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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수간』중 송익필과 이이의 편지

by 衍坡 2022. 3. 22.

『삼현수간』: 송익필과 이이의 편지

2022.03.21.


1. 간찰의 개요


여기에서 다룰 두 편의 간찰은 『삼현수간』에 실린 것이다. “三賢手簡”이라는 제목은 곧 세 현인, 즉 성혼ㆍ이이ㆍ송익필의 서신을 가리킨다. 즉, 『삼현수간』은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것이다. 그 원형은 본래 송익필의 문집 『龜峯集』에 실린 「玄繩編」으로 모두 98편의 편지가 실려있다. 그중 16편은 세 사람의 문집에 실리지 않은 편지다. 그런 점에서 『삼현수간』의 본래 명칭은 「玄繩編」이며 ‘삼현수간’이라는 제목은 후대에 붙인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현승편」에 실린 송익필의 自序에는 세 사람의 편지를 묶은 경위를 간략히 적었다. 그 아들 宋就大가 임진왜란 이후에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수습했고, 그것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살펴보려는 두 편의 편지는 각각 송익필과 이이가 쓴 것이다. 하나는 牛溪 成渾과 栗谷 李珥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서 그 뒤에 쓴 龜峯 宋翼弼의 後記다. 파주 웅담의 도굴이라는 곳에 집을 짓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본래 이이와 성혼은 파주에서 서로 가까운 곳에 거처했고, 송익필은 파주 龜山 부근에 살았다. 송익필은 새로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이이ㆍ성혼과 학문적 소통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 경위를 기록했다. 다른 하나는 송익필이 보낸 편지에 이이가 답한 편지다. 편지를 쓴 때는 1576년(선조 9) 12월 3일이다. 조정에는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갈등이 거세지고 이이는 조정에서 물러나 파주와 해주를 오가던 시기다. 웅담에 집을 짓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과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에 관해 언급했다.

[참고1] 고전종합DB에 올라온 해제는 「현승집」 상권에 29편의 편지가, 하권에 32편의 편지가 실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표제의 개수만 계산했기 때문이다. 한 표제 안에 여러 편의 편지가 함께 실려있기 때문에 그 산정 방식에는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정서

(1) 송익필의 後記


[원문]


道窟坡山熊潭也 水石不淸曠 土又
不饒 棄之 與叔獻更
卜于安峽于麋
先築書室于龜山
松楸下 其後 安峽亦未
得成就焉 初以龜山
濱海多風 不宜病人
欲卜得好山水 或
屛巖上院
點指十餘區 旣無物力
又嬰疾病 竟未一遂焉



[번역문]

道窟은 곧 坡山[坡州] 熊潭이다. 물은 맑지 않고 돌은 넓지 않으며 땅도 비옥하지 않아 포기했다. 叔獻(이이의 字)과 다시 安峽의 于麋에 터를 정했지만, 그보다 앞서 龜山의 선산[松楸] 밑에 書室을 지었다. 그러나 이후 안협에서도 성취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龜山이 바닷가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 병든 사람에게는 적당치 않았으므로 경치 좋은 곳을 택해 거처하려고 雲谷, 屛巖, 上院 등 10여 곳을 점지해두었다. 그러나 物力도 없는 데다 병까지 들어서 끝내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다.

[참고2] 파주 웅담은 지금의 행정구역상 대략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에 해당한다.
[참고3] 안협은 본래 현이었으나 1914년에 江原道 伊川郡에 安峽面으로 통합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영토다.
[참고4] 龜山은 오늘날의 ‘심학산’을 가리킨다.


(2) 이이의 답서


[원문]

<皮封>
雲長 拜謝復
宋 生員 侍史

魚公之來 獲承
惠手簡 披閱欣感 如對
雅儀 第審
調況 尙未康復 戀慮亦極 緣客
煩 不能邀浩原 昨日投宿厥家 今
日始還耳 熊潭事若成 則幸可
言耶 當扣方叔 若蒙許諾 則築
室之費 珥亦略助爲計 且
下示進退之義 是平日鹵莽所講
也 敢不敬佩 第念久速有義 雖
不可貪戀 亦不可悻悻 此事言不
可悉也 伏惟
下照 忙不宣 謹拜
謝復
十二月三日


[번역문]

<피봉>
雲長(송익필의 자)에게 보내는 답장
宋 生員이 부모를 모시는 곳에

魚公이 왔기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서 펼쳐보니 마치 단정한 몸가짐[상대]을 직접 대하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다만 살펴보니 병세가 아직 회복되지 않으셨다 하여 몹시 생각나고 걱정스럽습니다. 저[珥]는 손님을 맞이하는 일로 번잡해서 浩原(성혼의 字)을 초대하지 못하다가 어제 그의 집에서 투숙하고 오늘에야 돌아왔습니다. 웅담에 관한 일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다행스러움을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方叔[沈義謙, 1535-1587]에게 물어서 만일 허락을 얻으면, 집을 짓는 비용을 저도 약간 보태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 중에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리는 평소에 제가 강론하던 것이니 공경히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래 벼슬에 머물거나 서둘러 물러나는 데도 의리가 있으니, 비록 벼슬을 탐내도 안 되겠지마는 성급하게 해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다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삼가 절하며 답장을 올립니다.

12월 3일에 이이가 절하고 올립니다.

[참고5] 조선시대 편지에는 상대를 직접 지칭하지 않았지만 행을 바꾸거나 글자를 떨어뜨려 쓰는 등 상대에 대한 예우를 표현했다. 피봉에도 '송 생원이 부모를 모시는 곳에'라고 쓴 것은 송익필에게 보낸다는 의미이지만 그를 예우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3. 논점

(1) 書室 건축과 거주지의 위치


송익필이 새로운 거처를 물색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거주지의 조건이었다. 본래 거처하던 곳이 바다와 가까운 탓에 바람이 많이 불어 적합한 거주 조건이 아니었다는 그의 서술은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송익필이 단지 살기 좋은 곳만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이이는 웅담에 집 짓는 일에 관심을 드러내며 건축 비용을 부분적으로 부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그와 관련해 심의겸과 소통했다. 그것은 ‘웅담과 관련된 일’이 단지 송익필 개인의 거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성혼도 송익필에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도굴의 집이 완성되어 賢兄이 그 가운데에서 牌를 걸어 놓고 拂子를 잡고서 후생들과 함께 학문을 익히신다면, 敎學相長하는 유익함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익필은 웅담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면서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집에서 이이ㆍ성혼과의 교유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교육제도에 관한 기존의 설명을 염두에 두면, 官의 영향력과 무관하게 지방 변두리에 강학 공간을 세우려던 시도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간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은 왕조 개창 직후부터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에 향교를 설치해 유교 이념을 보급하려 했다. 그러나 향교로 대표되는 조선의 관학은 15세기 후반부터 쇠퇴에 접어들었고, 16세기에는 서원으로 대표되는 ‘私學’이 등장하면서 조선의 교육을 주도했다 한다. 물론 송익필과 이이가 생각했던 書室의 역할이 講學과 享祀의 기능을 포괄하는 서원과 같았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존 연구처럼 관학과 사학을 대비하는 구도에서 ‘私學’을 사림의 정치적ㆍ사회적 영향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이해하면, 이이와 송익필이 세우려 했던 강학 공간도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대의 정계ㆍ사상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던 이이가 국가 제도 바깥의 강학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록 사림 개념이 적실한지, 16세기의 관학이 정말로 쇠퇴했는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겠지만, 국가 권력과 무관하게 지역 사회에서 강학 공간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송익필의 본래 거처와 새로 집을 지으려는 곳이 읍치에서 멀찍이 떨어진 장소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본래 거주했던 龜山 일대와 새로 거주하려 했던 웅담은 모두 읍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여말선초 이래로 향촌의 지배세력이 분화되면서 ‘吏族’으로부터 벗어나 士族化하는 이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족으로 분화된 이들은 그 과정에서 본래 거주하던 邑內를 벗어나 任內 혹은 타읍의 변두리로 이주했다.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던 임내는 이른바 재지사족이 정착하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송익필의 글에서도 이런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安峽縣의 于麋나 거주지 후보로 점찍었던 雲谷, 屛巖, 上院 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16세기 후반에 작성된 송익필의 글은 기존 연구와 부합하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2) 출사와 의리


이이의 편지에서는 웅담에 집 짓는 일 외에도 ‘進退의 의리’를 언급한 점이 눈에 띈다. 이 편지를 작성했을 때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 거세지던 정국에서 물러나 파주와 해주를 오가던 중이었다. 송익필과 이이가 주고받은 서신에서 ‘進退의 의리’를 거론한 것은 이런 정치적 맥락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벼슬 그 자체를 탐내서는 안 된다는 태도, 의리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런 논의를 ‘출처론적 군신윤리’라고 규정한 바 있다. 군신의 의리에서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명분론적 의리론’이라면, ‘일의 마땅함’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난다는 것은 ‘출처론적 의리’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출처론적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출처론적 군신윤리’다. 이이의 편지에 담긴 언설은 바로 이 출처론적 군신윤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벼슬에 머물거나 서둘러 물러나는 데도 의리가 있다”는 이이의 서술에서 그런 사정을 읽어낼 수 있다.

실제로 출처론적 군신윤리가 사대부 사이에 정착한 시점은 16세기였다고 한다. 15세기에는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지만, 16세기 사대부의 언설에서는 벼슬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벼슬을 위해 과거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비판할 일이지만, 經世에 관심을 끊고 군신윤리를 실천할 생각이 없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벼슬에 나아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는 ‘일의 마땅함’에 달린 것이고, 사대부는 출처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이의 편지에서는 이런 인식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3) 간찰을 통한 교유와 간찰집 생산


유학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실천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맺은 사회적 관계망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도덕성은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와 불가분의 관계다. 그런 가치를 공유했던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교유는 매우 중요했고, 간찰은 개인이 다른 이들과 교유하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런 점에서 간찰은 한 개인의 사회 관계망을 확인하는 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삼현수간』을 다룬 일부 연구에서 이이와 성혼, 송익필의 관계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에 담긴 간찰이 세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현수간』이 흥미로운 또 다른 지점은 그것이 책자의 형태라는 데 있다. 즉, 왕래한 간찰을 책자로 엮어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15세기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5세기에는 심지어 문집에서조차 간찰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조선 초기에 문형을 담당했던 권근과 변계량은 문장가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들의 문집에는 ‘書’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문집에 주로 실린 글은 국가의 필요에 부응해서 지은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서 16세기가 되면 간찰을 골라 문집에 실었을 뿐 아니라 별도로 책이나 첩을 묶어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간의 연구는 이런 변화를 주로 성리학 이해의 심화나 사대부-사림의 출현과 연결지어서 설명해 왔지만, 간찰첩을 어떤 의도에서 왜 만들었는지, 간찰첩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읽히거나 활용되거나 소장되었는지 좀 더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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