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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채웅석,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한국사 시민강좌』40, 2007) Ⅰ. 들어가며 한국사에서는 몇 차례 왕조의 변천이 이루어져 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바뀌었고, 다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조교체는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왕조교체는 역사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발전상을 보여준 것인가? 채웅석의 논문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를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먼저 한국사에서의 왕조교체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2018. 4. 30.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한국문화 10, 1989) 머리말 16세기에 중앙정부로 진출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사림은 ‘修己治人’이라는 정합성을 추구하면서 학파와 정파를 등치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기존 정치세력이 완전하게 도태되었고, 사림을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었다. 광해군대에 이르면 북인을 중심으로 하여 정권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廢母殺弟’로 인해 성리학적 강상윤리를 져버림으로써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었고. 이후 서인과 남인의 연대 위에서 이루어진 인조반정을 통해 대북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후 정묘 ・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는데,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조선 지식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이.. 2018. 4. 29.
이사 -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다른 나라 사람을 쫓아내는 것에 관해 진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 이사 ▲현대에 그려진 이사의 모습 臣聞吏議逐客, 竊以爲過矣. 신이 듣기로는 관리들이 객(客: 다른 나라 사람)을 쫓아낼 것을 의논한다는데,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昔者, 繆公求士, 西取由余於戎, 東得百里奚於宛, 迎蹇叔於宋, 來邳豹公孫支於晉, 此五子者, 不産於秦, 而繆公用之, 幷國二十, 遂霸西戎.옛날에 목공(穆公)께서 선비를 구하여 서쪽으로는 융(戎)에서 유여(由余)를 기용했고, 동쪽으로는 완(宛)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얻었으며, 송(宋)에서 건숙(蹇叔)을 맞아들였고, 진(晉)에서 비표(邳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목공께서는 그들을 등용하여 스.. 2018. 4. 28.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2018.04.03 유자광은 조선시대 내내 '간신'(奸臣)으로 기억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출세해서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해친 흉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유자광의 삶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비판이 꼭 불합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는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풀었고, 연산군 재위 내내 왕의 비위를 맞추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가담해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유자광의 부귀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은 여기저기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벼슬과 공신 작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 1512년(중종 7).. 2018. 4. 27.
최치원의 시 몇 편 秋夜雨中 / 酬進士楊贍送別 / 古意 / 贈金川寺主 / 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 초상화 (1) 秋夜雨中 : 비 오는 가을밤 秋風惟苦吟。 가을 바람에 홀로 괴로이 읊조리니, 擧世少知音。 온 세상에 내 뜻을 알아줄 벗 적구나. 囱外三更雨。 창밖으로 삼경의 비가 내리니 燈前萬里心。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달리네. (2)酬進士楊贍送別 : 진사 양섬의 송별시에 답하다 海山遙望曉煙濃。 해산을 아득히 바라보니 새벽안개 자욱하고 百幅帆張萬里風。 백 폭의 돛은 만 리 바람에 펼쳐지네. 悲莫悲兮兒女事。 살아서 이별함을 가장 슬퍼함은 아녀자의 일과 같으니 不須怊悵別離中。 이별하는 중이라고 굳이 슬퍼할 것 없다네. (3)古意 : 옛 뜻 狐能化美女。 여우도 미녀로 변할 수 있고 狸亦作書生。 너구리 또한 선비로 변하다. 誰知異.. 2018. 4. 27.
1970년대 중ㆍ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행과 ‘교육격차’ 정무용, 「1970년대 중ㆍ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시행과 ‘교육격차’」(『역사문제연구』 29, 2013) 머리말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평준화는 입시문제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평준화는 추첨식 입학제를, 비평준화는 자유경쟁시험을 치는 입학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평준화와 비평준화의 의의를 자율성 : 획일성 또는 평등 : 경쟁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의 추진과정을 다룬 대부분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는 평준화 정책과 입학제도를 동일시하는 인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평준화 정책과 입시제도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둘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다. 즉, 입시제도가 학생을 선발하는 문제였다면, 평준.. 2018. 4. 27.
[맹자] 양上-1.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 양혜왕장구上 (1) : 하필왈리(何必曰利) 孟子見梁惠王.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梁惠王, 魏侯罃也. 都大梁, 僭稱王, 溢曰惠. 史記惠王三十五年, 卑禮厚幣, 以招賢者, 而孟軻至梁. 양혜왕은위(魏)제후영(罃)이다.대량(大梁)에도읍을정하고왕을참칭했다.시호는‘惠’(혜)다.『사기』에따르면,예(禮)를낮추고예물을후하게보내현자를초빙하여맹가가양[大梁]에이르렀다고한다.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천릿길을 멀다 여기지 않으시고 오셨는데,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叟, 長老之稱. 王所謂利蓋富國彊兵之類 ‘叟’(수)는 장로(長老)를 일컫는 말이다. 왕이 말하는 ‘利’(이)는 부국강병 같은 부류인 듯하다.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가 대답했다.. 2018. 4. 25.
제갈량 - 후출사표(後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 제갈량 先帝慮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賊彊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故, 託臣而不疑也. 선제[劉備]께서는 한나라와 역적[魏]은 양립할 수 없고, 왕업(王業)은 천하의 한구석에만 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선제께서는 밝은 지혜로 신의 재주를 헤아려 신이 역적을 토벌하기에 재주는 약하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도 망할 것이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는 일을 맡기고도 의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2018. 4. 24.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을 바라보는 시선들 : 민족주의자 VS 친일파 몽양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ㆍ중국ㆍ미국ㆍ소련 등 다양한 외부세력과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 점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소련과 미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그 모두와 폭넓게 교류했던 여운형의 행보는 분명히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미군정과 한국 우익 세력은 그를 공산주의자ㆍ친일파 등으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좌익 세력은 여운형이 친미앞잡이이자 기회주의.. 2018. 4. 23.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오수창, 2012, 「18세기 조선 정치사상과 그 전후 맥락」, 『역사학보』 213 1. 머리말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긴 역사적 맥락 속에서 18세기 조선의 정치사상을 검토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다만 저자는 각 시기의 구체적인 정치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17~19세기 정치사상의 연결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 정치의 내적논리를 검토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목적은 조선 정치사를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인식을 극복하고 조선의 정치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런데 저자는 왜 구체적인 정치사상을 검토하려고 하는 것인가? 왜 18세기 정치사상을 굳이 17~19세기의 긴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하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의 정치상황이 17세기 붕당정치의 현실을 이어받으..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