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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록/독서노트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생각하는 나’

by 衍坡 2019. 7. 9.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생각하는 나’




2013.06




데카르트는 『성찰』 제1장에서 방법론적 회의론을 제시한다. ‘방법론적 회의’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의심하여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는 방법론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찾아내 그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하여 최초의 토대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모두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 인간이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문제 삼는다. 인간이 ‘참’이라고 여겨온 것은 대개 그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한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종종 착시 현상을 경험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감각은 종종 인간을 속이기도 한다. 따라서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지식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감각기관으로 인식한 지식 가운데서도 의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반문한다. ‘설령 감각기관으로 인지한 지식이 설령 전부 참은 아니더라도 나의 육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참이지 않는가?’


데카르트는 좀 더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나의 육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검토한다. 이것은 첫 번째 회의에서 살아남은 믿음에 대해 의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이를 위해 꿈을 꾸는 경우를 가정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꿈속에서도 감각적 지각을 통해 무언가를 지각한다. 하지만 꿈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징표는 없다. 따라서 감각을 통해 지각한 내용 중에 의심할 수 없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의 육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명제 역시 확실하지 않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보기에 꿈을 꾼다고 가정하더라도 꿈속에서조차 의심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허구적인 동물을 보는 상황을 가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꿈속에서 본 허구적인 동물 자체는 허구이지만 그 동물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들은 의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설령 그 개별 요소들이 허구라고 하더라도, 그 허구적인 것들이 색깔ㆍ물질적 본성ㆍ연장ㆍ수 등의 특징을 가진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색깔ㆍ수ㆍ연장과 그것들을 다루는 학문인 대수학ㆍ기하학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의 두 번째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간다. 그는 두 번째 단계에서 내린 결론이 타당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능한 악마”의 존재를 가정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묻는다. ‘나는 연장ㆍ색깔ㆍ숫자 등이 확실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보면 연장ㆍ색깔ㆍ숫자 역시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질문을 통해 매우 중요한 결론을 도출한다. 바로 ‘나’의 존재야말로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지식의 토대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전능한 기만자인 악마가 설령 ‘나’를 속인다고 하더라도 속는 ‘나’가 없다면 악마가 나를 속이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의 토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데카르트





‘나’의 존재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임을 밝힌 데카르트는 다음으로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물체나 육체는 확실한 기반이 없으므로 ‘나’의 본질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정신’ 뿐이다. 데카르트는 정신 중에서 육체가 없어도 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은 ‘사유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육체와는 서로 다른 실체인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필연적으로 ‘나’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밀랍의 사례를 예로 들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한다. 그의 논증은 이렇다. ‘사람은 밀랍의 감각적 특성을 통해 그것이 밀랍이라는 사실을 지각한다. 그러나 밀랍이 녹아서 감각적인 특성이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밀랍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밀랍을 지각할 수 있는 이유는 감각적 특성보다는 본질적인 특징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본질적인 특징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오직 정신(이성)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 따라서 언제나 외부의 물체보다 나의 정신이 더 먼저, 더 명백하게 인식된다.’


결국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서로 다른 실체로 구분하는 데카르트는 이성적인 정신 활동을 하는 자아, 즉 ‘사유하는 나’의 존재야말로 모든 지식의 확실한 토대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이 글은 2013년 2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교양 수업 '철학의 이해' 기말고사를 위해 미리 작성했던 가답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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