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는 그저 '종교의 시대'인가?
2017.12.15
흔히 유럽의 중세는 ‘종교의 시대’로 불린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중세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인식에 기대고 있다. 카노사의 굴욕이나 ‘마녀사냥’이 중세 유럽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 또는 교회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과 충돌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고, 그런 점에서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 위상도 달라질 수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편적인 사실들로 중세 유럽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보다 그 사실들의 이면에 놓인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관점에서 중세 교회의 역사적 궤적에 대해 서술하려고 한다. 특히 세속권력과 교회권력 사이의 긴장이 어떤 궤적을 그려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샤를마뉴의 대관식
우선 교회와 세속권력 간의 관계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관한 정보는 14세기 초 파도파의 마실리우스가 쓴 『평화의 수호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성서는 분명히 교황이라고 불리는 로마 주교도, 어떤 다른 주교나 사제도 또는 부제도, 다른 사제나 사제가 아닌 자나, 지배자, 공동체, 단체, 어떤 조건의 개인에 대해서도 직권이나 강제적 심판이나 판결의 권한을 가지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여기서 마실리우스가 강조하려는 것은 교황이 세속적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인민의 동의가 모든 정당한 정부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던 마실리우스로서는 교황이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적어도 14세기 초까지 교황이 세속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교황은 어떻게 세속적인 권력과 결합할 수 있었을까? 그 기원은 카롤링 왕조의 성립과 발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롤링 왕조를 세운 피핀 3세는 본래 메로빙 왕조의 궁재였지만, 메로빙 왕조를 빼앗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궁재로서 왕위를 빼앗은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피핀이 선택한 것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왕의 권력을 갖지 못한 자가 계속 왕위를 지키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실권을 쥔 자가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피핀의 질문을 받은 교황은 피핀의 손을 들어주었다. “왕의 힘이 없이 머물러왔던 자보다는 힘을 가질 자가 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질서가 혼란되지 않도록 사도의 권위를 통해 피핀이 왕이 될 것을 명하노라.” 교회와 세속 권력의 특별한 관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황과 세속 권력의 특별한 관계는 샤를마뉴 집권기에 더욱 공고해졌다. 샤를마뉴는 서유럽을 통일하고, 정복지역의 부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 종교적 통일을 도모했다. 그 뿐 아니라 롬바르드 지역을 정복하여 교황령에 대한 롬바르드 족의 간섭을 배제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 교회는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에 대관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보은’(報恩)이라기보다 샤를마뉴와 로마 교회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가능한일이었다. 로마 교회로서는 자신들을 보호해 줄 존재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비잔티움에 대한 교황의 권위를 주장하려고 했다. 샤를마뉴 역시 비잔티움 황제와 대등한 위상을 차지하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교회와 세속 권력의 결합은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노사의 굴욕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와 세속권력의 이해(利害)가 달라지면 둘 사이의 관계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로마 교황이 샤를마뉴를 황제에 대관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교황과 황제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 권력을 둘러싼 양자 간의 대립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10-11세기를 거치며 현실로 나타났다.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로마에서는 일부 귀족 가문이 교황 선출에 개입함으로써 교황이 세속적 직책으로 변화했고, 지방에서는 수도원과 교회가 이민족들의 침략 위협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토 1세는 교회를 보호하는 동시에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봉건 귀족을 억누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오토 1세는 교회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고, 자신의 측근을 수도원장이나 주교에 임명하여 정치적ㆍ경제적 특권을 부여했다. 이런 사정들은 당시 유럽 사회 전반에서 교회의 세속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수도원은 바로 클뤼니 수도원이었다. 이들은 교회 개혁을 위한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하나는 수도원이나 수도사가 봉토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도원장과 고위 성직자를 서임할 권리는 세속 군주가 아니라 수도사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져 11세기 중반에는 교황청이 중심이 되어 교회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세속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세속 군주는 사제 서임권이 왕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보았지만, 교회 개혁가들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양측의 갈등은 서임권 투쟁이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서임권 투쟁은 결국 교황권 강화로 귀결되었다. 성직 서임권은 교황의 권한으로 귀속되었고, 세속 군주는 교황이 임명한 사제들에게 세속 직위를 수여할 권한만 인정되었다. 그 결과 로마 교황은 황제보다 우위에 섰으며, 세속적인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보니파키우스에 의해 반포된 우남 상크탐
13세기 말이 되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럽 사회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창성에 의하면, 교황권 쇠퇴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교황들이 영적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세속적 권력에 집착했다. 둘째, 교황의 ‘무오류설’을 주장함으로써 교황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 셋째, 교황 대신 국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이런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과 세속 군주 간의 대립이 다시 나타났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대립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고,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파문하겠다며 필리프 4세에 맞섰다. 그러나 교황청으로 가는 공물을 막는 필리프 4세를 이길 수는 없었다. 둘 사이의 갈등은 프랑스가 교황 사절을 체포한 사건에서 다시 불거졌다. 교황은 필리프 4세를 비판하며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을 반포했다. 이 교서는 ‘세속 권력은 영적인 것에 종속되므로 그리스도교 국가의 단일체 안에서 최고의 판결권은 교황에게 있다’는 것으로 로마 교회의 우위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오히려 삼부회의 지지를 얻어 교황을 이단으로 재판에 회부하려 하였다. 보니파키우스는 파문으로 맞설 계획이었지만, 필리프 4세 측의 습격을 받고 몇 주 후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은 교황의 영향력이 축소되던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 역시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제 다시 마실리우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마실리우스가 『평화의 수호자』에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주장의 의의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평화의 수호자』를 쓴 시점이 언제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마실리우스는 14세기 초에 해당하는 1324년에 이 책을 썼다. 이것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교황권이 영향력을 잃어가던 13세기 말 – 14세기 초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민의 동의가 모든 정당한 정부의 바탕’이라는 그의 생각 역시 국가가 교회 또는 교황의 역할을 대체해가던 당시의 사정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중세를 단지 ‘종교의 시대’로만 이해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물론 교회의 중요성이 중세 유럽 사회에서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가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중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속 군주들과 일정한 긴장관계 위에 놓여있었다. 상황에 따라 교황은 세속 군주의 우위에 서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 영향력을 잃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의 중세사는 여러 주체와 이해관계, 변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중세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축이지만 유일한 축은 아니다.
*이 글은 2015년 2학기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전공 수업 '서양 고중세사' 기말 답안지로 제출한 글을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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