, 정도전이 성리학의 도통론을 받아들인 것도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다.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옛날 맹자(孟子)는 비록 궁하여 평민의 자리에 있었지만, 마침내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고 공자를 높였는데, 천하가 그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덕이 뛰어나, 그 덕이 족히 천하를 믿고 복종하게 하였던 때문이며, 양무제[蕭衍]는 비록 어둡고 아는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 불교를 일으켜 풍속을 바꾸는 데 천하가 그를 따랐던 것은, 대개 지위가 높아서, 그 지위가 족히 천하를 믿고 복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군자(君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小人)의 덕은 풀이니, 바람이 풀에 불면 풀이 반드시 쓰러진다.’고 하였음은, 이를 두고서 한 말인 것입니다. 그 후부터 위에는 어진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참된 선비가 없어서, 세교(世敎)는 점점 쇠퇴하고 사설(邪說)이 방자하게 돌고 있는데, 뛰어나 위에 있는 자마저 그를 따라 제창하였으니, 아아!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송(宋)이 융성하게 되어 참된 선비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전래한 경서[遺經]를 바탕으로 끊어진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우리의 도를 붙들고 이단을 물리치는데 학자들이 거기에 쏠리어 따르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덕이 뛰어나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덕만이 있고 지위가 없어서, 도를 세상에 크게 펴서 사설(邪說)의 뿌리를 뽑지 못하였습니다. ( 『삼봉집』(권3) 「上鄭達可書」 )


언뜻 보면 이 편지는 성리학의 도통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각주:4] 하지만 정도전이 단순히 성리학의 도통론을 답습했다고 보기 어렵다. 여말선초에 ‘正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면, 정도전이 맹자에서 송대 유학자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마음’이라는 개념 때문일 것이다. 성리학의 도통 자체가 이른바 ‘16자 심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맹자와 송대 유학자는 ‘心’을 유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이었다.



한편, 정도전이 생각한 ‘유학적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의 시선에서 보면 ‘유학적 마음’의 핵심은 바로 ‘仁’이다. 그가 『조선경국전』에서 이성계의 즉위를 ‘仁’의 개념으로 정당화한 것도 그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도전이 ‘仁’ 개념을 매개로 하늘과 군주를 유비한다는 사실이다.


천지는 만물에 대하여 그 생육하는 일을 동일하게 할 뿐이다. 대개 그 일원(一元)의 기(氣)가 간단없이 주류(周流)하매, 만물의 생성은 모두 그 기(氣)를 받아서, 어떤 것은 굵고, 어떤 것은 가늘고, 어떤 것은 높고, 어떤 것은 낮아서, 제각기의 형태를 지니고, 제각기의 본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천지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으로 본심을 삼으니, 이른바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이 바로 천지의 큰 덕인 것이다. (…)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육시키는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서 불인인지정(不忍人之政)을 행하여, 천하 사방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기뻐해서 인군을 마치 자기 부모처럼 우러러볼 수 있게 한다면, 오래도록 안부(安富)ㆍ존영(尊榮)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요, 위망(危亡)ㆍ복추(覆墜)의 환(患)을 끝내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인(仁)으로써 위(位)를 지킴이 어찌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선경국전』 「正寶位」)


이런 서술은 정도전이 군주의 정당성을 ‘仁’ 혹은 ‘仁政’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군주의 정치권위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仁을 바탕으로 ‘不忍人之政’을 펴서 “천리와 인심에 부응”할 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도전이 구사하는 개념과 논리는 『맹자집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군주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맹자집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송재혁은 정도전의 신질서 구상에 『순자』가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하지만, 『순자』보다는 『맹자집주』야말로 정도전이 군주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훨씬 중요한 저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존의 한국사 연구들은 정도전이 『맹자』 혹은 『맹자집주』를 해석하는 방식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맹자』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설명만 존재했을 뿐이다.[각주:5] 하지만 그보다는 정도전이 『맹자』 혹은 『맹자집주』의 해석을 통해 어떻게 군주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지, 또 그런 정당화 방식이 당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이 조선 국왕의 정치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하는 개념이나 논의들, 예를 들어 유가의 聖王論과 천명 개념, 도덕적 마음[四端]의 실체 등이 『맹자(집주)』를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도전이 『맹자(집주)』를 어떻게 읽어냈는지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이민우, 2015, 고려 말 私田 혁파와 과전법에 대한 재검토, 『규장각』 47. [본문으로]
  2. 흔히 성리학적 사유에서 도덕과 마음을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성리학을 학습한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과 마음을 일관된 체계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이원석의 분석에 따르면, 이색은 ‘理’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도덕 질서의 근원으로서 적극 사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리는 인간 외부적 규율 또는 규칙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색은 측은지심 등 선한 감정의 발로에서가 아니라, 규칙과 준수에서 인간의 도덕성이 형성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원석, 2015, 「유가 경전 내 주요 존재론적 개념에 대한 여말 유학자들의 인식」, 『태동고전연구』 34) 이 설명을 받아들이면 ‘도덕법칙’으로서의 理를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마음’과 연결 지어 사유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중시되고 ‘正心’이 강조되는 것은 고려 말의 새로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장지연, 「뻔한 사료의 새로운 읽기 – 정도전의 경복궁 전각명 기문」, 『나의 자료 읽기, 나의 역사 쓰기』(김인걸ㆍ양진석 외, 경인문화사, 2017), 40면. [본문으로]
  4. 실제로 기존의 연구들은 이런 측면에 주목하면서 정도전을 성리학자로 간주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도전이 성리학자인가 여부보다는 그가 다분히 자신의 관점에서 주희의 학설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원석은 한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여말의 성리학 수용자들은 (…) 사서집주 등을 통해서 주희의 학설이 하나의 정합적인 통일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러한 전제 위에서 자신의 관심과 부합되는 구절들을 뽑아내어 이해한 후, 자신의 이해 내용이 바로 성리학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 타당하다면, 정도전이 성리학의 도통론을 내세운 것은 단순히 송대 유학자의 서술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본문으로]
  5. 『맹자(집주)』가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구상하는 데 기여했다는 설명은 철저히 ‘재상정치론’의 설명 속에서 정도전과 『맹자(집주)』의 관계를 해석한 것이다. 기존 연구의 틀에서 보면, 『맹자(집주)』는 정도전이 군주의 권위와 권력을 상대화해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송재혁의 설명처럼 정도전의 구상이 ‘재상정치론’과 거리가 멀다면, 기존의 설명은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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