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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리뷰과 단상29

보편문화와 고려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고려 관제 보편문화와 고려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고려 관제 - 김대식, 2007, 『고려전기 중앙관제의 성립』, 경인문화사 - 2020.02.23 고려는 자국의 정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당의 관제(官制)를 받아들였다. 그 핵심은 바로 ‘3성 6부제’다. 고려는 이 제도를 자국의 실정에 맞게 조정해서 2성 6부 형태의 중앙관제를 마련했다. 중국의 제도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런 설명은 지금껏 고려의 정치제도에 관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전통적인 관제와는 매우 이질적인 당의 관제가 어떻게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도입될 수 있었을까? 정작 율령제에 기초한 3성 6부제가 당의 정치제도로 기능한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면 고려가 받아들인 3성 6부의 실체는.. 2020. 3. 19.
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고려 전기의 역사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 한정수, 2007,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과 농업』, 혜안 - 2020.02.14. 이른바 ‘나말여초’(羅末麗初)라 불리는 시기의 농업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을까? 당시의 농업생산량은 증가하는 중이었을까? 과연 새롭게 등장한 지배층은 어떤 존재인가? 큰 폭의 사회변동 속에서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그런 변화 속에서 건국된 고려의 역사적 위상은 무엇일까? 대개 이런 질문들은 한국사의 ‘발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 발전에 관한 생각과 별개로, 이 문제들이 9~10세기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한국사 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한정수의 저서 『한국.. 2020. 3. 4.
고려를 ‘고려답게’ 이해하려는 노력의 성과물 고려를 ‘고려답게’ 이해하려는 노력의 성과물 - 노명호, 2019,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지식산업사 - 2020.02.13. 지금까지 축적된 고려시대사 연구 성과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고려의 정치제도와 국정운영, 사회경제적 구조, 사상적 지형 등 고려시대사 전반에 걸쳐 많은 것들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과연 그런 설명들이 얼마나 고려를 고려답게 설명한 것일까? 이 물음은 노명호의 저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 2019)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간의 고려시대사 서술이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제점은 고려시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한다. 저자는 고려의 황제제도와 .. 2020. 2. 27.
‘귀족사회론’ 바깥에서 본 고려의 국정운영 ‘귀족사회론’ 바깥에서 본 고려의 국정운영 - 박재우, 2005,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 신구문화사 - 2020.02.25. 고려시대에 국왕과 신료가 함께 국정을 운영했다는 생각이 그렇게 특별한가? 박재우의 저서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을 처음 펼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고려의 국정은 국왕과 신료가 이끌어갔다”는 서론의 첫 문장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고려 국왕의 정치적 위상이나 고려 국정운영 방식이 적지 않게 연구된 오늘날의 연구 지형을 전제하고 떠올린 아주 피상적인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곧 이 책이 어떤 강점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 책이 출간되던 당시의 연구 경향을 생각하면, 군주를 고려시대 국정운영의 한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저자의 연구는 .. 2020. 2. 27.
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조선 초기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는 시선들 2020.02.06. 1. 조선의 ‘독자성’을 읽어내려는 노력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뜻밖의 기록이 적혀있다. “옛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노인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했다.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서쪽을 향해 국면이 트여서 중국에 읍(揖)하는 형상이라서 예로부터 중국에 충순(忠順)해 왔다.” 중국 주변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중국을 침략하여 제왕 노릇을 했지만, 조선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강역을 지키며 정성껏 사대했다[恪勤事大].[각주:1] 하지만 어느 연구는 이 서술이 최남선의 광문회본 『택리지』에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최남선은 ‘충순’(忠順)과 ‘각근사대’(恪勤事大)라는 표현을 각각 ‘친닐’(親昵)과 ‘불감의타’(不敢意他).. 2020. 2. 13.
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이른바 ‘세조구제론’ 다시 보기 2020.01.17. 1. 들어가며: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의 쟁점 고려와 몽골은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맺었다. 1259년(고종 46)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양국의 관계는 13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고려-몽골 관계는 몽골 복속기 이전에 고려가 다른 중국 왕조들과 이어갔던 외교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고려 국왕이 몽골 황실과 통혼하여 부마의 작위를 받는가 하면, 몽골 황제의 의사에 따라 고려 국왕의 폐위와 즉위가 결정되기도 했다.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에게 친조(親朝)해서 외교 현안을 해소하기도 하고, 몽골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업은 ‘부원배’(附元輩)가 고려 안팎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왕의 권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2020. 2. 8.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1356(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고려-원 관계의 성격」을 읽고 2019.12.05 최종석은 한 연구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논증하려 했다. ①몽골 복속기에 이어지던 고려-원 관계가 1356년에도 기본적으로 지속했다. ②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는 몽골 복속기에 ‘본래적’ㆍ‘당위적’ 양상으로 변화했고, 그런 특징은 1356년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나는 두 번째 견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첫 번째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1356년을 기점으로 확실히 약해지는데, ①의 주장은 이런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원은 1356년 이전까지 고려의 국정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남의 ‘한적’(漢賊)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던 원은 1354년(공민왕 3).. 2019. 12. 6.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반원운동에 관한 연구사 정리 2019.12.05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元)과 결탁해서 권세를 휘두르던 기철 일가와 ‘부원세력’을 일시에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아울러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고, 동북쪽에 군사를 보내 쌍성 등의 지역을 되찾았다. 공민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군의 만호ㆍ진무ㆍ천호ㆍ백호가 지닌 패를 회수했다. 이 일련의 조치는 공민왕의 계획 아래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반원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워낙 전격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각주:1] ‘반원운동’을 고려의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종합적으.. 2019. 12. 6.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고려 말 성리학 수용 문제에 관한 단상 - ‘성리학’과 ‘사대부’ 개념의 문제 - 2019.09.06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알려진 안향의 영정.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은 고려 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고 설명해 왔다. 신흥사대부의 구체적인 개념과 범주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들이 남아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견해를 검토하여 기존 연구의 시각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따져보려고 한다. 우선 고려 말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수용했다는 주장이 어떤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 살펴보자... 2019. 9. 6.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다시 보기 2019.06.28 1. 머리말 2. 문체반정과 정조의 군주권 3. 선행 연구에 묘사된 정조의 절대적 군주권 4. 절대적 군주권의 실상과 ‘마키아벨리즘’ 문제 5. 맺음말 1. 머리말 아마도 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시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탐구된 정조 시대는 그간 ‘개혁의 시대’ 혹은 ‘왕조의 중흥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조 개인의 위상도 그에 걸맞게 변화하여 ‘개혁군주’나 ‘계몽군주’라는 평가가 무능하고 나약한 군주의 이미지를 대신했다.[각주:1] 이 재평가는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정치사를 재해석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이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조 시대를 향한 관심.. 2019.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