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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71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2019.12.05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元)과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가와 ‘부원세력’을 일시에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아울러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의 지역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의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가 지닌 패를 회수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의 계획 아래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반원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전격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각주:1] ‘반원운동’을 고려의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종합적으.. 2019. 12. 6.
권근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지문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지문」 권근(權近) 天下至廣也. 內自中國, 外薄四海, 不知其幾千萬里也, 約而圖之於數尺之幅, 其致詳難矣. 故爲圖者率皆踈略.천하(天下)는 매우 넓다. 안으로는 중국(中國)에서 바깥으로는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 알 수 없는데, 몇 자 되는 폭(暴)에다 줄여서 그리자니 자세한 내용을 다 담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것이 대개는 소략하다. 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圖頗爲詳備, 而歷代帝王國都沿革, 則天台僧淸濬混一疆理圖備載焉. 오문(吳門) 사람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만이 매우 상세한 내용을 갖추었고,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 연혁은 천태종 승려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실려있다. 建文四年夏, 左政丞上洛金公士衡,右政丞丹陽李公.. 2019. 9. 28.
[소지]1717년 안세휘 공인권 이록 요청 소지 1717년 安世徽 貢人權 移錄 요청 所志 本庫貢物主人安世徽。 본고(本庫: 장흥고)의 공물주인(貢物主人) 안세휘가 올린 소지 右謹陳所志矣段。 矣身丁丑年分。 同貢物主人金時達處。 湖西六月令所封供上紙。 半令貢物乙。 給價買得爲白有置。 依他例移錄事。 行下爲白只爲。 行下向敎是事。 삼가 소지를 올립니다. 저[矣身]는 정축년(1697) 즈음에 공물주인 김시달(金時達)로부터 호서에서 6월에 바쳐야 할 공상지(供上紙)에서 공물 절반을 [진상할 수 있는 권한을] 값을 주고 매득하였습니다. 다른 예에 의거하여 [공안(貢案)의 공인 명부를 김시달에서 본인으로] 바꾸어 적는 일을 분부하도록 처분해주십시오. *矣段(의딴): 이것은, 이것인즉 *矣身(의신): 이 몸, 저 *貢物主人(공물주인) : 공인(貢人)을 가리킴 *月令(월령) :.. 2019. 9. 26.
[단자]1866년 백종수 원납전단자 1866년 백종수白宗洙 원납전단자願納錢單子 單子단자 景福宮營建時。 再願納錢伍兩。 경복궁을 영건할 때 재(再) 원납전 5냥을 납부함 丙寅 正月 日 新平 白宗洙병인년(1866) 정월 일 신평(新平: 전라도 임실 신평면) 백종수 [수령의 답변]如是殫竭。 極爲嘉尙事。이와 같이 남김없이 다 내어주니 지극히 가상한 일이다. 卄十七27일 2019. 9. 26.
[소지]1699년 이동표의 종 분선이 올린 소지 1699년(숙종 25) 이동표의 종 분선이 올린 소지(所志)[소장처: 최승희 선생님] □□□□□李東標奴粉先 (左寸)□□□□□이동표의 노비 분선이 올린 소지 (분선의 수촌) *□□□□□: 이동표 집안에서 다섯 글자를 오려내어 알 수 없는 글자*左寸: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와 둘째 마디 사이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직접 송장을 접수하기보다는 노비를 대리인으로 세워 송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노비들은 서명을 할 때 자신의 좌촌 길이를 재어 그려넣었다.*이하 이두는 밑줄을 쳐둔다. 右謹言所志矣段。矣上典亦年前占得一穴於春陽面於老洞矣內上典墳山局內不遠之地。삼가 소지(所志)를 말씀드립니다. 저의 상전은 몇 해 전에 춘양면(春陽面) 어로동(於老洞)에 있는 안상전 분산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묫자리를 .. 2019. 9. 26.
[준호구]1750년 임동빈 준호구 1750년 임동빈 준호구(소장: 규장각) 乾隆十五年 月 日 漢城府건륭 15년(1750) 월 일 한성부에서 발급한 준호구다. 考庚午成籍戸口帳内경오년(1750)에 작성[成籍]한 호구대장을 살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部俊秀坊舊司圃署契第 統第 戸住嘉義大夫行龍驤衛副護軍林東彬年六十辛未生本扶安북부 준수방(俊秀坊) 옛 사포서계(司圃署契) 제○통 제○호에 거주하는 가의대부(嘉義大夫)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임동빈(林東彬)은 나이가 60세이고 신미년(1691)에 출생했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夏蕃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하번(夏蕃)이다. 祖通德郎震格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진격(震格)이다. 曾祖老職通政大夫仁榮증조부는 노직(老職)으로 통정대.. 2019. 9. 10.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 ‘성리학’과 ‘사대부’ 개념의 문제 - 2019.09.06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의 영정.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해 왔다. 신흥사대부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주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견해를 검토하여 기존 연구의 시각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우선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주장이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 살펴보자... 2019. 9. 6.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2019.06.28 1. 머리말 2. 문체반정과 정조의 군주권 3. 선행 연구에 묘사된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4. 절대적 군주권의 실상과 ‘마키아벨리즘’ 문제 5. 맺음말 1. 머리말 아마도 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시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탐구된 정조 시대는 그간 ‘개혁의 시대’ 혹은 ‘왕조의 중흥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조 개인의 위상도 그에 걸맞게 변화하여 ‘개혁군주’나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무능하고 나약한 군주의 이미지를 대신했다.[각주:1] 이 재평가는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정치사를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이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조 시대를 향한 관심.. 2019. 7. 5.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 ‘종법’과 ‘가부장제’의 개념 문제에 관한 검토 - 2019.06.28 1. 조선의 가족질서 변화를 보는 시선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가족질서는 17세기를 기준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본다. 고려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15~16세기에 양측적 친속체계가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종법 질서가 확산하면서 부계 친족 중심의 가족질서가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를 기점으로 가족질서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많다.[각주:1]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이 출생 순서대로 족보에 기재했다. 친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족보에 싣기도 했다. 재산 상속이나 제사 문제에서도 아들과 딸을 구.. 2019. 7. 1.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2019.06.22 1. 머리말 2. 즉위 직후의 정치적 동향과 호종 신료의 분열 3.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의 정치적 관계 4. 부원세력 제거와 측근세력의 결집 5. 맺음말 1. 머리말 공민왕 대(1351~1374)의 고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변화와 위기를 마주했다. 대외적으로는 원(元)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한편 장강 이남에서 홍건적 등의 반원세력(反元勢力)이 봉기했다. 고려가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배경에는 그런 국제질서의 변동이 있었다. 국내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원과 결탁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전횡과 지배계층의 대민수탈은 고려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심각했다. 공민왕 대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변화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들을.. 2019.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