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유학사 연구 살펴보기
2022.03.28.
이 글은 조선 건국에서부터 16세기까지를 다룬 조선 유학사 연구의 성과를 대략적으로 개괄한 것이다. 다만 조선 건국과 성리학의 관계는 그간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사안이기 때문에 14세기 말도 논의 범위에 포함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조선 전기’로 분류되고, 그 핵심적인 특징으로 ‘유교화’가 언급된다. 유교화를 보여주는 지표에는 정치세력, 사회구조, 친족질서 등 여러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짧은 글에서 그 많은 주제를 모두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에서는 성리학을 주로 정치이념으로 간주하고 탐구한 논저를 중심으로 조선 전기의 유교사를 개괄하려 한다.
1. 조선 건국과 성리학
그동안 조선 건국은 고려 후기 사회변동의 결과로 평가해왔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를 역사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려 후기 농업이 휴한에서 연작상경으로 바뀌면서 농업생산력이 늘어났고, 이른바 ‘신흥사대부’가 이런 변화를 주도했다고 보았다. (이태진, 1983) “이들은 지방 향리로서 중소지주였고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료가” 된 이들로 규정되었다 .(이우성, 1964) 그러나 사대부의 개념이 점차 구체화하고 여말선초 사상사 연구가 진척되면서 단지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사상 역시 규명되었다. 그에 따르면, 신흥사대부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학습해서 새로운 정치를 지향한 이들이었다. 즉, 신흥사대부를 범주화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바로 성리학이었다.
고려 말의 성리학 수용은 한국 유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조선 건국의 사상적인 배경을 규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15~16세기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는 시초를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간의 연구는 실제로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는 과정에 주목해 왔다. 정옥자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이색의 학맥 중에서 이제현 단계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으리라고 보았다. 이제현은 충선왕과 원에 머무는 동안 만권당을 중심으로 원의 학자와 교유하며 주자성리학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와 교유한 한족 출신의 강남 지식인들은 모두 주자성리학자였다고 한다. (정옥자, 1981) 고혜령은 원에서 과거제가 시행되고 주희의 『사서집주』가 과거 텍스트로 선정되면서 고려에 성리학이 유입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의 지식인들이 원의 과거에 응시하면서 주희의 사서집주를 학습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고혜령, 2001) 그렇지만 고려 지식인들이 성리학을 빠르게 학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고려 중기부터 북송의 신유학이 유입되고 그것이 불교적인 心性化를 통해 나름대로 지속되면서 성리학 수용의 토대가 마련된 덕분이었다. (문철영, 1981)
한편으로 그간의 연구는 고려 성리학의 특징을 원대 성리학의 성격과 연결지어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원에서 학술계를 주도하며 주자학을 官學으로 정립하는 데 공헌한 인물은 노재 허형이다. 원에 유학했던 고려 지식인들은 그의 학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허형의 학문은 이기심성론 같은 형이상학보다 小學 중심의 실천을 중시했다. (허남진, 1991) 주자학 전체에서 화이론ㆍ명분론은 배제하고 居敬을 통한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원의 체제 중심적인 주자학의 성격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고려에 유입된 성리학도 원의 관학화한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鄭道傳ㆍ趙浚ㆍ尹紹宗 등이 학자는 원의 관학화된 성리학에서 벗어나 본연의 주자학, 즉 강남 성리학을 수용했다고 한다. (도현철, 1999) 그러나 이런 설명은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과도하게 이분법적이라는 것이다. 몽골(원)과 허형과 관학 성리학의 반대편에 강남과 한족과 강남성리학을 설정하는 이런 구도는 명료한 설명틀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로 입증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서사에 걸맞게 구성된 틀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학술지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다. 다른 하나는 특정 사상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정하고 그것이 수용자에게 그대로 반영될 것이라는 무리한 가정 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가령 원의 관학화된 성리학을 수용한다고 해서 그 수용자가 관학적이고 보수적인 마인드를 갖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런 설명틀보다는 중국 성리학의 다양한 흐름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도입되었으며 관료-학자 개인의 여러 변수에 따라 서로 다른 지점들을 강조했으리라는 강문식의 설명이 더 정합적이라고 생각한다. (강문식, 2018)
한편, 근래에는 성리학 수용과 조선 건국의 관계에 주목하던 종래의 연구에서 벗어나 보편문화, 즉 중화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유학사가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문중양은 조선이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차원에서 문물제도를 정비해나갔다고 보았다. (문중양, 2006) 최종석도 조선이 중화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스스로 유교적 예제에 걸맞은 국가 제도를 갖추려 했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최종석, 2010) 이런 설명은 여말선초에 유교가 지닌 영향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대인이 지향했던 유교가 과연 어디에서 유입되었는지, 그것이 주희의 학설에 부합하는지, 대내적인 개혁정치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체는 관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근래의 여말선초 유학사 연구에서 성리학 자체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태진, 1983, 「고려말·조선초의 사회변화」, 『진단학보』 55
이우성, 1964, 「고려조의 ‘吏’에 대하여」, 『역사학보』 23, 1964
정옥자, 1981, 「麗末 주자성리학의 도입에 관한 소고」, 『진단학보』 51
고혜령, 2001, 『고려후기 사대부와 성리학 수용』, 일조각, 63쪽
문철영, 1981, 「麗末 新興士大夫들의 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 3
허남진, 1991, 「조선전기의 성리학 연구」, 『국사관논총』 26.
도현철, 1999, 『고려말 사대부의 정치사상연구』, 일조각
문중양, 2006,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189
최종석, 2010, 「조선초기 ‘時王之制’ 논의 구조의 특징과 중화 보편의 추구」, 『조선시대사학보』 52
2. 15세기: 성리학 연구의 미진
그간의 연구는 성리학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시점을 14세기 후반으로 보았지만, 주자 학설 중심의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는 것은 16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까닭에 15세기 성리학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근래에 간행된 조선시대사 개설서의 성리학 관련 저술에서 15세기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도 그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김훈식, 2015; 고영진, 2015)
정재훈에 의하면, 15세기 성리학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변별할 수 있다. ①15세기 성리학을 과도기적 성격을 띠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경향, ②주자성리학을 도입했으나 문물제도 정비 등 정치적인 면에서는 『주례』 같은 漢唐儒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경향, ③여말선초의 성리학이 주자의 학설 외에 다양한 학문 경향을 포괄한다고 보는 경향이다. (정재훈, 2005) 어느 쪽이든 15세기 성리학이 ‘주자성리학’을 충실하게 수용하지는 못했다는 전제 위에 놓여있다. 15세기 성리학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데는 그런 배경이 놓여있다. 대신 15세기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활동했던 관료 혹은 유학자의 정치사상이나 그에 기초한 제도 개혁 등이 유교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15세기 유학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정도전과 권근이다. 정도전 연구의 핵심 주제는 ‘재상정치론’이었다. 우선 정도전의 정치사상에서 ‘재상정치론’에 주목한 연구자는 한영우였다. 그에 따르면, 정도전은 ‘농민적 성리학’과 『주례』를 바탕으로 국왕은 관념적인 통치권을 지니고 재상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통치체제를 고안해냈다고 한다. (한영우, 1973) 하지만 근래에 송재혁은 이런 견해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기존 한국사 연구자들이 정도전의 정치질서 구상을 의원내각제 혹은 입헌군주제에 유비해 왔다고 지적한 뒤, 그런 설명이 정도전이 활동했던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정도전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서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정치 질서를 추구했다고 한다.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제시된 저작이다. (송재혁, 2016)
[참고1] 한영우가 지주적 성리학과 농민적 성리학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례』에 근거한 자작농 사회 건설을 위해 성리학 이외의 사상도 탄력적으로 받아들인 점과 명분론 같은 성리학의 일부 내용을 제한한 점을 농민적 성리학의 특징으로 들었다.
한편, 권근의 경학은 15세기 성리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 주목을 받았다. 강문식은 권근의 경학에서 ‘天人合一論’에 주목했다. 그에 의하면, 권근은 하늘과 인간의 性이 같으므로 合一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것은 ‘私慾’ 제거라는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견해로 나아갔다. 권근은 그 방법으로 ‘敬’을 중시했다고 한다. (강문식, 2008) 다만 권근의 학문에서 理氣의 관계가 분명하게 설정되지는 않았고, 『중용』 첫 장의 분절 문제에서도 주희의 견해와 다른 점이 발견된다는 설명도 있다. (허남진, 1991) 그렇지만 조선 후기 성리학 수준을 기준으로 15세기 성리학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는 강문식의 지적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주희 학술의 핵심이 ‘인간학’과 ‘윤리학’에 있었으며, 권근이 그 핵심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강문식, 2018)
다만 강문식이 지적했듯이 15~16세기의 성리학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대체로 조선의 유교화는 16세기부터 진행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15세기에도 유교화를 위한 노력들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김항수는 경서 언해가 16세기에 이루어졌다고 하면서도 그런 노력이 나타난 시기는 조선 초라고 지적했다. (김항수, 1987) 지금까지는 15세기의 유교화 노력이 대체로 미숙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성과를 충분히 내지 못한 것처럼 평가했지만, 15세기의 시행착오가 16세기에 어떤 자산이 되었는지는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로 보인다.
김훈식, 2015, 「성리학적 인간의 형성 – 조선 사람들, 성리학의 시대를 살다」, 한국역사연구회 편, 『조선시대사②』, 푸른역사
고영진, 2015, 「학문적 네트워크의 형성 – 학파와 학문 교류」, 한국역사연구회 편, 『조선시대사②』, 푸른역사
정재훈, 2005, 『조선 전기 유교정치사상 연구』, 태학사
한영우, 1973, 『정도전사상의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송재혁, 2016, 『정도전의 정치체제론 : 『서경』의 정치이념과 왕권의 정상화』,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강문식, 2008, 『권근의 경학사상 연구』, 일지사
강문식, 2018, 「여말선초 성리학의 수용과 그 성격」, 『역사비평』 122
김항수, 1987, 「16세기 경서언해의 사상사적 고찰」, 『규장각』 10
3. 16세기: 성리학과 사림정치
16세기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단칠정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선행 연구에 의하면,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각기 리발과 기발로 구분하고 전자를 선한 감정, 후자를 악한 감정의 발현으로 보았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기대승은 칠정이 인간의 감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고, 그중에서 中節한 것을 사단이라고 보았다. 이로부터 시작된 성리학 논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정교하게 정리되어갔다. 성혼은 성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인심ㆍ도심 개념을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기본적으로 기대승의 논의 구도를 이어받은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고 보아 인심-도심의 대립 구도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나종현, 2019)
성리학에 대한 논쟁은 단지 학자 개인 간의 산발적인 논의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학파를 형성하고 성리학 연구를 더욱 진전시켰다. 현상윤 이래의 오랜 유학사 서술에서는 퇴계학파가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정재훈은 성리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의 형성 과정을 서술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성리설 이외의 요소, 즉 퇴계와 그 문인의 관계나 다른 학파와의 관계 등이 고려되지 않고, 이황 이래의 학맥을 기록한 『도산급문제현록』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재훈, 2008) 실제로 율곡학파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학파 형성 과정에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동인과 서인이 대립했던 16세기만 해도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가지고 대립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인 측에서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이를 비판하면서 주로 내세운 요지는 그의 ‘편당성’과 출가 이력을 문제 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조정에서 논쟁거리로 떠오르면서 이제 이이의 학문은 정치적 쟁점과 결부되어 함께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나종현, 2021) 이것은 학파의 결집에 성리설뿐 아니라 정치적인 변수가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학문과 정치의 관계다. 기존 연구에서 16세기 성리학 연구 심화에 관심을 둔 것은 단순히 지성사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정치세력의 변동과 긴밀하게 연결지어 왔다. 실제로 그간의 연구에서 성리학의 확산과 연구 심화에 주목한 맥락은 ‘사림’의 정계 진출이었다. 그에 따르면, 吉再처럼 조선 건국 당시에 새 왕조 참여에 거부했던 이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리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그 후학들이 향촌에서 결집하여 성종대부터 중앙 정계에 신진세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른바 ‘사림’이라 불리는 이들은 『소학』을 강조하며 개인의 성리학적 윤리 규범 실천을 중시했으며, 정치를 통해 성리학적인 윤리를 전 사회에 확립하려 했다. 향사례ㆍ향음주례 보급 운동과 향약 보급운동은 그 구체적 노력이었다. 아울러 사림은 유교적으로 바람직한 정치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이른바 ‘훈구’ 혹은 ‘관학파’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설명은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하는 사상적인 동력으로 ‘성리학’에 주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칠정 등의 논쟁이 “16세기 사림의 정치ㆍ사회적 동향과 함께 그들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이 응축된 것으로 추측된다”는 평가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설석규, 2007)
물론 사림의 등장과 성리학의 확산 사이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곤란하다. 군주의 학문을 위한 이황과 이이의 저술에 공통으로 “聖學” 두 글자가 포함된 것은 정치와 성리학 사이에 모종의 관련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제는 정치와 학술 사이의 관계가 그다지 명료하지 않다는 데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東西 분쟁 당시에 이이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편당성’과 출가 이력뿐이었다면, 즉 학문적인 쟁점이 훗날에야 문제가 되었다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시종일관 학문과 정치가 긴밀하게 관련이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정치적인 성격을 띤 문묘종사 논의 이후에야 이이의 학술이 비판받기 시작한 사실을 고려하면, 정치와 학술 사이의 관계가 정합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치 상황과 맥락에 따라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종현, 2019, 「제1장 율곡학파 학문 전통의 성립과 이론적 과제」, 『율곡학파 성리설의 전개와 호론 사상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정재훈, 2008, 『조선시대의 학파와 사상』, 신구문화사, 54~56쪽
나종현, 2021, 「17세기 율곡학파 내 성리설의 변화」, 『동국사학』 70
설석규, 2007, 「제5장 조선 중기 사림파의 정치사상」, 『한국유학사상대계 6』, 한국국학진흥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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