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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록/독서노트

성경 「욥기」에 나타난 모순적인 신

by 衍坡 2018. 4. 21.

 

성경 「욥기」에 나타난 모순적인 신

 

2018.04.21

 

 

신을 믿지 않지만 가끔 성경을 읽는다.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 이 텍스트는 종종 인간 삶의 본질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한 성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구약의 「욥기」일 것이다. 「욥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고통’의 문제다. 신은 정말 선하고 의로운 존재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독실하게 신을 따르는 자가 현실에서 고통을 받는가? 거칠게 요약한다면 바로 이 질문이 「욥기」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그는 열 명의 자식을 두었고, 상당히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에 달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속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신실하게 신을 경외했다. 비록 사탄의 시험으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고통 받는 상황에서도 욥은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욥은 선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인물이었다.

 

문제는 욥처럼 독실하고 의로운 인물에게 왜 고통이 닥치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신의 분노를 사지도 않았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욥은 자식을 잃고, 재산을 잃었으며, 그 자신은 온몸에 병을 얻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이 의로운 자를 복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린다면, 도대체 욥은 왜 참담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신에게 큰 뜻이 있어서 욥을 시험에 들게 했다는 취지일 것이다. 하지만 신이 욥을 고통에 빠뜨린 계기가 사탄의 “충동”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각주:1] 사탄이 신을 충동하여 욥을 시험하게 했다면 ‘신의 계획’이라는 대답이 얼마나 충분한 설명인지 의구심이 든다.

 

 

욥기의 욥

▲욥이 친구들에게 힐책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신을 충동하는 장면은 「욥기」 1장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개역개정판의 번역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사탄은 욥의 신앙이 세속적인 가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했다. 신은 욥이 끝내 자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럼에도 욥을 시험하기로 결심하고 그에 관한 처분을 사탄에게 맡겼다. 사탄은 욥의 소유물을 빼앗고, 자식을 죽이고, 몸을 병들게 했다.

 

신이 욥을 시험에 들게 한 이유를 보면 그가 정말 온전히 선하고 공의로운 존재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욥이 크고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고통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지 않아 벌을 주려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향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려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사탄의 “충동”에 반응하여 그에게 욥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욥의 모든 것을 빼앗고 몸을 병들게 했다. 신이 욥을 두고 사탄과 일종의 ‘내기’를 한 셈이다. 신이 온전히 선한 존재라면 인간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하는 것은 정당한가? 신이 전능한 존재라면 어째서 독실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그 믿음을 입증해 보이는가? 이 대목에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인간은 전능한 신의 피조물이니 신은 인간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이 자신의 큰 계획 아래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고 해서 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관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부장제라는 틀 속에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전통적인 부모(특히 가장)와 자녀의 관계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는 부모,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가 가족구성원의 생사여탈권과 경제적 권리를 지닌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식이 부모에게 공손하지 않다고 해서 부모가 마음대로 자식의 소유물을 빼앗고 신체를 상하게 할 수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보면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에게 믿음을 강요할 권한은 없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소유물이나 생명을 빼앗을 자격도 없다. 하물며 자신에게 순종하는 욥의 가족을 빼앗고 몸을 상하게 했으니 그 행위가 전능한 자의 선한 행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주의해야 할 대목도 있다. 신이 직접 욥의 재산과 가족을 빼앗고 몸을 병들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욥을 고통에 빠뜨린 직접적인 인물은 어디까지나 사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이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만일 신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욥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욥을 고통으로 밀어 넣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은 욥에 관한 처분을 사탄에게 맡기면서도 몇 가지 단서를 달아둔다. 욥의 소유물을 빼앗아도 좋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는 단서를 단다. 욥을 사탄의 손에 맡기면서도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라는 조건을 건다. 실제로 사탄은 욥의 재산과 자식을 빼앗으면서도 그의 몸에는 손대지 않았고, 욥의 몸을 병들게 하면서도 생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사탄이 욥을 괴롭힐 수 있었던 데 신의 허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신 역시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면서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을 모독하고 누군가의 신앙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다만 한국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믿음에 의문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들을 보면서, 고통 받는 약자에게 조롱을 일삼는 이들을 보면서 묻고 싶었다. 도대체 그토록 공의롭고 선한 신이 도대체 왜 성경 안에서 언뜻 보기에 선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행위를 하는가? 과연 「욥기」에 나타난 신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여전히 궁금할 뿐이다.

 

 

 

*이 글은 본래 '『성경』 욥기에 관한 의문'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블로그를 옮기는 과정에서 대폭 손질했다. 그 글에 어떤 분께서 좋은 답을 주셔서 이 글에  같이 첨부해둔다.

어찌어찌 하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의문은 정당한 의문이며, 사실 기존 보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알다시피 신의 전지전능성과 악과 고통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양립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과 고통은 지극히 당면한 현실인데, 보수 기독교인들은 신의 전능성을 포기 못하고 놓질 않으니 결국 답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고마는 점이 있습니다. 

욥기는 악과 고통의 부조리한 문제를 제기한 히브리 문학서입니다. 

흔히 생각하듯, 축복받은 사람들은 선한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죠. 욥기는 답을 제시했다기보다 삶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시 고대 히브리인들도 부조리한 삶에 대한 물음과 이해를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구약성서를 좀더깊이 있게 들여다보시면 여자와 아이까지 남김없이 죽여라고 하는 정복적이고 야만적인 신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히브리 노예와 가난한 자와 과부와 떠돌이 등 여러 사회적 약자를 품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의 모습도 뒤섞여 있는 채로 나와 있습니다. 

사실 성서 자체가 많은 부조리와 모순을 품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들에서 보듯이,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책이 되기도 했었지요. 노예제도 찬성에 성서가 동원되는가 하면 그 반대에도 성서가 동원됩니다. 

다시 돌아와서 욥기는 당시 고대 히브리인들의 삶에 해소되지 않은 의문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욥기는 답을 주는 저작이 아니라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용기있게 문제를 제기하는 저작입니다. 욥기 이전에 그러한 물음을 명확히 제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욥기의 결말을 급작스런 해피엔딩이 아니라 냉정한 시선으로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처리했다면 그야말로 급진적인 문학서가 되었을 것인데 이점은 아쉬움으로 남는 지점입니다. 아마도 욥기를 쓴 기자는 거기까진 가기엔 더 많은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욥기에서 제기되었던 이 문제적 급진성은 철저히 죄없는 의로운 자의 죽음이라는 신약의 예수 곧 마가복음의 십자기 처형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처럼 신에게서도 버림 받은, 신마저도 버렸던 그러한 죽음인 셈이죠. 

혹시 더 많은 정보들을 보시려면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d002/1

 

2017.07.25 03:48

 

  1.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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