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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록/독서노트

「‘관음충’의 발생학」에 관한 단상

by 衍坡 2021. 8. 20.

「‘관음충’의 발생학」에 관한 단상

2021.08.20.



아주 우연히, 재작년에 나온 논문 한 편이 지금껏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는 것을 알았다.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이라는 아주 화려한 이름을 지닌 논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글이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는지 궁금해서 논문을 찾아 읽었다. 대충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이 글은 논문인가?


윤지선 논문의 서론은 정말로 화려하게 보이지만, 정작 하려는 작업은 아주 단순하다. 어린 한국 남성이 어떻게 ‘남성성’을 체득하고 디지털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조건 내에서 한국 남아들은 남성적이며 공격적 행동의 반복적 패턴들을 또래집단 놀이나 미디어 학습을 통해 모사하고 상호참조함으로써 관음충 군집체로 생장해나간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장만 한다고 해서 모든 논문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해당 현상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저자 본인의 주장을 논증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 논문은 그렇지 않다. 글을 읽으면서 납득하기 어려웠던 대목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1. 왜 굳이 마뉴엘 데란다의 이론을 차용하는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한국 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를 “신물질주의적”으로 분석한다고 한다. “필자는 미국의 신물질주의(New materialism) 이론의 선두주자이자 들뢰즈의 현대적 계승자인 마뉴엘 데란다(Manuel De Landa)의 이론적 틀을 창의적으로 재전유함으로써 관음충 군집체의 발생과 진화과정, 그것의 잠재적 궤적 방향과 현실적 양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260쪽) 그런데 마뉴엘 데란다의 이론이 한국 남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을 설명하는 데 어째서 유용한지, 본인은 그 이론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전유’하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마뉴엘 데란다의 권위를 이용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2. 분석 대상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는가?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난 남아가 어떻게 ‘관음충’으로 집단적으로 생장, 진화하는가를 분석”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분석은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른 한국 남성의 성장 과정을 역으로 추적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어린 남성 일반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겠다는 것인가? 후자라면 한국의 어린 남성은 모두 디지털 성범죄자가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가 논문에서 사용한 ‘한남충’과 ‘관음충’은 동일한 개념인가? 그렇다면 굳이 두 개의 개념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논문의 분석 대상이 불분명함을 보여준다. 저자 본인이 구사하는 용어의 개념과 용어 간의 관계도 불명확한데, 저자 본인도 혼란에 빠져있는 것 같다.

3. 왜 굳이 ‘한남유충’, ‘한남충’, ‘관음충’이라는 혐오 용어를 사용하는가? 저자는 이 용어들을 학술적인 개념어로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용어들이 어째서 필요하고 적절한 개념어인지 전혀 논증하지 않는다. 더구나 해당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논리 전개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는다. 이 용어들을 구사하는 것이 왜 적절하지 않은지는 최근의 연구에서 논증했다. “집단혐오용어에 대해 한 가지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정에 따르면, 집단혐오용어는 많은 경우 중립적인 대응표현(neutral counterpart)을 가진다. 그리고 집단혐오용어와 그에 대응하는 중립적인 대응 표현은 정확히 같은 의미론적 의미(= 진리치에의 기여)를 가진다(Anderson & Lepore 2013; Bolinger 2017; Jeshion 2013). (...)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사상의 자유시장에 두 가지 똑같은 상품이 있는 것과 같다. 유일한 차이는 하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첫 번째 상품을 사상의 자유시장에 남겨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이준효, 2021, 「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철학적 분석』 45, 89~90쪽)

4. 저자는 과연 정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서술들이 논문 곳곳에 보이는데,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1) “언어와 법률, 학문과 의학, 예술과 정치, 담론과 같은 분야가 남성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영향을 받기에 혐오 용어를 포함한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고 고안하는 자들은 주로 남성계층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전문 영역이 남성중심주의의 영향을 받는다’는 명제와 ‘혐오 용어를 개발하고 고안하는 것은 남성계층이다’라는 명제는 서로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구성하는가?

(2) “‘한남유충과 한남충, 관음충’은 대한민국 남성에 대한 혐오용어로서 금기시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때껏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표적으로 했던 수많은 혐오용어들-김치녀, 된장녀, 꽃뱀, 맘충, 룸나무-의 고안자와 사용자는 누구였는가?” 최근 연구가 지적했듯이, 이런 유치한 논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리즘 옹호 논리와 유사한 논리구조를 지닌다. 이런 논증이 지니는 한계와 문제점은 이준효, 2021, 「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철학적 분석』 45, 75~81쪽을 참조하면 유익하다.

(3) “과연 한남충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현재의 한남(성)충들은 성인기가 도래하자 갑자기 출현한 군집체인가, 아니면 한국여성들이 미성년자일 때부터 학교 교실에서, 학원에서 포진된 채 여성혐오놀이에 심취해있던 그 남아 군집체들의 연장성인가? 20대 여성들은 현재의 한남충들이란 그들이 과거에 겪어왔던 한남유충들의 연속적 진화체(continuum)임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들을 항시 둘러쌌던 불쾌한 여성비하의 경험들을 재사유화할 수 있는 용어를 직접 고안해낸 것이다.”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시쳇말로 ‘답정너’에 가깝다. 애초에 ‘한남유충’에서 ‘관음충’으로 변태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는 저자의 시도는 당연히 후자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는 그 전제가 왜 적절한지를 논증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과연 그것이 적절한 논리 전개 방식인지 의문스럽다.

5. 저자는 도대체 불필요한 개념과 이론을 왜 활용하는가? 온갖 철학 개념과 과학 이론을 동원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한남유충'이 '관음충'으로 '변태'하는 과정을 벌레의 변태 과정과 비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남유충'과 '한남충', '관음충'이 벌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 본인의 혐오를 드러낼 뿐이다. 과연 양자의 비교가 논문의 논지 안에서 필요한가? 뒤집어 말한다면, 벌레의 변태 과정을 거론하지 않으면 디지털 성범죄자가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는 건 논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6. 저자의 결론은 적절한가? “대한민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조건 내에서 한국 남아들은 남성적이며 공격적 행동의 반복적 패턴들을 또래집단 놀이나 미디어 학습을 통해 모사하고 상호참조함으로써 관음충 군집체로 생장해나간다.” 물론 그런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거의 ‘환경결정론’에 가까운 저자의 서술은 이 복잡다단한 현상을 얼마나 정합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다.

이 논문은 면밀하게 분석하고 치밀하게 논증해야 하는 대목에서 전혀 그런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런 글이 과연 학술 논문으로서 무슨 가치를 지니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이 글이 학술 논문의 형식을 갖춘 정치적 선전물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물론 학자가 학술을 통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야 본인의 선택이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 그 자체가 학문적 결함을 메워주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해두고 싶다. 설령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이라도 분석과 논증이라는 학술의 기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면에서 논문을 쓰고 학술적 주장을 하는 건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고 정치적 선전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윤지선이 책임감도 없는 변변찮은 학자라고 여긴다. 그가 자신의 논문에 쏟아지는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사과ㆍ퇴출 요구는 반지성주의 파시즘… 저항하고 경고해야] 물론 윤지선의 논문에 터무니없는 비난을 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충분한 논점과 근거를 갖춘 비판이 제기되었다면, 본인도 정합적인 논점과 근거를 갖춰서 반박하든 보완하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윤지선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비판조차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으로 대응할 뿐이다. 참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이다. ‘여성혐오’의 프레임으로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할 수도 있고, 그들에게 자신을 탄압받는 희생양처럼 현시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대응은 역설적으로 본인이 본인의 학문에 전혀 책임을 지지 못하는, 어쩌면 책임질 생각이 없는 그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혼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무책임한 담론의 경연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담론을 쏟아낸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고 쉽게 행동한다. 본인이 옳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언행에 책임은 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치밀하게 분석하고 엄밀하게 논증해야 하는 대목에서도 도덕적 당위와 정치적 프레임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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