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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71

『흥부전』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의 빈부 차별 『흥부전』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의 빈부 차별 - 흥부ㆍ놀부 인식의 변화와 빈부 차별의 존재 양상 - 2019.06.24 1. 머리말 2. 『흥부전』에 보이는 가난의 실상과 빈부 차별 (1) 흥부가 경험한 가난의 현실 (2) 작품 속의 빈부 차별 사례 3. 흥부ㆍ놀부의 위상 변화와 빈부 차별 (1) 조선 시대의 흥부ㆍ놀부 인식: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2) 현대인의 흥부ㆍ놀부 인식: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뒤바뀐 주인공의 위상 4. 맺음말 1. 머리말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일자리와 소득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양섭취와 주거환경, 교육수준 등 모든 영역에서 빈부에 따른 격차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날로 심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확실히 한국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2019. 6. 30.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2019.05.28 ▲공민왕 부부 초상화 몽골(원)은 1351년 충정왕을 폐위하고 몽골에 머무르던 왕기(王祺)를 새로 고려의 국왕으로 임명했다. 몽골(원)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이 폐위되거나 즉위하는 사례는 몽골 복속기 내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만큼 공민왕의 즉위 과정 자체가 특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점에도 몽골(원)이 고려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몽골(원)이 공민왕 초반에도 고려의 국정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원)은 아주 손쉽게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에 관철했다. 1354년(공민왕 3) 당시 몽골(원)은 장강 이.. 2019. 5. 28.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65 ) 2019.05.04 ○ 총론: 지금껏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반원’의 개념이 그리 엄밀하지 않다는 점, 고려후기 지배층이 매우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에서 국내정치의 맥락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유익했다. 다만 ‘반원’이라는 틀을 배제하고 공민왕의 개혁을 분석하다보니 몽골(원)이라는 변수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공민왕이 ‘세조구제’를 회복ㆍ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원)은 여전히 고려의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몽골(원)이 매우 수동적.. 2019. 5. 4.
김정희 -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김정희(金正喜) 漢書河間獻王傳云: “實事求是.” 此語乃學問最要之道. 若不實以事而但以空疎之術爲便, 不求其是而但以先入之言爲主, 其于聖賢之道, 未有不背而馳者矣. 『한서』의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옳은 것을 추구한다”[實事求是]고 했다. 이 말은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도리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서 그저 내용 없고 조잡한 방법을 편안하게 여기고 옳은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입견[先入之言]을 주관으로 삼으면, 성현(聖賢)의 도에 배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漢儒于經傳訓詁, 皆有師承, 備極精實. 至于性道仁義等事, 因爾時人人皆知, 無庸深論, 故不多加推明. 然偶有注釋, 未甞不實事求是也. 自晉人講老莊虛無之學, 便于惰學空疎之人, 而學術一變, 至佛道大行而禪機所.. 2019. 3. 11.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최성환, 2016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 『역사비평』 115 ) ●總結: 저자는 정조 개인에 대한 평가로 정조 시대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정조 시대를 ‘근대의 전사(前史)’로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경향을 비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문제제기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의 서술이 지나치게 거칠거나 피상적이라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저자가 글 안에 제시한 설명 중 많은 부분이 치밀한 논증을 요한다. 그러나 이 글만 놓고 본다면, 저자의 주장이 글 안에서 충분히 논증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아쉽다. 근래 임오화변에 대한 설명에서 당쟁의 요인을 부각시키는 것이 구태의연한 시각인 것처럼 되었다. 임오화변은 당.. 2018. 9. 15.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이완용이 유자광을 사면했을까? 2018.04.03 유자광은 조선시대 내내 '간신'(奸臣)으로 기억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출세해서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해친 흉악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유자광의 삶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비판이 꼭 불합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는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풀었고, 연산군 재위 내내 왕의 비위를 맞추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가담해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유자광의 부귀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은 여기저기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벼슬과 공신 작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 1512년(중종 7).. 2018. 4. 27.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여운형을 바라보는 시선들 : 민족주의자 VS 친일파 몽양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ㆍ중국ㆍ미국ㆍ소련 등 다양한 외부세력과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이 점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소련과 미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그 모두와 폭넓게 교류했던 여운형의 행보는 분명히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었다.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미군정과 한국 우익 세력은 그를 공산주의자ㆍ친일파 등으로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좌익 세력은 여운형이 친미앞잡이이자 기회주의.. 2018. 4. 23.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현상윤의 조선 유학사 재해석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1. 서론 현상윤(1893~1950)은 한국 유학사 연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근대적 학문방법론에 입각해 『조선유학사』(1948)를 저술함으로써 해방 이후 한국 유학사 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해방 이후 조선 유학사 연구의 전체 틀은 이미 그의 『조선유학사』에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그런 점에서 현상윤을 “조선유학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각주:2] 하지만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 제시한 유학사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조선유학사』에 담긴 그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상윤의 유학관(儒學觀)은 전통 한학과 근대 학문을 접.. 2018. 4. 22.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우남 이승만 연구』 를 읽고- 2015.06. 자유민주주의의 영웅 vs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건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인가?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이를 둘러싸고 지난 수십 년 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한편에서는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가한다. 이런 양극단의 평가는 종종 극단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2006년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4.19혁명 희생자 유족들 간의 충돌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이고, 한국 사회의 갈등의 중심에 서.. 2018. 4. 20.
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이태진 교수의 ‘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자연현상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자연현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둔 몇몇 역사가들은 이 질문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사 연구에서 그러한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태진일 것이다. 논문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의 서두에서 그는 서양 사학계의 소빙기 연구 방법론을 이용해 한국사를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역사 연구가 인간의 삶과 의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자연과 과학이라는 중요한 변수를 역사 연구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외계충격설’로 불리는 그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한정적.. 2018.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