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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

[삼봉집] 남양에 도착해서 임금께 사례하는 전문

by 衍坡 2020. 5. 25.

남양에 도착해서 임금께 사례하는 전문(1385)

到南陽謝上箋


정도전





① 道傳蒙恩除南陽府使, 已於今月十七日到任上訖. 祇承綸命, 出守海鄕, 愧感交騈, 罔知所措.

② 竊念以臣之微, 本無寸長, 蒙先王之知, 擢從臣之列. 當逆旽伏罪, 告謝太室, 俾臣考校鐘律, 肄習祭儀, 比及卒事, 禮無愆違, 先王稱之曰能, 禮曹學官, 命臣兼之. 仍尙符寶, 視草誥院, 恩至渥也. 及先王棄群臣, 臣於是時, 以禮儀郞職掌禮務, 承命廟堂, 糾合百官, 以定大業.

③ 殿下初卽位, 庶政俱新. 除臣成均司藝, 藝文應敎,知製敎. 蒙恩召入書筵, 講大學書, 至穆穆文王, 於緝煕敬止, 其於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父止於慈, 爲人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懇懇辨論, 以致丁寧, 殿下納之. 臣感知遇之恩, 言無避諱, 觸忤時宰, 斥去南荒, 間關炎瘴, 濱於死者幾至三年. 例徙于鄕, 又過四年, 許於京外從所便宜. 是則殿下賜臣以再生, 甘自分於閑散, 爲盛代之逸民.

④ 歲在甲子, 殿下命門下評理鄭夢周賀天壽聖節. 臣爲書狀官奉表朝京師。 前此二三行李。 皆被拘留。 存亡未知。 在廷之臣。 憚莫肯行。 臣從鄭評理受命卽行。 達于金陵。 不失其期。 朝聘始通。 拘留者歸。 是在殿下事大以誠。 群臣奉承之勤也。 臣何力之有焉。 使還之日。 卽授臣成均祭酒知製敎。 殿下請承襲則俾臣草表文。 迎詔誥則俾臣習儀注。 天子嘉之曰表辭誠切。 使臣稱之曰禮儀可觀。 方今文理盛開。 儒臣林立。 顧臣何人。 獨有是榮。 此又殿下賜臣以不朽也。

⑤ 惟典校寺。 本祕書省圖書所在。 讎校任重。 謂臣有學爲令於是。 書生之榮。 其亦極矣。 顧惟臣營生謀拙。 食貧口衆。 故求外寄。 以盡餘年。 豈期求退而資益高。 辭榮而寵自至。 玆蓋伏遇主上殿下以忠信體群下。 諒臣志之無他也。 臣敢不益勵駑鈍。 宣上德意。 撫綏疲瘵之餘民。 仰酬洪造之萬一。 


ㆍ觸忤(촉오): 비위를 거스르다

ㆍ炎瘴(염장): 더운 지방에서 생기는 장기(瘴氣) 혹은 이러한 장기가 생기는 지역을 말하는데 대개 귀양지(歸養地)를 말하기도 함

ㆍ視草(시초): 신하가 임금이 내리는 조칙의 초고를 작성하거나 수정하는 일



① 신 정도전은 은혜를 입고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어 이번 달 17일에 부임지에 도착해 상소를 올립니다. 공경히 왕명[綸命]을 받들어서 나아가 해향(海鄕)을 지키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마음과 감격스러운 마음이 교차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②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천한 신에게는 본래 조금도 장점이 없는데 선왕[恭愍王]께서 저를 알아주셔서 종신(從臣)의 반열에 기용하셨습니다. 역적 신돈(辛旽)이 형벌을 받아 죽자 태실(太室)에 그 사실을 알리고 사례를 올렸는데, 신에게 종률(鍾律)을 상고하고 제의를 익히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상사(喪事)를 치를 때 예가 잘못되거나 어긋난 것이 없자 선왕께서 잘한다고 칭찬하시고는 예조의 학관(學官)을 신에게 겸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어서 부보랑(符寶郞)의 벼슬을 더하시고 예문관[誥院]에서 시초(視草)를 담당하게 하셨으니 은혜가 지극히도 두터웠습니다. 선왕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棄群臣] 신은 이때 예의랑(禮儀郎)의 벼슬에 올라 예제에 관한 일을 담당했는데, 조정[廟堂]으로부터 명을 받고 백관(百官)을 규합해서 대업(大業)을 정했습니다.


③ 전하께서 처음에 즉위하셨을 때 정치[庶政]가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성균사예(成均司藝)와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에 제수하셨습니다. 신은 은혜로운 부름을 받고 서연(書筵)에 들어가 『대학』을 강독했습니다. “‘훌륭하신 문왕은 아, 언제나 빛났으며 삼가는 마음으로 지극한 선에 머무르셨다’고 하니, 임금의 처지에서는 인(仁)에 머물렀고, 신하의 처지에서는 (敬)에 머물렀으며, 아버지의 처지에서는 자(慈)에 머물렀고, 자식의 처지에서는 효(孝)에 머물렀으며, 나라 사람들[國人]과 교제할 때는 신(信)에 머물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간절히 변론하기를 되풀이했더니 전하께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신은 제 뜻을 알아주셔서 대우해주신[知遇] 은혜에 감격해서 거리낌 없이 간언하다가 그 당시 재상[李仁任]의 비위를 거슬러서 먼 남쪽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장기(瘴氣)로 고생하다가 거의 죽을 뻔한 지 거의 3년이 되자 예(例)에 따라서 고향으로 옮겨 갔고, 또 4년을 보내자 서울 밖에서 편리한 곳에 살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신에게 죽을 지경에서 살아나게 하는[再生]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신은 한산한 곳에 살면서 제 분수에 만족하고 성대한 시대의 은거자[逸民]가 되려 했습니다.


④ 그런데 갑자년(1384, 우왕 10)에 전하께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정몽주(鄭夢周)에게 천수성절(天壽聖節)을 하례하게 하셔서 신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표문을 받들고 경사(京師: 남경)에 조회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보냈던 두세 명의 사신이 모두 억류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었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해서 기꺼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은 평리 정몽주[鄭評理]를 따라서 명을 받고 곧 출발 금릉(金陵)에 도착했는데, 제때를 놓치지 않고 도착한 덕분에 조빙(朝聘)이 그제야 통하게 되었고 억류된 자들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대국(大國)을 정성으로 섬기고 신하들이 부지런히 받든 덕분이지, 신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신이 돌아오던 날 신에게 성균좨주(成均祭酒)ㆍ지제교(知製敎)에 제수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중국에 왕위를 계승하기[承襲]를 청할 때는 신에게 표문(表文)을 짓게 하셨고, 조서[詔誥]를 맞이할 때는 신에게 의주(儀注)를 익히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천자께서는 “표문의 말귀가 진실하고 간절하다”고 칭찬하셨고, 사신은 “예의(禮儀)가 훌륭해서 볼 만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지금 문치[文理]가 성대하게 열려서 유신(儒臣)이 숲처럼 늘어섰는데,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이런 영화를 누린 것입니까? 이 역시 전하께서 신에게 썩지 않는 은혜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⑤ 생각해보면, 전교시(典校寺)는 본래 비서성(秘書省)으로 도서가 보관되어 있는 곳입니다. 교정[讎校]의 책임은 무거운 것인데도 신이 학식을 갖추었다고 여기셔서 이 자리에 있게 하시니, 서생(書生)의 영광이 정말로 극진합니다. 되돌아보면 신은 생계를 꾸려나갈 꾀가 졸렬해서 먹을 것은 적고 식구는 많아 외직(外職)으로 나아가기를 추구해서 남은 세월을 보내려 했습니다. 물러나기를 바랄수록 자급(資級)이 더욱 높아지고 영화를 사양할수록 총애가 저절로 이를 것을 기대나 했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 주상전하께서 충신(忠信)으로 아랫사람들을 생각하셔서 신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이 더욱 애써 노둔한 재주로 임금의 덕의(德意)를 펼쳐서 피폐한 남은 백성을 위로하고 편안케 하여 넓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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