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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문록/독서노트

『국가』 7권(521c~541b) 요약

by 衍坡 2018. 4. 17.

『국가』 7권(521c~541b) 요약



플라톤 국가




7권 중반(521c)부터 소크라테스는 ‘생성되는 것에서 실재로 혼을 끌어당기는 교과’와 변증술, 교과별 교육시기에 관해 자세하게 논한다. 이 논의는 6권 말미에서 이루어졌던 논의의 연장선이다.



◉ 혼의 전환을 위한 예비 교육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혼의 전환을 위해 배워야 할 교과들은 전사들에게도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통치자의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전쟁 투사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3권에서 이들은 체육과 시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체육과 시가 교육은 혼의 전환을 위한 교과에는 속하지 않는다. 체육은 성장ㆍ쇠퇴와 관계되므로 생성ㆍ소멸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체육과 상관관계에 있는 시가 교육은 선법을 통해 조화로움을, 리듬을 통해 단정함을 갖게 하지만 지식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혼의 전환을 위한 교과가 될 수 없다. 물론 기술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기술은 혼을 이용한 것이라기보다 수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체육ㆍ시가ㆍ기술 모두 혼의 전환을 위한 예비 교과에 포함되지 않음을 확인한 소크라테스는, “모든 기술과 모든 형태의 사고와 지식이 이용하는 공통의 것”(522c)이 무엇인지 논한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성의 사용으로 이끌어가는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이다. 전자는 감각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시에 상반된 판단을 내놓아 ‘지성에 의한 이해’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후자는 감각만으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이 중에서 혼의 전환을 위한 교과는 지성에 의한 앎을 요청하는 경우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손가락의 비유를 든다.


손가락의 비유는 이런 것이다. 감각에 의해 손가락이라고 파악된 것은 위치ㆍ색깔ㆍ굵기 등과 무관하게 똑같이 손가락으로 여겨진다. 손가락이 동시에 손가락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가운뎃손가락이든, 넷째손가락이든, 새끼손가락이든 그저 손가락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 경우에는 ‘지성에 의한 앎’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감각에 의해서 크다, 단단하다, 굵다고 지각된 것은 동시에 작다, 부드럽다, 얇다고 파악되기도 한다. 넷째손가락은 새끼손가락에 비해서는 크지만 중지에 비해서는 작다. 그러므로 넷째손가락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하지만 감각은 큼과 작음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혼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 경우 혼은 지성에 의지해서 무엇이 크고 작은지, 단단하고 부드러운지, 굵고 얇은지를 탐구하게 된다. 즉, 감각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각각 구별된 하나로 보지 않고 섞여 있는 것으로 보지만, 지성은 각각 구별된 하나로 이해한다. 전자는 ‘가시적인 것’이라 하고, 후자는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혼의 전환을 위한 예비 교과로 취급하는 것들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위한 교과들이다.



◉ 예비 교과의 종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교과는 ‘수론과 산술’이다. 수와 계산은 “모든 기술과 모든 형태의 사고와 지식이 이용하는 공통의 것이며, 모두가 맨 먼저 배워야만 하는 것”(522c)이다. 수와 하나는 “동일한 것이 하나이면서도 수에 있어서 무한”(525a)하기 때문에, 즉 하나로 보이기도 하고 여럿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지성을 불러일으켜 ‘실재’를 고찰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와 계산은 전열을 정비하거나 선박을 세는 등 전쟁을 위해서도 필요하므로 전사들에게도 필요하다. 산술과 수론은 수와 관련된 것이므로 지식 교육을 위한 교과에 속한다. 이 교과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체들을 갖는 수”(525d)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을 뿐 달리는 어떻게도 다룰 수 없는 그런 수들”(526a)을 통해 ‘수들 자체’에 관해 토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산술에 밝은 사람들은 다른 모든 교과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이해가 느리더라도 산술을 배운다면 이해력이 빨라질 수 있다. 이 학과는 다른 학과들에 비해 더 큰 노고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점들은 수론과 산술을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다음으로 배워야 하는 교과는 ‘기하학’이다. 글라우콘은 이것이 군대의 야영, 지역 점령, 군대의 집결ㆍ분산, 전투, 진군할 때의 대형 편성에 유용하다는 점에서 기하학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가 기하학의 이런 측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기하학이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이끄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더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정방형을 만듦’, ‘작도함’, ‘합함’ 등 기하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실용적인 일을 위한 것, 즉 생성ㆍ소멸하는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하학 전체를 보면 ‘언제나 있는 것’에 관한 앎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기하학은 “혼을 진리로 이끄는 것”(527b)이다.(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별도로 기하학에 관한 논증을 하지 않는 것은, 기하학이 ‘지성에 의한 앎’에 속한다는 것을 제6권 510c~511a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은 기하학 다음의 교과로 천문학을 들지만, 소크라테스는 ‘입체 기하학’을 언급한다. 기하학은 2차원을, 천문학은 입체의 운동을 다루므로 그 사이에 3차원을 다루는 교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입체 기하학은 확립되지 않은 상태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이 교과를 존중하는 나라가 없어 빈약하게 탐구되기 때문이다. 둘째, 탐구자는 감독자 없이 이 학문의 확립을 볼 수 없는데, 감독자가 생기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생기더라도 탐구자들이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학문은 그 매력 때문에 성장하고 있으며, 온 나라가 함께 감독하면서 이 교과를 존중하여 탐구하는 데 앞장선다면 확립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네 번째 교과는 ‘천문학’이다. 글라우콘은 일반적인 천문학 개념을 염두에 두지만,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천문학은 일반적인 의미의 천문학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천문학이 예비교과로서의 유용성을 가지려면 일반적인 의미의 천문학이 아닌 참된 천문학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천체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것들이지만 참된 천체들에는 많이 못 미친다. 일반적인 천문학은 눈에 보이는 별들의 운동을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므로 한결같은 비율과 수를 찾을 수 없다. 반면, 참된 천문학은 참된 수와 참된 궤도에 따라 운동하는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별들을 “이성과 추론적 사고”(529d)로 파악하는 것이다.


마지막 교과로 언급되는 것은 ‘화성학’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천문학과 화성학은 모두 ‘움직이는 운동’에 관한 것이다. 천문학이 눈으로 천체의 운동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화성학은 귀로 ‘화성적 운동’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두 교과는 “서로 자매 관계에 있는 것들”(530d)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선법 연구는 악기가 내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음을 측정하거나 귀로 듣는 협화음들 속에서 수를 찾는 데 그친다. 하지만 화성학이 변증술 학습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떤 수들이 협화음들이고 어떤 것들이 아닌지를,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각각의 경우가 그러한지를 고찰하는 데”(531c) 이르러야 한다.



◉ 변증술


통치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하는 최종적인 교과는 ‘변증술’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수론ㆍ기하학ㆍ천문학ㆍ화성학은 이것을 배우기 위한 ‘서곡’이며, 변증술이야말로 ‘본악곡’이다. 변증술은 일차적으로 합리적인 설명(로고스)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 없이는 좋음(善)의 이데아를 알 수 없다. 변증술은, 변증술적 논변을 통해 감각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지성에만 의지해서 ‘각각인 것 자체’(각각의 이데아)로 나아가 ‘좋은 것 자체’를 파악하는 데서 완료된다. 이때 변증술적 논변은 ‘각각인 것 자체’ 하나하나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탐구방법이다.(533b)


수학ㆍ기하학 등의 예비 교과는 ‘가정’들을 이용하면서도 그것에 관해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교과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지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변증술이 필요하다. 변증술은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정들을 하나씩 폐기하고 원리 그 자체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예비 교과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오히려 예비 교과들을 활용하여 혼이 ‘좋은 것 자체’를 볼 수 있도록 이끈다.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탐구 방법의 단계가 “의견보다는 더 명료하지만 지식보다는 한결 불분명”(533d)하므로 이 단계를 ‘추론적 사고’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앞서 선분의 비유(509d~511e)에서 구분했던 네 가지 영역을 각각 인식ㆍ추론적 사고ㆍ믿음ㆍ상상으로 부른다. 그에 따르면, 믿음과 상상은 ‘의견’으로 ‘생성’에 관한 것이지만, 지식과 추론적 사고는 지성에 의한 앎으로 ‘존재(본질, 실재)’에 관한 것이다. “존재가 생성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성에 의한 앎’이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고, 지성에 의한 앎이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식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추론적 사고가 상상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이 관계에 관해서는 제5권 476a~d에서 논의되었다. 이에 따르면, 다수의 행위나 물체가 ‘~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인 것 자체’가 그들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변증술에 능한 자는 “각각의 것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534b)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논증을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할 수 있어야만 좋음의 이데아를 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모든 논박을 헤쳐 나가되 의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본질에 입각해야하며 논증에 실패하지 않고 논박들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 교과별 교육시기와 변증술의 오용


변증술에 관한 논의를 맺은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 적합한 자질을 언급한 뒤 교육별 시기와 변증술의 오용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통치자가 되기 위해 선발된 사람들은 견실하고 용감하며 잘 생겨야한다. 그들의 인격은 고귀하고 강건하며 통치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학문에 관한 예리함을 갖추어야 하고, 기억력이 좋아야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자발적인 거짓이든 아니든 그 거짓을 판별하고 분노하는 혼을 갖추어야 한다.


통치자는 나이 많은 사람을 선발해야 하지만, 통치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놀이의 형태로 가르쳐야 한다. 즉, 20세 이전에는 시가와 체육 교육을 가르치고, 전쟁에 참관하게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민첩한 사람들을 “필수적인 체육에서 벗어날 때”(537b), 즉 20세가 되기 2~3년 전에 선발 인원으로 포함시킨다. 선발된 인원이 스무 살이 되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변증술적 자질’을 갖추도록 교육한다. 이때 수론과 산술ㆍ기하학ㆍ입체기하학ㆍ천문학ㆍ화성학을 가르친다. 이전까지 교육받은 교과들을 결집해서 이것들 간의 상호 친근성과 실재의 본성에 관해 포괄적인 이해를 지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자질을 갖추었느냐에 따라 변증술에 능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한다.


변증술적 자질을 갖추도록 교육받은 이들이 30살이 되었을 때, 그 중에서 변증술에 능한 자를 다시 선발하여 5년 동안 변증술만 집중적으로 훈련시킨다. 다만 이 교육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변증술을 오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변증술을 이용하는 경우 그것을 남용해 무법자가 된다. 어릴 적부터 올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에 복종하며 자란 젊은이들은 변증술을 접하고 논변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믿음이 흔들린다. 젊은이들이 변증술을 처음 접하면 그것을 놀이삼아 남을 반박하는데 즐겨 이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도 많은 이들에게 논박 당해 자신이 믿었던 것들을 전혀 믿지 않게 되고, 철학에 관한 것들을 회의적인 눈으로 본다.


5년간 변증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 이들은 전쟁에 관련된 일들을 지휘하고 관직을 맡아서 실무교육을 받게 한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이들이 “어느 쪽에서 끌어당겨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는지 아니면 제자리를 옮기는지 시험”한다. 그 기간은 35살부터 50살까지 15년이다. 이들이 50살이 되었을 때, 실무에서나 학식에서나 모든 면에서 두루 가장 뛰어난 자들을 다시 선발해서 최종 목표인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이끌어 가야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본 좋음의 이데아를 본으로 삼아 나라와 개개인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나라가 스스로 번영하며, 그 안에 있는 민족은 최대한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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