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리뷰과 단상29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조선을 '가부장제' 사회로 불러도 좋은가? - ‘종법’과 ‘가부장제’의 개념 문제에 관한 검토 - 2019.06.28 1. 조선의 가족질서 변화를 보는 시선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가족질서는 17세기를 기준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고 본다. 고려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던 15~16세기에 양측적 친속체계가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종법 질서가 확산하면서 부계 친족 중심의 가족질서가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를 기점으로 가족질서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많다.[각주:1]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이 출생 순서대로 족보에 기재했다. 친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족보에 싣기도 했다. 재산 상속이나 제사 문제에서도 아들과 딸을 구.. 2019. 7. 1.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공민왕 대의 국왕 측근세력 형성 과정에 관한 검토 2019.06.22 1. 머리말 2. 즉위 직후의 정치적 동향과 호종 신료의 분열 3. 공민왕과 조일신 세력의 정치적 관계 4. 부원세력 제거와 측근세력의 결집 5. 맺음말 1. 머리말 공민왕 대(1351~1374)의 고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변화와 위기를 마주했다. 대외적으로는 원(元)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한편 장강 이남에서 홍건적 등의 반원세력(反元勢力)이 봉기했다. 고려가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배경에는 그런 국제질서의 변동이 있었다. 국내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원과 결탁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전횡과 지배계층의 대민수탈은 고려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심각했다. 공민왕 대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변화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들을.. 2019. 7. 1.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공민왕 대 고려-몽골(원) 관계의 변화 2019.05.28 ▲공민왕 부부 초상화 몽골(원)은 1351년 충정왕을 폐위하고 몽골에 머무르던 왕기(王祺)를 새로 고려의 국왕으로 임명했다. 몽골(원)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이 폐위되거나 즉위하는 사례는 몽골 복속기 내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만큼 공민왕의 즉위 과정 자체가 특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점에도 몽골(원)이 고려 국왕에 대한 임면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몽골(원)이 공민왕 초반에도 고려의 국정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원)은 아주 손쉽게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에 관철했다. 1354년(공민왕 3) 당시 몽골(원)은 장강 이.. 2019. 5. 28.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공민왕 5년(1356) ‘반원개혁’의 재검토」를 읽고 ( 이강한, 2009, 「공민왕 5년(1356) ‘反元改革’의 재검토」, 『대동문화연구』 65 ) 2019.05.04 ○ 총론: 지금껏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반원’의 개념이 그리 엄밀하지 않다는 점, 고려후기 지배층이 매우 복잡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에서 국내정치의 맥락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유익했다. 다만 ‘반원’이라는 틀을 배제하고 공민왕의 개혁을 분석하다보니 몽골(원)이라는 변수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공민왕이 ‘세조구제’를 회복ㆍ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몽골(원)은 여전히 고려의 정치에서 중요한 변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몽골(원)이 매우 수동적.. 2019. 5. 4.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를 읽고( 최성환, 2016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 『역사비평』 115 ) ●總結: 저자는 정조 개인에 대한 평가로 정조 시대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정조 시대를 ‘근대의 전사(前史)’로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경향을 비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문제제기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의 서술이 지나치게 거칠거나 피상적이라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저자가 글 안에 제시한 설명 중 많은 부분이 치밀한 논증을 요한다. 그러나 이 글만 놓고 본다면, 저자의 주장이 글 안에서 충분히 논증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아쉽다. 근래 임오화변에 대한 설명에서 당쟁의 요인을 부각시키는 것이 구태의연한 시각인 것처럼 되었다. 임오화변은 당.. 2018. 9. 15.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호모 폴리티쿠스, 이승만 -『우남 이승만 연구』 를 읽고- 2015.06. 자유민주주의의 영웅 vs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건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인가?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이를 둘러싸고 지난 수십 년 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음에도 아직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한편에서는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가한다. 이런 양극단의 평가는 종종 극단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2006년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4.19혁명 희생자 유족들 간의 충돌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이고, 한국 사회의 갈등의 중심에 서.. 2018. 4. 20. 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이태진 교수의 ‘외계충격설’, 그 의의와 한계 자연현상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자연현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둔 몇몇 역사가들은 이 질문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사 연구에서 그러한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태진일 것이다. 논문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의 서두에서 그는 서양 사학계의 소빙기 연구 방법론을 이용해 한국사를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역사 연구가 인간의 삶과 의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자연과 과학이라는 중요한 변수를 역사 연구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외계충격설’로 불리는 그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한정적.. 2018. 4. 19. 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영조의 '민국'이념에 관한 생각 - 김백철 저 「조선 후기 영조대 백성관의 변화와 ‘民國’」을 읽고 - 김백철은 숙종-영조대 최대 과제였던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영조대 탕평정치의 지향점이 민국이념이었음을 주장한다. 그의 논의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일단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어떤 시대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는지 설명했다는 점, 양역변통논의와 황극탕평론이 영조대 탕평정치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입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는 탕평정치의 운영논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이전 시기의 붕당정치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민국이념에 대해서 김백철과 다른 생각을 견지한다.. 2018. 4. 16. 정조에 투영된 정치적 열망, 무엇이 문제인가? 정조에 투영된 정치적 열망, 무엇이 문제인가? -이덕일의 책 『정조와 철인 정치의 시대』 논평- 1990년대 이후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의 이미지는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개혁군주’ 또는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무능하고 나약한 군주의 이미지를 대신했다. 자연스럽게 정조에 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는 정조의 삶과 치세를 다룬 다양한 저서가 출판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저서는 이덕일의 책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고즈윈, 2008)다. 정조의 극적인 삶은 물론 그의 개혁과 좌절을 매우 유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국왕 정조와 ‘수구 정파’ 노론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정조시대를 이해한다. 정조가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 2018. 4. 14.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