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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조선시대 기록 읽기

송시열과 중화

by 衍坡 2018. 4. 16.

송시열과 중화

 

 

송시열(1607~1689)은 노론의 영수로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에 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는 특히 사이비 역사학자 이덕일의 저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덕일은 송시열이 학술적 자유를 억압하고 조선을 친명 사대주의의 길로 빠뜨리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송시열에 관한 이덕일의 평가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송시열을 ‘친명사대주의자’로 이해하는 그의 관점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덕일은 송시열이 마주했던 조선의 현실이 무엇이었으며 그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송시열은 왜 중화를 그토록 강조한 것인가? 그가 중시했던 중화는 망해버린 그저 망해버린 명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과연 송시열이 망해버린 명나라에 집착한 시대착오적인 사대주의자였을 뿐인가?

 

송시열이 살았던 17세기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급격하게 변화하던 시기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중국에서 나타났다. ‘오랑캐’로 치부되던 후금(청)이 새로이 중원의 패자로 등장하고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후금으로부터 군신관계를 강요받았고, 결국 청과 사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모화사상’에 빠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랑캐’ 청에 사대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명나라의 멸망은 보편문명으로서의 중화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륜도덕에 기초한 유교문명을 충실하게 구현해왔던 조선으로서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조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송시열

▲송시열의 초상화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문화를 다시 확립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절박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경구의 지적처럼,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였고, “왕조의 생명을 되살리는 작업이면서 사대부 개개인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유교문화의 재구성을 통한 국가체제 재정비의 방향과 방법을 두고 치열하게 정치적ㆍ사상적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은 바로 그런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송시열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은 인륜도덕으로 대표되는 유교문화를 조선 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그가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현실에 존재했던 명나라가 아니라, 명나라로 대표되는 중화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화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지리ㆍ종족ㆍ문화가 있다. 그중에서 송시열이 가장 강조했던 것은 인륜도덕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측면이었다. 그런 점에서 송시열에게 중화는 유교문명의 정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송시열이 쓴 「평양부 을지공 사우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금상(今上) 9년(1668)에 한산(韓山) 이공 태연(李公泰淵)이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옛날 고구려 을지공 문덕(乙支公文德)이, 양광(楊廣)이 침범하는 때를 당했으나, 작은 군사로 능히 백만 대군을 방어해서 국가를 보존하고 인민을 보호하였다. 이로부터 강국(强國)이라 호칭하여 비록 포학한 금ㆍ원(金元)으로도 매양 두려워하고 꺼려하여서 감히 포학한 짓을 함부로 못하였으니, 그 공리(功利)의 파급된 바가 크고 또 오랬다. 이런 때문에 국사(國史)에 기록되었고, 유민들이 사모한다. 이번에 사당을 세워 향사(享祠)하여 그 공훈에 보답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으므로 내가 서글픈 마음으로 회답하기를 ‘이런 일이 있었구나. 옛날과 지금은 형세가 다르구려. 그때는 고구려가 동쪽 3분의 1을 가진 나라로 굳센 무략(武略)이 그와 같았는데, 그 후에는 6천 리의 지역을 가지고도 원수의 부림[役]이 되는 한탄이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어찌 사람이 하기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우주를 초월해서도 잊지 않고 추모해서 조석(朝夕)으로 만나듯이 하여야 마땅하다. 하물며 서도(西道) 사람은 옛 고구려의 유민(遺民)임에랴. 또 서도 문헌(文獻)에 그 일을 신빙할 데 없은 지 오랬는데, 공이 처음으로 그 일의 근원을 밝혀서 모든 정사(政事)의 첫째로 했으니, 다만 무공(武功)만 기록할 만할 뿐이 아니다.’ 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이공(李公)이 갑자기 별세해서 반장(返葬)하였고, 사당은 완성 단계에서 중지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도 백성들이 애석해 마지않았는데, 여흥(驪興) 민공 유중(閔公維重)이 그 후임이 되어 공사를 잇달아서 완성시켰다. 7월 을해일을 택하여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향사를 예(禮)대로 한 다음 편지를 나에게 보내서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성왕(聖王)이 사전(祀典)을 마련한 것은 한갓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뿐이 아니라 모든 훈공(勳功) 있는 이를 모두 참여하게 하였기 때문에 주관(周官)에, 사훈씨(司勳氏)가 그 훈공을 태상(太常)에 기록하고 대제(大祭)로 제사하였으며, 《상서(尙書)》에도 훈공을 기록하고 대제(大祭)로 제사한다는 글이 있고, 《예기(禮記)》에는,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부지런했으면 제사하고 노력으로써 나라를 안정시켰으면 제사하며, 큰 재변(災變)을 그치게 하고 큰 환난(患難)을 막았으면 제사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을지공은 큰 재변을 그치게 하고 큰 환난을 막아서 죽기로써 나랏일에 부지런했고 노력으로써 나라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을 기록하고 제사하여서 사훈(司勳)에 기재함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전대(前代)의 일이라 해서 높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공(李公)의 뜻이 아름답다 할 만한데 민공이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켰으니, 그 천하의 선(善)을 공정히 간주하여 피차에 간격이 없음을 더욱 볼 수 있다.

 

다시 논한다면, 당시에 조그마한 속국(屬國)으로서 중국에 대항하여 왕사(王師)를 무찔러 죽이고 승여(乘輿 천자(天子)의 행차)를 핍박하여 제후(諸侯)의 법도를 크게 잃었으니, 그때 수사(隋史)에 반드시 수갈(繻葛)의 필법(筆法)으로써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양광이란 자는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하여 천지에 용납되지 못할 죄인이다. 진실로 제 환공(齊桓公)이나 진 문공(晉文公) 같은 패자(覇者)가 있었다면, 비록 바다 너머 나라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해서 진옹(秦雍)의 교외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죽였을 것인데, 하물며 양광이 죽으려고 우리나라에 스스로 온 것이겠는가. 공은 작은 나라 약한 군사로 사나운 칼날을 크게 꺾음으로써 마침내 낭사(浪死)의 한 곡조가 천하의 난리를 일으켜 양광의 종족이 씨도 없게 되었으니, 인심을 크게 통쾌하게 했다 할 만하고, 공의 공로는 한갓 작은 나라에서 큰 재변을 그치게 하고 큰 환난을 막은 것뿐이 아니었다.

 

아, 공의 세대는 비록 멀어졌으나, 두려워할 만한 그의 정령(精靈)은 반드시 죽었다고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고(告)하여 공 있는 종족(宗族)을 기록하면서, “네가 명을 받아 왕실(王室)을 잘 도우라”하였으니, 공의 없어지지 않은 정령(精靈)이 우리나라를 도와서 외적(外敵)을 막고 임금의 계책을 굳세게 해서 주공의 훈계처럼 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두 분의 뜻도 역시 이런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 슬프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A] 금상(今上) 9년(1668)에 韓山 李公 泰淵이 평안 감사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옛날 고구려 을지공 문덕이, 양광(수 양제)이 침범하는 때를 당했으나, 작은 군사로 능히 백만 대군을 방어해서 국가를 보존하고 인민을 보호하였다. 이로부터 强國이라 호칭하여 비록 포학한 金 · 元으로도 매양 두려워하고 꺼려하여서 감히 포학한 짓을 함부로 못하였으니, 그 功利의 파급된 바가 크고 또 오랬다. 이런 때문에 國史에 기록되었고, 유민들이 사모한다. 이번에 사당을 세워 享祠하여 그 공훈에 보답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B] 당시에 조그마한 屬國으로서 중국에 대항하여 왕의 군대를 무찔러 죽이고 천자의 乘輿를 핍박하여 제후의 법도를 크게 잃었으니, 그때 隋史에 반드시 수갈(繻葛)의 필법으로써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양광이란 자는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하여 천지에 용납되지 못할 죄인이다. 진실로 제 환공이나 진 문공 같은 覇者가 있었다면, 비록 바다 너머 나라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해서 秦雍의 교외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죽였을 것인데, 하물며 양광이 죽으려고 우리나라에 스스로 온 것이겠는가. 공은 작은 나라 약한 군사로 사나운 칼날을 크게 꺾음으로써 마침내 浪死의 한 곡조가 천하의 난리를 일으켜 양광의 종족이 씨도 없게 되었으니, 인심을 크게 통쾌하게 했다 할 만하고, 공의 공로는 한갓 작은 나라에서 큰 재변을 그치게 하고 큰 환난을 막은 것뿐이 아니었다.

 

[A]에서는 이태연이 을지문덕을 왜 높이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을지문덕이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을 무찔러 국가와 인민을 보호한 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B]를 보면 송시열이 을지문덕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태연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송시열의 논점은 이런 것이다. ‘을지문덕이 양광의 침략을 물리친 것이 제후의 법도를 잃은 것 같지만, 양광은 인륜을 저버린 자이니 천자라고 할 수 없다. 을지문덕의 공은 나라의 재변을 그치게 한 것뿐이 아니라 인륜도덕에 기초한 중화문명을 지켜낸 것이다.’ 아무리 중원대륙을 차지한 한족왕조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인륜도덕을 저버리면 중화문명의 천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을지문덕이 수 양제를 물리친 것은 단지 나라와 백성만 지켜낸 것이 아니라 인륜도덕을 지켜낸 행위였다. 송시열은 철저히 인륜도덕이라는 관점에서 을지문덕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송시열은 왜 중화를 그토록 강조한 것인가? 그가 중시했던 중화는 망해버린 그저 망해버린 명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과연 송시열이 망해버린 명나라에 집착한 시대착오적인 사대주의자였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을지문덕에 관한 송시열의 평가는 그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망해버린 명나라가 아니라, 인륜도덕으로 대표되는 유교문명의 정수였다. 그가 명나라 멸망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송시열은 명나라가 계승한 중화 문화가 사라질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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