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06

[맹자] 양上-3. 흉년을 탓하지 마소서(王無罪歲) 양혜왕장구上 (3) : 왕무죄세(王無罪歲) 梁惠王曰: “寡人之於國也, 盡心焉耳矣. 河內凶, 則移其民於河東, 移其粟於河內, 河東凶, 亦然. 察鄰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 鄰國之民不加少, 寡人之民不加多, 何也?” 양혜왕이 말했다. “과인은 나라에 마음을 다할 뿐입니다. 하내(河內: 지명)에 흉년이 들면 그곳의 백성을 하동(河東: 지명)으로 이동하게 하고 하내에 곡식을 옮겨가게 합니다. 하동에 흉년이 들면 역시 그렇게 합니다. 이웃 나라의 정치를 살펴보면, 과인이 마음을 쓰는 것처럼 하는 자가 없는데도 이웃나라 백성이 더 적어지지 않고 과인의 백성이 더 많자지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寡人, 諸侯自稱, 言寡德之人也. 河內ㆍ河東, 皆魏地. 凶, 歲不熟也. 移民以就食, 移粟以給其老稚之不能移者. ‘寡人’(과인).. 2018. 6. 7.
이백 -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봄 밤에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문 이백 ▲ 명나라 때 춘야연도리원서에 담긴 내용을 그린 그림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況陽春召我以煙景, 大塊假我以文章!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獨慚康樂. 幽賞未已, 高談轉淸.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 不有佳作, 何伸雅懷?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무릇 천지(天地)는 만물을 맞이하는 여관이요, 세월[光陰]은 백대(百代)의 지나가는 손님이다.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뻐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옛사람이 촛불을 들고 밤에도 노닌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구나. 하물며 따뜻한 봄날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천지.. 2018. 6. 6.
[맹자] 양上-2.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한다(與民偕樂) 양혜왕장구上 (2) : 여민해락(與民偕樂) 孟子見梁惠王, 王立於沼上, 顧鴻鴈麋鹿曰: “賢者亦樂此乎?”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왕은 연못가에 서서 기러기와 사슴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진 자도 이런 것들을 즐거워합니까?” 沼, 池也. 鴻, 鴈之大者. 麋, 鹿之大者. ‘沼’는 연못이다. ‘鴻’은 큰 기러기를 말한다. ‘麋’는 큰 사슴을 말한다. 孟子對曰: “賢者而後樂此. 不賢者, 雖有此, 不樂也.” 맹자가 대답하여 말했다. “어진 자여야 이러한 것들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러한 것들을 가져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此一章之大指 이것은 한 장의 큰 요지이다. 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 王在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2018. 6. 2.
[晉書]진수(陳壽) 열전 『진서』: 「진수 열전」 ▲둔황에서 발견된 『삼국지』 필사본 중 일부(진수가 쓴 원본이라는 의미가 아님) 陳壽字承祚, 巴西安漢人也. 少好學, 師事同郡譙周, 仕蜀爲觀閣令史. 宦人黃皓專弄威權, 大臣皆曲意附之, 壽獨不爲之屈, 由是屢被譴黜. 진수(陳壽)의 자는 승조(承祚)이며 파서(巴西) 안한(安漢)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같은 군(郡) 사람인 초주(譙周)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촉나라에 출사하여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黃皓)가 권세를 독차지해 제멋대로 휘두르니 대신들은 모두 뜻을 굽혀 그를 따랐으나 진수만은 유독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번 쫓겨났다. *貶議(폄의):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평가 遭父喪, 有疾, 使婢丸藥, 客往見之, 鄕黨以爲貶議. 及蜀平, 坐是沈.. 2018. 5. 23.
굴원 - 어부사(漁父辭) 어부사(漁父辭) 굴원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굴원이 쫓겨나 강과 연못에서 노닐어 호숫가에서 시를 읊으며 걷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용모는 파리했다.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뭇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으니 이 때문에 쫓겨난 것이오.”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어부가 말했다.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구애되지 않고 세상과 함께 변해 옮아갑니.. 2018. 5. 11.
A Well-organized but Deceptive Propaganda of Imperial Japan Dear Soldier: A Well-organized but Deceptive Propaganda of Imperial Japan May 11, 2018 The Japanese wartime era from 1937 to 1945 was unprecedentedly harsh for Koreans. This period was marked by violence and oppression of the colonial power. Although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had somewhat rested on compulsion and coercion since 1910, the wartime was far more abusive and vicious than the previ.. 2018. 5. 11.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이성시,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1. 머리말최근 십수 년 사이 발해사 연구는, 대체로 각 민족, 국가에 속하는 연구자의 특색 있는 문제 의식이 뚜렷하게 보이며 저마다 중요한 논점이 드러나 있다. 이에 1절에서는 연구들의 개요와 발해서 연구의 현상과 주요 논점을 거론하겠다. 2절에서는 박시형, 이우성 두 사람에 의해 제기된 ‘남북국 시대’론을 검토하고 한국사 체계 자체의 개편 기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3절에서는 남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 논점을 정리하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비판 ․ 검토하며, 4절에서는 ‘남북국 시대’론의 틀이 가진 문제점을 민족 ․ 국가관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 발해사 연구의 여러 양상 ① 태평양전쟁 패전 전의 일본태평.. 2018. 5. 8.
규장각 초계문신 연구 정옥자, 1981, 「규장각 초계문신 연구」, 『규장각』 4 1. 서론 鄭玉子의 논문 「奎章閣 抄啓文臣 硏究」는 규장각 연구의 일환으로 초계문신제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 글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연구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규장각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규장각의 문화적인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문물제도 정비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正祖의 정치적인 의도 하에 만들어진 정치적 기관으로 이해하는 방향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연구들이 규장각을 체계적 ・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규장각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인 초계문신제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규장각이 가진 복합적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규장각은 정조가 “繼志.. 2018. 5. 3.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 이태진, 2000, 「대한제국의 서울 황성 만들기-최초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이태진은 대한제국기 도시개조사업의 중요성에 주목한 김광우의 연구로 논의의 첫머리를 시작한다. 김광우는 한국 도시계획의 역사를 ‘시가지 경영의 시대’(1894~1936)와 ‘시가지 계획의 시대’(1936~)로 나누고, 다시 ‘시가지 경영의 시대’를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단계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치도론(治道論)을 제기했던 때부터 한성부가 치도사업을 진행했던 때까지이다. 두 번째 단계는 이토 히로부미의 도시시설 정책이 추진되던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경성시구개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이다. 김광우는 특히 첫 단계에 주목하면서, 도로정비ㆍ방사상 및 환상도로 부설ㆍ주요건물과 도로의 연결 등 이 시기 도시개조사업.. 2018. 5. 3.
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윤영인,「10-13세기 동북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에서의 책봉과 맹약」 (『동양사학연구』 101, 2007) 1. 논문의 문제의식 이 글에서 논문의 필자(이하 필자)는 ‘조공-책봉체제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漢族중심적 역사의 사상적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각 시대의 실제 상황을 간과하고 朝貢體制의 용어가 갖는 명목적, 이론적 의미를 그대로 역사의 실체로 확대, 해석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가 中華帝國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세계질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여러 대등한 국가들이 자국의 利害와 세력균형의 원리[力關係]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多國家體制” 혹은 “多元的 世界”야말로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宋은 “동등한 국가 중의.. 2018.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