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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자집/사서집주

[맹자] 양上-7. 근본으로 되돌아가십시오(齊桓晉文)

by 衍坡 2019. 8. 25.

양혜왕장구上 (7) : 제환진문(齊桓晉文)

 

 

 

 

 

齊宣王問曰: “齊桓晉文之事, 可得聞乎?”

제 선왕이 물었다.

“제 환공과 진 문공에 관한 일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齊宣王, 姓田氏, 名辟彊, 諸侯僭稱王也. 齊桓公晉文公, 皆霸諸侯者.

제 선왕은 성이 전씨(田氏)이고 명이 벽강(辟彊)이며, 제후로서 왕을 참칭하였다.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모두 제후들의 우두머리였던 사람들이다.

 

 

孟子對曰: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則王乎!”

맹자가 대답했다.

“중니(仲尼: 공자)의 문도에 환공과 문공에 관한 일을 말한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없는지라 신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고 하신다면 왕도(王道)에 관해 말해보겠습니다.”

 

道, 言也. 董子曰: “仲尼之門, 五尺童子, 羞稱五霸, 爲其先詐力而後仁義也.” 亦此意也. 以已通用. 無已, 必欲言之, 而不止也. 王, 謂王天下之道.

‘道’(도)는 말한다는 뜻이다. 동자(董子: 동중서)가 “중니의 문하에서는 어린 아이[五尺童子]도 오패(五霸)를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속임수와 무력을 앞세우고 인(仁)과 의(義)를 뒷전으로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역시 이 의미다. ‘以’(이)와 ‘已’(이)는 통용된다. ‘無已’(무이)는 반드시 말하고 싶어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王’(왕)은 왕천하의 도를 말한다.

 

 

曰: “德何如, 則可以王矣?” 曰: “保民而王, 莫之能禦也”

왕이 말했다. “덕(德)이 어떠하면 천하에 천하의 왕자(王者)가 될 수 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백성을 보호해서 천하의 왕자가 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保, 愛護也.

‘保’(보)는 사랑하여 보호한다는 뜻이다.

 

 

曰: “若寡人者, 可以保民乎哉?” 曰: “可.” 曰: “何由知吾可也?” 曰: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鐘.」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鐘與?」 曰: 「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 有諸?”

왕이 말했다.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어떤 이유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맹자가 답했다. “신이 호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왕께서 당상(堂上)에 앉아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하(堂下)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지요. 왕이 그것을 보더니 소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흔종(釁鐘)하는 데 쓰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 두어라. 소가 벌벌 떠는 것이 마치 죄 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는 것 같아서 내가 차마 용납할 수 없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흔종을 그만둘까요?」 왕은 이렇게 대답했지요. 「어떻게 그만두겠는가? [소를] 양으로 바꾸어라.」’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胡齕, 齊臣也. 釁鐘, 新鑄鐘成, 而殺牲取血, 以塗其釁郄也. 觳觫, 恐懼貌. 孟子述所聞胡齕之語, 而問王不知果有此事否.

‘胡齕’(호흘)은 제의 신하다. ‘釁鐘’(흔종)은 새로 종을 주조하여 완성되면 희생(犧牲)을 죽이고 피를 취해서 종의 틈 사이에 바르는 것이다. ‘觳觫’(곡속)은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다. 맹자는 자신이 들은 호흘의 말을 이야기하고 왕에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는가를 물은 것이다.

 

 

曰: “有之.” 曰: “是心足以王矣. 百姓皆以王爲愛也, 臣固知王之不忍也.”

왕이 말했다. “있었습니다.”

맹자가 답했다. “이 마음이라면 천하에 왕노릇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다들 왕이 인색하다고 하겠지만 신은 진실로 왕께서 [소가 벌벌 떠는 것을] 차마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王見牛之觳觫, 而不忍殺, 卽所謂惻隱之心, 仁之端也. 擴而充之, 則可以保四海矣. 故孟子指而言之, 欲王察識於此, 而擴充之也. 愛猶吝也.

왕이 벌벌 떠는 소를 보고 차마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넓히고 채울 수 있다면 온 세상[四海]를 보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맹자가 그 마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은 이 점에 관해 살피고 인식해서 그 마음을 넓히고 채워나가기를 바란 것이다. ‘愛’(애)는 인색하다는 뜻이다.

 

 

王曰: “然, 誠有百姓者. 齊國雖褊小, 吾何愛一牛? 卽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故以羊易之也.”

왕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런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비록 좁고 작지만 내가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다만 그 소가 마치 죄 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는 것처럼 벌벌 떠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서 양으로 그것을 바꾼 것입니다.”

 

言以羊易牛, 其迹似吝, 實有如百姓所譏者, 然我之心不如是也.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은 그 행적이 인색한 것처럼 보여서 실로 백성 중에 비난하는 자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曰: “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 以小易大, 彼惡知之? 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 則牛羊何擇焉?” 王笑曰: “是誠何心哉! 我非愛其財而易之以羊也. 宜乎! 百姓之謂我愛也.”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백성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꾼 뜻을 저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왕께서 만일 그 소가 죄 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어째서 소와 양을 구별하셨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정말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내가 나의 재물을 아껴서 그것을 양으로 바꾼 것은 아니지마는, 그렇게 보면 백성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구나!”

 

異, 怪也. 隱, 痛也. 擇, 猶分也. 言牛羊皆無罪而死, 何所分別, 而以羊易牛乎? 孟子故設此難, 欲王反求而得其本心, 王不能然, 故卒無以自解於百姓之言也.

‘異’(이)는 기괴하다는 뜻이다. ‘隱’(은)은 마음 아파한다는 뜻이다. ‘擇’(택)은 분별한다는 뜻이다. ‘소든 양이든 모두 죄 없이 죽게 되는데 무엇을 가지고 둘을 구별하여 소를 양으로 바꾸었느냐’고 한 것이다. 맹자가 의도적으로 이 비난을 가정한 것은 왕이 스스로 돌이키고 자신에게 추구하여 자신의 본연한 마음을 얻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못하여 끝내 백성들이 비난하는 말에 스스로 해명할 수 없었다.

 

 

曰: “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 不忍見其死, 聞其聲, 不忍食其肉. 是以君子遠庖廚也.”

맹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곧 인(仁)을 행하는 방법입니다. [소와 양을 구별한 이유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君子)가 짐승을 대했을 때 짐승이 살아있는 것을 보거든 그것이 죽어가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합니다. 짐승이 죽음을 앞두고 슬피 우는 소리를 듣거든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無傷, 言雖有百姓之言, 不爲害也. 術, 謂法之巧者. 蓋殺牛旣所不忍, 釁鐘又不可廢, 於此無以處之, 則此心雖發, 而終不得施矣. 然見牛則此心已發而不可遏, 未見羊則其理未形而無所妨, 故以羊易牛, 則二者得以兩全而無害. 此所以爲仁之術也. 聲謂將死而哀鳴也. 蓋人之於禽獸, 同生而異類, 故用之以禮, 而不忍之心, 施於見聞之所及, 其所以必遠庖廚者, 亦以預養是心, 而廣爲仁之術也.

‘無傷’(무상)은 비록 백성이 비난하는 말이 있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術’(술)은 기교한 방법을 말한다. 소를 죽이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흔종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 마음[惻隱之心]이 발동하더라도 끝내 베풀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소를 보았기에 마음이 이미 발동하여 막을 수 없고, 양은 아직 보지 못했기에 그의 이(理)가 아직 형체를 드러내지 않아 방해받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소를 양으로 바꾼다면 두 가지가 모두 보존되고 해로움이 없게 된다. 그래서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은 [소를 살려주고 흔종도 진행하는] 두 가지가 모두 온전해져 해로움이 없다.

 

 

王說曰: “詩云: 「他人有心, 予忖度之.」 夫子之謂也. 夫我乃行之, 反而求之, 不得吾心, 夫子言之, 於我心有戚戚焉. 此心之所以合於王者, 何也?”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시경』에 ‘다른 사람이 품은 마음을 내가 헤아린다’고 했는데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돌이켜 추구해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니 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 마음[惻隱之心]이 천하에 왕노릇 하는 데 부합하는 이유는 어째서입니까?”

 

詩, 小雅巧言之篇. 戚戚, 心動貌. 王因孟子之言, 而前日之心復萌, 乃知此心不從外得. 然猶未知所以反其本而推之也.

[제선왕이 인용한] 시는 소아(小雅) 교언(巧言)편에 나온다. ‘戚戚’(척척)은 마음이 뭉클한 모양이다. 왕은 맹자의 말을 통해 전날의 마음이 다시 싹트자 그제야 이 마음이 바깥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근본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확장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曰: “有復於王者曰: ‘吾力足以擧百鈞, 而不足以擧一羽, 明足以察秋毫之末, 而不見輿薪’, 則王許之乎?” 曰: “否.”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然則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맹자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저는 힘이 100균(鈞)을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시력은 가는 털끝을 살펴볼 수 있지만 수레에 실린 섶은 보지 못합니다’고 한다면 왕은 그 말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은택(恩澤)이 짐승에게 이르지만 공(功)이 백성에게 이르지 못하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 그렇다면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린 섶을 볼 수 없는 것은 시력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택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천하에 왕노릇하지 못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復, 白也. 鈞, 三十斤, 百鈞, 至重, 難擧也. 羽, 鳥羽, 一羽, 至輕, 易擧也. 秋毫之末, 毛至秋而末銳, 小而難見也. 輿薪, 以車載薪, 大而易見也. 許, 猶可也. 今恩以下, 又孟子之言也. 蓋天地之性, 人爲貴, 故人之與人, 又爲同類而相親. 是以惻隱之發, 則於民切, 而於物緩. 推廣仁術, 則仁民易, 而愛物難. 今王此心能及物矣, 則其保民而王, 非不能也, 但自不肯爲耳.

‘復’(복)은 아뢴다는 뜻이다. ‘鈞’(균)은 30근이다. 100균은 매우 무거워서 들기 어려운 것이다. ‘羽’(우)는 새의 깃털이다. 깃털 하나는 매우 가벼워서 들기 쉬운 것이다. ‘秋毫之末’(추호지말)은 가을이 되어 털끝이 날카로워진 것인데, 작아서 보기 어렵다. ‘輿薪’(여신)은 수레로 섶을 실은 것이니 커서 보기가 쉽다. ‘許’(허)는 ‘可’[된다]와 같다. ‘今恩’(금은) 이하는 다시 맹자의 말이다. 천지(天地)의 본성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은 부류가 되어 서로 가까이 한다. 이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면 백성에게 절실하고 사물에게는 느슨하다. 인을 행하는 방법을 확장하여 넓히면 백성을 사랑하기는 쉽고 사물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왕의 이 마음[惻隱之心]이 사물에 이르렀다면 그가 백성을 보호하여 천하에 왕노릇하는 것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자신이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曰: “不爲者, 與不能者之形, 何以異?” 曰: “挾太山以超北海, 語人曰: ‘我不能.’ 是誠不能也. 爲長者折枝, 語人曰: ‘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 故王之不王, 非挾太山以超北海之類也. 王之不王, 是折枝之類也.

왕이 말했다.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맹자가 말했다.

“태산(太山)을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는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른을 위해서 나뭇가지를 꺾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는 못한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천하에 왕노릇하지 못하는 것은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류가 아닙니다. 왕께서 천하에 왕노릇하지 못하는 것은 가지를 꺾는 류에 해당합니다.

 

形, 狀也. 挾, 以腋持物也. 超, 躍而過也. 爲長者折枝, 以長者之命, 折草木之枝, 言不難也. 是心固有, 不待外求, 擴而充之, 在我而已, 何難之有?

‘形’(형)은 형상이라는 뜻이다. ‘挾’(협)은 겨드랑이로 사물을 잡는 것이다. ‘超’(초)는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爲長者折枝’[어른을 위해 가지를 꺽는다]는 어른의 지시로 초목의 가지를 꺾는 것으로 어렵지 않음을 말한다. 이 마음[惻隱之心]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 바깥에서 구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니, 이 마음을 넓히고 채우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 詩云: 「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 言擧斯心, 加諸彼而已. 故推恩足以保四海, 不推恩無以保妻子. 古之人所以大過人者, 無他焉, 善推其所爲而已矣.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여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의 노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나의 아이를 아이로 사랑하여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하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그 덕화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이 마음을 들어서 저쪽에 베풀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온 세상을 보호할 수 있고, 은혜를 확장해 나갈 수 없다면 처자식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실천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해 나가는 것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老, 以老事之也. 吾老, 謂我之父兄, 人之老, 謂人之父兄. 幼, 以幼畜之也. 吾幼, 謂我之子弟, 人之幼, 謂人之子弟. 運於掌, 言易也. 詩, 大雅思齊之篇. 刑, 法也. 寡妻, 寡德之妻, 謙辭也. 御, 治也. 不能推恩, 則衆叛親離, 故無以保妻子. 蓋骨肉之親, 本同一氣, 又非但若人之同類而已. 故古人必由親親推之然後, 及於仁民, 又推其餘然後, 及於愛物, 皆由近以及遠, 自易以及難. 今王反之, 則必有故矣. 故復推本而再問之.

‘老’(노)는 노인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吾老’[나의 노인]은 나의 부형(父兄)을 말하고, ‘人之老’[남의 노인]은 남의 부형을 말한다. ‘幼’(유)는 아이로 대우하여 길러준다는 뜻이다. ‘吾幼’[나의 아이]는 나의 자제(子弟)를 말하고, ‘人之幼’[남의 아이]는 남의 자제를 말한다. ‘運於掌’[손바닥에 놓고 움직인다]는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맹자가 인용한] 시는 대아(大雅) 사제(思齊) 편에 나온다. ‘刑’(형)은 본보기가 된다는 뜻이다. ‘寡妻’(과처)는 덕이 적은 사람의 아내라는 뜻으로 겸사(謙辭)다. ‘御’(어)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은혜를 확장해 나가지 못하면 백성이 배반하고 친족이 떠나가므로 처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 골육(骨肉)을 나눈 친족[骨肉之親]은 본래 한 가지 기(氣)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동류(同類)와 같을 뿐만은 아니다.(골육 간의 정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친밀함보다 훨씬 각별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부모[親]를 가까이하는 데서부터 확장해 나간 뒤에 백성을 사랑하는 데 이르렀고, 또다시 [그 마음을] 그 나머지에게 미루어 나간 뒤에 사물을 사랑하는 데 이르렀다. 모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고,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 것에 이른 것이다. 지금 왕은 그것을 거꾸로 하니 틀림없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근본으로 밀고 나가 다시 물은 것이다.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王請度之!

저울로 재어본 뒤에야 경중(輕重)을 가릴 수 있고, 자로 재어본 뒤에야 장단(長短)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물은 모두 그렇지만, 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왕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權, 稱錘也. 度, 丈尺也. 度之, 謂稱量之也. 言物之輕重長短, 人所難齊, 必以權度度之而後可見. 若心之應物, 則其輕重長短之難齊, 而不可不度以本然之權度, 又有甚於物者. 今王恩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 是其愛物之心重且長, 而仁民之心輕且短, 失其當然之序, 而不自知也. 故上文旣發其端, 而於此請王度之也.

‘權’(권)은 저울추를 일컫는다. ‘度’(도)는 장척(丈尺)이다. ‘度之’(탁지)는 저울질하여 재어보는 것이다. 사물의 무게[輕重]와 길이[長短]는 사람이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반드시 저울과 자로 재어본 뒤에야 알 수 있다. 사물에 대응하는 마음은 그 무게와 길이가 분별하기 어려워 본연(本然)의 저울과 자로 재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사물보다도 더욱 그런 면이 있다. 왕의 은혜는 짐승에게 미쳤지만 공로는 백성에게 이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겁고 길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볍고 짧은 것이니 마땅히 그래야만[當然] 하는 순서에서 벗어나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윗글에서 그 단서를 드러내고 여기에서 왕에게 헤아려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抑王興甲兵, 危士臣, 構怨於諸侯然後, 快於心與?”

아니면 왕께서는 군대[甲兵]를 일으켜 병사와 신하를 위태롭게 만들고 제후들과 원한을 맺은 뒤에야 마음이 통쾌하시겠습니까?”

 

抑, 發語辭. 士, 戰士也. 構, 結也. 孟子以王愛民之心所以輕且短者, 必其以是三者爲快也. 然三事實非人心之所快, 有甚於殺觳觫之牛者. 故指以問王, 欲其以此而度之也.

‘抑’(억)은 발어사다. ‘士’(사)는 군사다. ‘構’(구)는 맺는다는 뜻이다. 맹자는 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볍고 짧은 이유가 분명히 이 세 가지를 통쾌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가지 일은 실로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니, 벌벌 떠는 소를 죽이는 것보다 심각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여 왕에게 질문하였으니, 그가 이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기를 바랐다. 

 

 

王曰: “否. 吾何快於是? 將以求吾所大欲也.”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통쾌하게 여기겠습니까? 내가 크게 바라는 것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不快於此者, 心之正也, 而必爲此者, 欲誘之也. 欲之所誘者, 獨在於是. 是以其心尙明於他, 而獨暗於此. 此其愛民之心所以輕短, 而功不至於百姓也.

이것들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마음의 올바름이다. 그렇지만 꼭 이런 짓들을 하는 것은 욕심이 그를 꾀어냈기 때문이다. 욕심이 꾀어낸 것이 유독 이런 일들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오히려 다른 것들에서 밝혀지고 유독 여기에는 어두웠다. 이것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볍고 짧으며 백성에게 공효(功效)가 이르지 않은 이유다.

 

 

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采色不足視於目與? 聲音不足聽於耳與? 便嬖不足使令於前與? 王之諸臣皆足以供之, 而王豈爲是哉?” 曰: “否. 吾不爲是也.” 曰: “然則王之所大欲可知已. 欲辟土地, 朝秦楚, 莅中國, 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 크게 하려고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맹자가 말했다.

“기름지고 단 음식이 입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가볍고 따뜻한 옷이 몸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화려한 색채[采色]가 눈으로 보기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음악[聲音]이 귀로 듣기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총애하는 신하[便嬖]가 앞에서 부리기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왕의 신하들이 모두 그것을 바칠 수 있는데, 왕께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러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크게 하려고 하시는 일을 알 만 합니다. 국토를 넓히시고 진(秦)ㆍ초(楚)에게 조회를 받으며, 중국(中國)에 군림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제압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일(전쟁)을 행하여 그와 같은 소원을 추구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便嬖, 近習嬖幸之人也. 已, 語助辭. 辟, 開廣也. 朝, 致其來朝也. 秦楚, 皆大國. 莅, 臨也. 若, 如此也. 所爲, 指興兵結怨之事. 緣木求魚, 言必不可得.

‘便嬖’(편폐)는 군주가 가까이 하여 총애하는 사람을 말한다. ‘已’(이)는 어조사다. ‘辟’(벽)은 땅을 개척하여 넓히는 것이다. ‘朝’(조)는 와서 조회하게 하는 것이다. 진(秦)과 초(楚)는 모두 큰 나라다. ‘莅’(이)는 군림한다는 뜻이다. ‘若’(약)은 ‘이와 같음’이라는 뜻이다. ‘所爲’(소위)는 군대를 일으켜 원한을 맺는 일을 가리킨다. ‘緣木求魚’(연목구어)는 반드시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한다.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以若所爲, 求若所欲, 盡心力而爲之, 後必有災.” 曰: “可得聞與?” 曰: “鄒人與楚人戰, 則王以爲孰勝?” 曰: “楚人勝.” 曰: “然則小固不可以敵大, 寡固不可以敵衆, 弱固不可以敵彊. 海內之地, 方千里者九, 齊集有其一, 以一服八, 何以異於鄒敵楚哉! 蓋亦反其本矣.

왕이 말했다. “이와 같이 어렵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그보다 더 어렵울 것입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비록 물고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뒤따르는 재앙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일(왕이 하려는 일)을 하여 그와 같은 소원(패권에 대한 왕의 갈망)을 추구하면 마음과 힘을 다해서 행하더라도 뒤에 틀림없이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에 관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추나라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왕은 누가 이기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초나라 사람들이 이길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는 실로 큰 나라를 대적할 수 없고, 소수는 실로 다수를 대적할 수 없으며, 약한 자는 실로 강한 자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중국[海內] 땅에 사방이 천리인 나라가 아홉인데, 제(齊)는 땅을 모두 합하면 그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여덟을 복종시키려 한다면 추나라가 초나라에 대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殆蓋, 皆發語辭. 鄒, 小國, 楚, 大國. 齊集有其一, 言集合齊地, 其方千里, 是有天下九分之一也. 以一服八, 必不能勝, 所謂後災也. 反本, 說見下文.

‘殆’(태)와 ‘蓋’(개)는 모두 발어사다. 추(鄒)는 작은 나라고, 초(楚)는 큰 나라다. ‘齊集有其一’[제는 땅을 모으면 그중 하나를 차지한다]은 ‘제나라의 땅을 모아서 합하면 거의 사방 천리이니 천하의 1/9을 차지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以一服八’[하나로 여덟을 복속시킨다]는 반드시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니 ‘뒤따르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反本’[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설명이 아랫글에 보인다.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皆欲立於王之朝, 耕者皆欲耕於王之野, 商賈皆欲藏於王之市, 行旅皆欲出於王之塗, 天下之欲疾其君者皆欲赴愬於王, 其若是孰能禦之?”

왕께서 정치를 펼쳐 인(仁)을 베푸셔서 온 세상의 벼슬하는 자들이 왕의 조정에 서기를 바라게 하신다면, 농사짓는 자들이 모두 왕의 들판에서 농사짓기를 바라게 하신다면, 상인들이 모두 왕의 시장에서 물건을 보관하기를 바라게 하신다면, 나그네들이 모두 왕의 길로 나서기를 바라게 하신다면, 온 세상에 자신의 임금을 증오하는 자들이 왕에게 달려가 하소연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行貨曰商, 居貨曰賈. 發政施仁, 所以王天下之本也. 近者悅, 遠者來, 則大小强弱, 非所論矣蓋. 力求所欲, 則所欲者, 反不可得, 能反其本, 則所欲者, 不求而至, 與首章意同.

돌아다니며 물건을 공급하는 것을 ‘商’(상)이라 하고, 일정한 곳에 머무르며 물건을 공급하는 것을 ‘賈’(고)라고 한다. 정치를 펼쳐 인을 행하는 것은 천하에 왕노릇을 하는 근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먼곳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면 크고 작음이나 강하고 약함은 논할 것이 아니다. 바라는 것을 힘으로 추구한다면 바라는 것은 도리어 얻지 못할 것이고, 근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바라는 것은 구하지 않아도 이르게 될 것이니 수장(首章)과 의미가 같다.

 

 

王曰: “吾惛, 不能進於是矣. 願夫子輔吾志, 明以敎我, 我雖不敏, 請嘗試之.” 曰: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辟邪侈, 無不爲已. 及陷於罪然後, 從而刑之, 是罔民也. 焉有仁人在位, 罔民而可爲也?

왕이 말했다.

“나는 어리석어서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내 뜻을 보필하여 가르침으로 나를 일깨워주십시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시도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일정한 생업[恒産]이 없이도 항심(恒心: 사람이 항상 지니는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사(士)만이 할 수 있습니다. 백성으로 말한자면 일정한 생업이 없어지면 그에 따라서 항심도 없어집니다. 항심이 없어지면 제멋대로 행동하고 악행을 일삼고 다녀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됩니다. [백성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뒤에 그에 따라 처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恒, 常也. 産, 生業也. 恒産, 可常生之業也. 恒心, 人所常有之善心也. 士嘗學問知義理, 故雖無常産而有常心, 民則不能然矣. 罔, 猶羅網, 欺其不見而取之也.

‘恒’(항)은 일정하다는 뜻이다. ‘産’(산)은 생업이다. ‘恒産’(항산)은 삶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생업을 말한다. ‘恒心’(항심)은 사람이 항상 가지는 선한 마음이다. 사(士)는 학문을 하여 의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항심을 가진다. 백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罔’(망)은 ‘羅網’[그물]과 같다. 드러나지 않은 것을 속여서 취하는 것이다.

 

 

是故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然後, 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어 반드시 그들이 위로는 부모를 모실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기를 수 있게 합니다. 풍년에는 일년 내내 몸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런 뒤에 그들을 이끌어 선(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들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쉬운 것입니다.

  

輕, 猶易也. 此言民有常産而有常心也.

‘輕’(경)은 ‘易’[쉽다]와 같다. 이것은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항심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今也制民之産, 仰不足以事父母, 俯不足以畜妻子, 樂歲終身苦, 凶年不免於死亡. 此惟救死而恐不贍, 奚暇治禮義哉!

지금은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어도 위로는 부모를 모실 수 없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기를 수 없습니다. 풍년에는 일년 내내 몸이 고달프고 흉년에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죽음에서 벗어나기에도 힘이 모자랄까 걱정하는 것이니 어느 틈에 예의(禮義)를 익히겠습니까?

 

贍, 足也. 此所謂無常産而無常心者也.

‘贍’(섬)은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王欲行之, 則盍反其本矣?

왕께서 [왕도를] 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으십니까?

 

盍, 何不也. 使民有常産者, 又發政施仁之本也. 說具下文.

‘盍’(합)은 어째서 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백성이 일정한 생업을 가지게 하는 것 또한 정치를 행하여 인을 베푸는 것의 근본이다. 해설은 아래의 글에 갖춰져있다.

 

 

五畝之宅, 樹之以桑, 五十者可以衣帛矣. 雞豚狗彘之畜, 無失其時, 七十者可以食肉矣. 百畝之田, 勿奪其時, 八口之家, 可以無飢矣. 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 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5묘의 택지에 뽕나무를 심어준다면 50세가 된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가축[雞豚狗彘]를 기르는 일에 번식할 때를 놓치지 않게 한다면 70세 된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100묘의 밭에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가 사는 집[八口之家]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서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행하고 효제(孝悌)의 뜻을 거듭 실천하게 한다면 노인[頒白者]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도 천하에 왕노릇하지 못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此言制民之産之法也. 趙氏曰: “八口之家, 次上農夫也. 此王政之本, 常生之道. 故孟子爲齊梁之君, 各陳之也.” 楊氏曰: “爲天下者, 擧斯心, 加諸彼而已. 然雖有仁心仁聞, 而民不被其澤者, 不行先王之道故也. 故以制民之産告之.

이것은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조씨[趙岐]가 말했다. “여덟 식구가 사는 집은 상농부(上農夫) 다음이다. [맹자가 말한] 이 방법은 왕정의 근본이고 생계를 일정하게 유지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맹자는 제(齊)와 양(梁: 위나라)의 군주에게 각기 그것을 이야기 한 것이다.”

*상농부(上農夫): 고대에는 작물을 파종하는 조건이 비교적 좋고 수익도 비교적 많은 농부를 ‘상농부’라고 지칭했다.

양씨[楊時]가 말했다.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이 마음[惻隱之心]을 들어서 저쪽에 베푸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비록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평판이 있었더라도 백성이 그가 베푸는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은 선왕의 도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는 것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此章言人君當黜霸功行王道, 而王道之要不過推其不忍之心, 以行不忍之政而已. 齊王非無此心, 而奪於功利之私, 不能擴充以行仁政. 雖以孟子反覆曉告, 精切如此, 而蔽固已深, 終不能悟, 是可歎也.

이 장은 ‘군주가 패도(霸道)의 공를 내버리고 왕도를 행해야만 하며, 왕도의 핵심은 [남의 고통을] 차마 용납할 수 없는 마음[不忍之心]을 확장하여 [남의 고통을] 용납할 수 없는 정치[不忍之政]를 행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제나라 왕은 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리(功利)를 추구하는 사사로움에 빼앗겨서 그것을 인정(仁政)을 행하는 데로 확충하지 못했다. 맹자가 반복하여 깨우치고 말해주는 것이 이처럼 정밀하고 간절했으나, [공리를 추구하는 사사로움으로 생겨난] 폐단이 진실로 깊었기 때문에 끝내 깨닫지 못했으니 탄식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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