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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록/독서노트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by 衍坡 2018. 4. 14.

정정훈,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군주론(II Principe)』은 너무도 유명한 책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책의 이름을 들었고, 이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비열한’ 내용이 담긴 ‘악마의 저작’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정훈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의 기예”라고 보았다. 즉 정정훈은 『군주론』으로부터 “도덕적 이상과 추상적 원칙에 매몰되어 현실의 투쟁 속에서 무력화되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의 중심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은 이러한 시각에서 마키아벨리와 그의 주저 『군주론』을 읽어나간다.


이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장 마키아벨리라는 스캔들”에서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한 논란에 대해 살펴본다.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양 극단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초월주의 정치철학”에서 탈피하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마키아벨리의 사유가 ‘옳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닌 냉혹한 정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 사유라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근대 이전 ‘초월주의’ 정치학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장 근대의 새벽 : 마키아벨리와 그의 시대”에서는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대의 현실을 다루면서 그가 가졌던 고유의 문제의식에 대해 살펴본다. 이 장에서의 서술에 따르면, 마키아벨리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와 공국으로 나누어져 분열하고 있었다. 이는 알프스 이북에서 절대왕정이 수립되던 역사적 상황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탈리아는 그들의 침략에 무방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어갔다. 이 같은 배경을 계기로 ‘이탈리아의 해방과 통일’에 대한 방안을 고민했던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힘을 타고 넘는 탁월한 역량을 가진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에게 그런 지도자의 상을 보여주었고, 『군주론』에는 역사 속에서 또 다시 그 같은 인물이 나오길 바랐던 마키아벨리의 갈망이 담겨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3장 여우처럼, 사자처럼 : 군주론의 정치적 테크네”에서는 본격적으로 『군주론』에서 제시한 군주의 “정치적 테크네”에 대해 다룬다. 앞서 언급한 체사레 보르자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만한 역량을 가졌음에도 ‘운명의 장난’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저자는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을 통해 “인간사에 미치는 운의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 절감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운을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역량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자신에게 닥쳐와 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성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힘”이라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외부의 힘’에 대해 고민했고, 군주가 ‘역량’을 기름으로써 운에 대한 통제가능성을 길러야한다고 보았다. 즉, 마키아벨리는, 훌륭한 군주라면 “자신의 권력의지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가기 위해서 운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고 자신의 통제력을 최대한도로 높여가는” 역량을 갖추어야한다고 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켄타우로스로서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법’에 의지하는 방법(인간의 방법)과 ‘힘’에 의지하는 방법(짐승의 방법) 모두를 잘 활용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적인 면모만으로는 군주가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어렵고 자신에 대하여 외부적인 힘들을 통재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짐승의 방법”에도 다시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여우의 면모와 사자의 면모, 즉 “명민한 지성”과 “강력한 무력”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기예”를, 후자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철저하게 물어 죽이는 사자의 잔혹함이라는 폭력성”을 의미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구사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현실 정치 속에 대한 군주의 ‘통제력’을 높이고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구현하는 “역량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군주가 “역량의 정치”를 구현하여 당시 정체되어 있던 이탈리아 역사의 동인(動因)이 되는 것. 저자는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절실한 소망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저자는 “4장 마키아벨리의 공화국 : 정치체의 비르투를 위하여”에서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마키아벨리의 사유의 구체적인 면모를 검토한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저작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의 논의들이 단절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관된 사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이 두 책에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라는 공통된 고민을 보여준다. 다만 『군주론』이 “부단히 변동하는 세계에 대한 이론과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역량을 갖춘 정치적 주체의 이론”[“군주의 정치적 테크네”]을 담고 있다면, 『로마사논고』는 “역량의 주체를 군주 개인에게서 정치체를 구축하는 모든 인민들로 확장하기 위한 방안”[정치체의 목표]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창건하고 지속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역량’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고, 이에 ‘창건’의 문제에 ‘군주의 정치적 테크네’로, ‘지속’의 문제에 혼합정체 공화정을 기반으로 결집된 ‘인민의 공동역량’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다음 “5장 내재성의 철학과 역량의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세계관을 살펴보고, 그 세계 속에서 그가 형성했던 ‘역량의 정치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키아벨리에게 세계란 “여러가지 요인들의 마주침을 통해 무수한 변화가 발생하는 유동적인 공간”이었다. 저자는 이 우연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튀세르(Althusse)의 논의를 가져와 마키아벨리를 ‘우발성의 유물론자’로 정의한다. 그리고 ‘우발성의 유물론자’인 그의 세계관이 “내재주의”였으며, 이는 현실주의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세계관 위에서 마키아벨리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개인들의 능력이 증대될 수 있는 권력관계와 제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즉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저자는 이 고민과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결부시켜 논의를 전개한다. 즉, 마키아벨리에게 중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시비(是非)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량 강화를 위한 제도적인 차원에서 ‘법’과 ‘군대’, ‘종교’가 있었고, 이는 마키아벨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저자는 그 중에서 국민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국가를 결집하여 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종교’가 “역량의 정치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사상적 통일 역시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6장 마키아벨리와 해방의 정치”에서 저자는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마키아벨리 사상에서 『군주론』이 가지는 역할의 문제를 고려할 때, 마키아벨리는 군주와 인민 중 어느 당파에 속하는가? 즉, 그의 사상이 ‘해방의 정치’로서의 성격을 가지는가? 둘째, 신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차지한 현대사회에서도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유효한가?


먼저 첫 번째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인민의 당파”에 속하며,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주장한 ‘혼합정체 공화정’에서 가장 ‘다수’인 인민의 역할을 강조했던 점이나, 『군주론』에서 인민을 “군주의 동지”이자 “권력의 토대”로 인식하였던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오히려 군주를 인민과 대조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억압자를 억압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인민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존재”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이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신자유주가 모든 것을 장악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수탈로부터의 ‘인민의 해방’을 꿈꾸는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유효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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