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중양2

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2020.02.06. 1. 조선의 ‘독자성’을 읽어내려는 노력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뜻밖의 기록이 적혀있다. “옛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노인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했다.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서쪽을 향해 국면이 트여서 중국에 읍(揖)하는 형상이라서 예로부터 중국에 충순(忠順)해 왔다.” 중국 주변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중국을 침략하여 제왕 노릇을 했지만, 조선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강역을 지키며 정성껏 사대했다[恪勤事大].[각주:1] 하지만 어느 연구는 이 서술이 최남선의 광문회본 『택리지』에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최남선은 ‘충순’(忠順)과 ‘각근사대’(恪勤事大)라는 표현을 각각 ‘친닐’(親昵)과 ‘불감의타’(不敢意他).. 2020. 2. 13.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189집, 2006 Ⅰ. 들어가며 조선 초기에는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고 민족 문화의 발달에 노력하였으며, ……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문화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15세기 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15세기, 특히 세종 시대의 문화가 “민족적이면서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라는 이러한 관점의 서술이 비단 국사 교과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연구들은 .. 2018.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