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 「經濟六典元集詳節序」(『東文選』 93)
2022.02.21.
▣임용한, 1999, 「朝鮮初期 法典 편찬과 편찬원리」, 『韓國思想과 文化』 6
▣임용한, 2003, 「『경제육전속집상절』의 간행과 그 의의」, 『朝鮮時代史學報』 25
▣윤훈표, 2003, 「경제육전의 편찬과 주도층의 변화」, 『동방학지』 121
(1) 『경제육전』의 편찬 과정
『경제육전』은 처음 간행된 이후로 꾸준히 수정ㆍ증보되었는데, 대체로 『원전』을 두고 별도로 『속집』을 간행해서 수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해 나갔다. 『경제육전』은 태조 7년(1398)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태종대에 새로운 규정들을 수록하면서 별도로 『속집상절』을 간행했다. 문제는 두 법전 사이에 중복되거나 충돌하는 조문이 존재한다는 데 있었다. 태종은 『속집상절』에 새로 수록한 규정을 삭제하고 『원전』의 조문을 수정한 경우에는 본래의 조문 아래 주를 달아 넣도록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세종대까지 이어졌다. 세종대에는 법전에서 중복되는 내용을 삭제하고 태종대의 방침에 따라 개정된 조문은 본래 조문 아래에 주를 달아 수록했다. 아울러 일시적으로 활용할 법제는 正典 대신 별도로 謄錄을 만들어 수록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세종 15년(1433)에는 정전 6권과 등록 6권으로 구성된 經濟續六典이 간행되었다.
(2) 『경제육전』의 특징
오랜 법제사 서술에 의하면, 고려는 그때그때의 필요로 만든 法令과 判例法, 慣習法에 근거하여 나름의 법률체계를 갖추었으나 성문법 마련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그와 대조적으로 건국 직후부터 법전을 편찬하는 등 “통일적 법률을 정립하여 법치주의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경제육전』이 최초로 간행된 ‘成文統一法典’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그렇지만 『경제육전』은 조선의 종합적인 성문법으로 평가받는 『경국대전』과는 다른 특징을 지녔다. 『경국대전』은 六典체제라는 틀 안에서 개별 사안마다 법조문을 달았지만, 『경제육전』은 수교집의 형태를 채택했다. 실록에 인용된 법조문을 검토한 임용한은 “경제육전은 6전 분류를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조문 내부에 여러 典으로 분해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런 특징에 근거해서 『경제육전』 안에 중복되거나 서로 다른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반면, 『경제육전』의 특징이 『경국대전』에까지 반영되기도 했다. ①법전에 수록된 규정은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수정된 조항은 원래 조문 아래에 각주로 기재한다. ②영구히 시행할 법은 正典에 수록하고 일시적으로 시행하는 법은 謄錄에 싣는다.
(3) 『경제육전』 간행의 정치사적 해석
윤훈표는 『경제육전』의 간행과 수정을 정치사적 맥락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여기에는 『경제육전』 간행ㆍ개찬 과정에서 통치체제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경합을 벌였다는 전제가 놓여있다. “그때그때 정국 운영을 앞장서 이끌며 편찬 및 개찬사업을 주도하던 계열들의 체제개혁에 관한 입장이 큰 폭으로 가미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 태조대: 『경제육전』 편찬을 주도한 인물은 조준ㆍ정도전ㆍ민제였다. 세족 출신인 민제는 조준ㆍ정도전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으나 유교적 예제 구현이라는 측면에 공감했기에 법전 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기 때문에 『경제육전』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각각의 분야에서는 일관성을 갖추었지만 각 분야와 분야 사이의 통일성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 태종대: 왕자의 난 이후 집권한 정사공신은 舊制 개혁에는 공감했지만 개국공신과는 정치적 지향이 달랐다. 이들은 태조대 정책을 수정하면서 『경제육전』도 개찬했는데, 이 작업을 주관한 하륜은 이전의 잘못된 규정을 바로잡는다며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어냈다. 태종 계열 인물들의 정치적 지향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는 하륜의 태도가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태종은 『원전』을 기준으로 『속전』을 수정하게 했으나 작업은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 세종대: 『원전』과 『속전』 사이에 중복되거나 어긋나는 조문을 수정하고 정전과 등록을 별도로 간행하는 등 기존 『경제육전』의 체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때에 이르면 이전과 달리 법전 개찬에서 국왕의 비중이 더 커졌으며 군주가 추구하는 체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반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세종은 하륜의 『경제육전 원집상절』을 철회하고 이두와 방언이 섞인 태조대의 『경제육전원집』을 복원했다. 체제 개혁의 성과물인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과시하면서 세종 본인이 시도하는 개편 작업의 명분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원문]
國家之有六典, 猶天之有四時, 人之有五常, 不能離此以致治也. 故帝王之興, 必議其制, 而文獻之傳, 足徵於後. 唐虞之治, 載諸典謨, 文武之政, 布在方策, 以至秦漢掌故之官, 唐宋會要之書, 質文因革, 皆可知也.
나라에 六典(吏戶禮兵刑工)이 있는 것은 하늘에 四時(春夏秋冬)가 있고 사람에게 五常(仁義禮智信)이 있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떠나서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 이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제왕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알맞은 제도를 논의하고 그것을 문헌으로 전해서 후대에 밝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堯와 舜의 정치는 典謨에 실려있고 문왕과 무왕의 정사는 方策에 나열되어 있어서 秦漢代에 典章制度를 담당한 관직, 唐宋代의 會要 같은 책에 이르기까지 제도의 내용과 형식, 연혁을 모두 알 수 있다.
*典謨(전모): 『서경』의 「堯典」, 「舜典」, 「大禹謨」, 「皐陶謨」, 「益稷」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
*掌故(장고): 국가의 典故ㆍ古事ㆍ典章ㆍ制度를 관장하는 관직 이름, 또는 그 일을 이르는 말.
*會要(회요): 한 왕조의 제도와 연혁을 기록한 책. 예를 들면, 宋朝會要를 들 수 있다.
吾東方前朝之季, 百度廢弛, 無復典籍之存. 我太祖康獻大王, 應天受命, 一新制度, 宏模遠略, 敻越千古. 于時先正左政丞趙浚等, 慮成憲久而或湮也, 乃蒐摭國初以後政令條格, 編類成書, 倣成周六官之名, 爲聖朝一代之法, 創業貽謀之懿範, 實具於此.
우리 동방은 전 왕조[高麗] 말엽에 온갖 제도가 해이해져서 전적에 실려있는 제도를 회복하지 못했다. 우리 태조강헌대왕께서 하늘의 뜻에 따라 천명을 받고 제도를 일신하니 크나큰 규범과 원대한 책략이 멀리 千古를 뛰어넘었다. 이때 先正 좌정승 조준 등은 成憲이 오래되면 혹여라도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국초 이후의 政令과 條格을 모으고 뽑아서 종류별로 편집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주나라 六官의 명칭을 모방해서 聖朝 一代의 법을 만들었다. 왕업을 세우고 훌륭한 계획을 자손에게 남겨주는 아름다운 전범이 실로 여기에 갖추어졌다.
第其書務在詳悉, 雜以方言. 逮我太宗恭定大王之朝, 左政丞臣河崙等, 仍就其書, 剗其方言而文之, 名曰經濟六典元集詳節, 又作續典, 節目寢廣. 然於元典, 頗有異同而更改者. 歲乙未, 命禮曹, 更加參檢, 悉復元典之舊, 若時異勢殊, 不獲已而仍改者, 註於元典本條之下. 其遵率舊章之道, 損益時宜之義, 可謂盡矣. 厥後因循未就.
다만 그 책은 내용을 자세히 다 알게 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방언을 섞어 썼다. 우리 태종공정대왕조에 이르러서 좌정승 하륜 등이 그 책에서 방언을 삭제하여 문장으로 고쳐 쓰고 『經濟六典元集詳節』이라고 이름 붙이고 다시 續典을 지었는데, 節目이 점점 광범해졌다. 그런데 『元典』과 사뭇 다르게 고친 것도 있었다. 을미년(1415, 태종15)에는 禮曹에 명하기를 다시 검토해서 『원전』에 실렸던 예전의 내용을 회복하되 시대와 상황이 달라서 부득이 고치게 된 것은 『원전』의 본래 조항 밑에 주를 달게 하셨다. 옛 문물제도를 따르는 도리와 時勢에 적절하게 손질하는 의리가 극진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후로 지체되어 완성되지는 못했다.
且戊子以來, 見用條制, 亦與元典, 或有相複互礙之處, 奉行者病焉. 我主上殿下, 특진신충, 申命左政丞臣李稷等, 續撰其事. 於是, 一依元典, 去其違戾, 刪其重複, 隨時損益者, 註於本條. 如水之有源委, 如室之施塗墍, 前後相因, 巨細畢該, 學之者明於指掌, 行之者審於中鵠, 元典之義, 益煥然矣. 宣德丙午七月, 纂訖, 謄寫以獻, 乃命印頒, 期永遵守, 又命臣採, 序其始末.
더구나 무자년(1408, 태종 8) 이래로 사용되어 온 조목과 제도가 『원전』과 간혹 서로 중복되거나 서로 방해되는 곳이 있기도 해서 규정을 받들어 시행하는 자가 그것을 병폐로 여겼다. 우리 주상 전하[世宗]께서 특별히 마음을 쓰셔서 左政丞 李稷(1362~1431) 등에게 事目을 이어서 편찬하도록 명하셨다. 이에 한결같이 『원전』을 기준으로 어긋나는 것은 버리고 중복되는 것은 삭제했으며, 시세에 따라서 더하거나 덜어낸 것은 본래 조문에 주를 달았다. 마치 근원과 끝이 있는 강물처럼 앞뒤가 서로 이어지고 벽에 흙을 바른 집처럼 크고 작은 것이 다 갖추어지니, 배우는 사람은 손바닥을 보듯이 분명하게 알게 되고 시행하는 사람은 과녁을 적중시키듯이 정확하게 알게 되어 『원전』의 뜻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宣德 병오년(1426, 세종 8) 7월에 편찬이 끝나서 책을 베껴 적어 바치자 인쇄하여 반포하기를 명하시면서 영원토록 준수되기를 바라셨고, 臣 權採(1399~1438)에게 그 전말을 서문에 기록하게 하셨다.
臣竊念自古聖帝明王之創業守成也, 必有丕顯罔缺之謨, 以裕後昆, 亦必有敬承善繼之道, 以光前烈. 伏觀祖宗立經陳紀, 而規模之大如此, 聖上繼志述事, 而條理之密又如此. 且二三元臣, 同寅協恭, 參詳抽索之審, 而大典克成, 其與虞朝之典謨, 周官之法度, 可謂同揆而儷美也. 將見六典擧而庶績凝, 治隆於上, 民協于中, 維持億萬世無疆之業, 其在斯矣.
신이 생각하기에 예로부터 창업을 하거나 수성을 하는 聖帝明王은 반드시 분명하고 흠 없는 계획을 남겨서 후손들을 넉넉하게 만들어주고, 선조를 공경히 받들고 잘 계승하는 도리를 따라서 선조의 공렬을 빛나게 했다. 살펴보건대, 祖宗이 규범을 세우고 기강을 펼치시니 이처럼 규모가 광대하고 聖上이 선왕의 유지를 잘 계승하여 사업을 펼치시니 이처럼 조리가 치밀하다. 더구나 두세 명의 元勳大臣이 임금의 뜻을 공경히 받들고 힘을 합쳐서 자세히 살피고 뽑아내서 대전이 완성되었으니 舜의 典謨, 周官의 법도와 도리를 함께하여 나란히 아름답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앞으로 六典이 거행되고 여러 공적이 이루어져 위에서는 정치가 융성해지고 가운데에서는 인민이 협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억만세의 끝없는 왕업을 유지해 가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 달려있을 것이다.
*“同寅協恭”은 『서경』 「고요모」에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고요가 舜 임금 앞에서 禹에게 말한 것인데, 뒤에는 동료 관원들이 공경히 임금을 섬기면서 다 함께 훌륭한 정사를 이루기 위해 협력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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