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민주주의?
2018.04.26
한국은 ‘진짜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에 실린 한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물음이다. (기 소르망 “한국은 가짜 민주주의 체제…대통령 권한 내려놓아야”) 이 기사는 프랑스의 학자 기 소르망(Guy Sorman)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세계적 석학으로 명성을 얻은 그의 한결 같은 관심사는 주로 인권과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등에 관한 것이다.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대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계 미국인 학자 기 소르망
기 소르망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마주한 여러 현안을 두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 현안 중에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개헌 문제도 들어있다. 기 소르망은 헌법에서 4년 중임제와 5년 단임제 중 어느 쪽을 채택할 것인가는 부차적인 쟁점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대통령의 권한을 어떻게 분산시키느냐가 헌법 개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는 실제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한국 대통령의 힘은 거대합니다. 이는 본인에게도 국가에도 좋지 않습니다. 헌법 개정안에는 그 권한을 내려놓는 내용이 포함돼야 할 겁니다.”
비록 원론적이기는 하지만 기 소르망의 지적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한쪽의 권력 독점을 막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의구심이 드는 건 그가 덧붙인 의견 때문이다. 기 소르망은 한국 사회를 “아직 덜 완성된 민주주의, 가짜 민주주의 체제”로 규정한다.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가짜”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근거는 기 소르망 자신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해외에서는 페이스북과 같은 온라인 여론이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영향을 미치더라도 제한적이고요. 뉴스나 여론이 조작되는 건 두려운 일이지만, 수시로 확인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이것이 부족합니다.”
『동아일보』의 인터뷰에 따르면, 기 소르망이 한국을 가짜 민주주의 사회로 판단하는 이유는 시민이 가짜 뉴스나 부정확한 정보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완성된 민주주의’ 혹은 ‘진짜 민주주의’가 존재한 적이 있는가? 기 소르망이 생각하는 참된 민주주의가 무엇이든 ‘진짜 민주주의’ 혹은 ‘완성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러 나라의 고유한 정치적ㆍ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전형적인’ 민주주의의 기준 세워 각국의 정치 현실에 들이대는 태도가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가? 더구나 그 잣대로 각 나라의 정치 문화를 진짜와 가짜, 완성과 미완성으로 나눠 우열을 가리는 접근은 얼마나 바람직한가? 원론적으로야 ‘참된 민주주의’의 기준을 명료하게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 제도가 현실에 구현되고 작동하는 방식은 각 나라의 고유한 정치적ㆍ문화적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일관된 법칙과 기준을 세우고 어떤 민주주의가 참된 민주주의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은 그러한 변수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1
▲2014년 미국 선거 당시 페이스북의 투표 인증 버튼(The Voting Button)
시민이 온라인 여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현상이 한국의 특이한 모습이라는 소르망의 진단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일 그의 판단이 옳다면, 한국보다 민주주의가 더 성숙한 나라에서는 소셜 네트워크(SNS)나 온라인 여론이 시민의 정치 참여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제한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보다 민주주의의 뿌리가 더 오래되고 깊은 미국에서조차 소셜 네트워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실제로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의 몇몇 기사는 페이스북이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관련기사1 / 관련기사2) 하지만 그 원인을 시민의식의 미성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차라리 가짜 뉴스의 유통이나 온라인 여론의 영향력 증가는 정보화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하루에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정보의 범위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다. 그런 세상에서 개별 시민이 “수시로 확인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 소르망의 진단은 정보가 가공되고 유통되는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험난한 경로를 지나고서야 실현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값진 역사적 성과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여러 한계를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덜 완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가짜 민주주의 체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고민거리 없는 세상은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성숙한다 해도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 ‘덜 완성된 민주주의’로 단정하는 기 소르망의 생각은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유신정권에서 내세웠던 ‘한국식 민주주의’나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한국식 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독재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체들은 인권,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기본 가치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진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민주주의와 非민주주의 정체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고정된 ‘전형’을 세워두고 그것에 완벽히 부합하는 정체만을 ‘진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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